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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요아 Jun 01. 2024

모두 다 까먹고 퇴근하는 기분


1. 첫 번째 손톱



회사를 여덟 번 옮겼지만, 그렇다고 한 회사를 일 년 이상 다녀본 적 없는 나는 늘 애인 '건'이 신기하다. 광고 대행사에 다니는 건은 분야도 다양한 여러 고객사가 맡긴 업무를 하느라 일주일을 꼬박 야근하거나 밤을 통째로 회사에서 보낸 적도 있지만 쉽사리 퇴사를 고민하지는 않는다. 나는 상사와 말다툼을 하거나, 약간이라도 일이 어그러진다 싶으면 마음속으로 사직서를 준비하는데 건은 반대다. 나는 퇴근해서도 회사에서 있던 낮의 일을 끌고 와 그 상황에 어떻게 대처하면 좋았겠다는 대처법을 준비하지만, 건은 당혹스러운 일에 조금 신경이 쓰일지라도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자며 깔끔하게 잊는다. 오히려 너무 잊어버려서 다음 날 아침에 밀린 일을 마주하느라 허둥지둥하다는 단점이 있을 정도다. 때로는 나도 그 일이 있었는지 모를 만큼 완벽하게 잊고 싶다. 직면하지 않고 퇴사로 상대방을 더는 보지 않는 내 습관이 좋지 않은 손톱이라는 사실을 그를 보며 알았다.


한 회사를 오래 다니며 전문가가 되고 싶고, 오래 다닌 덕분에 친한 동료의 결혼식에 초청받아 눈물도 흘리고 싶고, 삼 년 근속을 했다며 한 달 유급 휴가로 먼 나라에 여행을 떠나고도 싶다. 그러려면 전제 조건은 회사에 끈질기게 붙어 있는 것인데 나는 그렇지 않다. 불의를 참지 못하고 비아냥거리는 마음이 통제하지 못해 입 밖으로 나간다. 스트레스를 주는 상대를 보고 싶지 않아 등을 돌리는 쪽을 고른다. 야근을 하는 날이 잦아지면 퇴사를 준비한다. 그런데 건은 야근을 해도 몸만 지칠 뿐 나처럼 회사를 싫어하지는 않는 것 같다. 언젠가 그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밤에 회사에서 일을 하는 게 짜증 나지 않냐는 물음이었다. 건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힘과 기운을 하루에 모두 쏟아붓지 않고, 설렁설렁하다 보면 야근이 생기는 날도 있기 마련이다. 어차피 내가 쉬면서 한 것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생긴 야근이기 때문에 야근을 해도 그렇게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나는 자리에 앉는 순간부터, 하루에 할 일을 정해놓고 약속된 퇴근 시각 전까지 그 일을 몽땅 해치우겠다고 다짐한다. 그러니 퇴근 시각에서 십 분이 지나고 한 시간이 지나면 조급해진다. 조급함을 넘어 짜증이 올라온다. 사내 메신저를 통해 오늘 이 일을 다 하기로 선언했는데 그 일을 하지 못하고 퇴근하면 게으른 직원이라는 표시가 생길 것 같아서 망설인다. 결국 소진된 채로 집에 와서 저녁을 차릴 힘이 없어 배달을 시킨다. 허겁지겁 배를 채우고 배달 용기는 제대로 치우지도 않는다. 내일은 또 어떻게 그 많은 일을 한 번에 해야 할지 출근하기 전부터 부담감에 짓눌린다. 하지만 건은 가볍다. 요즘 뜨는 추리 예능이 있는데 그 예능을 오늘 보자는 제안을 하고, 눈길을 끄는 드라마 시리즈가 생겼는데 예고편이라도 같이 볼 생각이 없냐고 묻는다. 좀처럼 풀리지 않는 회사 일을 생각하는 나와는 반대다. 그도 나처럼 하루에 다 하면 좋을 일을 모두 끝내지 않았으면서 스스로를 자책하지 않는다.


누가 봐도 홀가분해 보이는 표정으로 리모컨을 만지작거리는 건에게 "어쩔 수 없는 일이 생겼을 때는 어떤 기분이냐"라고 물었다. 섭외를 하기로 했는데 섭외가 잘 되지 않아서 곤욕을 겪을 때, 제안서가 잘 쓰이지 않을 때, 매력적인 카피가 당장 필요한데 아무리 고민해도 답이 나오지 않을 때는 어떻게 헤쳐 나가냐는 말이었다. 답은 명료했다. "어쩔 수 없는 건 받아들여." 사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그 말이 무슨 말인지는 잘 모르겠다. 분명한 건, 어쩔 수 없으니까 포기하겠다는 투의 말은 아닌 것 같다. 어쩔 수 없음을 받아들이고 다음을 준비하는 것과 가까워 보인다.


나는 어떻게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냐고 상황에 실망하고 좌절하는데 건은 빠르게 받아들이고 다음 섭외자에게 연락하고 다른 카피를 구상한다. 내 경우에는 고심하며 쓴 카피가 거절당했다면, 그 카피가 왜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종일 분석하는 반면 그는 받아들이고 속도감 있게 받아들인 뒤 다른 제안을 건넨다. 타격감이 없는 사람이다. 건을 보며 한 회사를 오래 다니는 방법을 조금씩 깨닫고 있다. 사직서를 내고 싶고 회사 밖으로 도망가고 싶은 손톱이 굴러갈 때마다 건이 되었다는 기분으로 마우스를 잡는다. 일곱 시까지 못 하면 내일 하자. 퇴근하고 오싹거리는 추리 예능을 보자.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자. 나는 오늘 하루만 다닐 게 아니라, 내일도 모레도 출근할 사람이다. 모두 다 까먹고 퇴근하는 기분이란 어떤 기분일지 상상하다 그만둔다. 곧 그 기분을 느낄 수 있을지 모른다.


후일담

회사 책상을 꾸미는 데스크테리어를 그만뒀다. 원래는 인체공학 키보드에 모니터가 움직이는 노트북 거치대에 튼튼한 선풍기까지 구비해 놓고 피겨를 고민했다. 책상에 새로운 물건이 하나씩 쌓일수록 하루에 새로움과 생기가 더해지는 것 같아서 꼭 아침마다 무언가를 하나 챙겼는데 다가오는 월요일부터는 뻔하게 출근할 예정이다. 한껏 꾸미기보다, 편한 옷을 입고 자주 매는 가방을 들 계획이다. 오늘 해야 할 일은 다섯 가지니까 그 일을 깔끔하게 마무리짓겠다고 커다란 다짐을 하기는커녕 반 이상만 해도 성공이라는 헐렁거리는 마음을 설렁설렁 안고 문 밖을 나간다. 그러면 언젠가 모두 다 까먹고 퇴근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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