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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요아 Jun 08. 2024

골탕 먹이겠다는 마음


2. 두 번째 손톱



겉으로 보면 어떤 사람과도 친숙하게 말을 섞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사람에 대한 신뢰가 적은 걸 넘어 없는 편이다. 지금 웃으며 나를 대화하는 사람이 일부 정도는 나를 미워하는 면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아직 배신을 당하지 않았지만 살면서 사람들에게 무수히 많이 발등을 찍힐 거라고 예상한다. 저 사람은 나를 좋아하고, 아끼고, 사랑한다는 믿음이 없으니 처음 보는 누군가가 내게 서비스를 얹어주거나 칭찬을 건네면 내게 다른 어떤 걸 바라는지 의심한다. 한 상황으로부터 성격이 이렇게 바뀐 건 아닌 듯하다. 단짝과 절교를 하고 모르는 사람에게 미운 말을 듣고 한때는 아무런 죄도 없이 낯선 이에게 대뜸 손가락질을 당한 적도 있어서, 내게 있어서 사람들은 더는 완벽히 믿어서 안 되는 존재로 변했다.


애인 '건'과 연차를 내고 수영장이 딸린 비싼 호텔에서 바캉스를 누릴 때만 해도 사람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내 면모가 발휘될지 몰랐다. 호텔 안에서 밥을 먹을 테니 굳이 다른 사람과 부딪힐 필요 없고, 호텔 밖을 나가 근처 주변을 둘러보는 일도 없으니 마주치는 사람의 수가 압도적으로 적다. 좁은 거리를 걷다가 무심코 어깨를 세 개 부딪혀 아파할 일이 없고, 수영장 역시 인원을 관리하는 예약 시스템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물보다 사람이 많을 일도 없다. 나는 완벽히 예약을 했으니 체크인 시간이 되면 이미 잘 봐두었던 객실 안으로 들어갈 예정이고, 점심에는 무얼 먹고 저녁에는 어떤 걸 먹겠다는 계획으로 영업 중인 식당을 저장해 두었다. 호텔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내가 할 일은 해야 하는 모든 걸 잊고 그저 푹 쉬는 것뿐이라며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회사로 돌아가면 부지런히 해치워야 할 쌓인 업무와 잘 구상이 되지 않는 작품에 대한 스트레스를 하루만큼은 몽땅 잊어버리겠다고 결심했다.


결심을 행동으로 만드는 일 중 하나는 긴 영상을 두 차례 정도 끊이지 않고 보는 것이었다. 평소 영화나 예능을 좋아하는 건이 들으면 환영할 일이었다. 영상을 보면 할 일이 자꾸 생각나 죄책감이 든다는 내가 먼저 선뜻 보고 싶은 영화 제목을 꺼내니 건은 신나게 그 영화를 볼 수 있는 플랫폼을 찾았다. 영화관에서 개봉했다가 이제야 막 집에서 볼 수 있는 영화여서 대여나 구매를 해야 했다. 적당한 값을 내고 빌리는 것 정도야 아무렇지 않은데, 중요한 건 호텔이어서 그런지 앱을 설치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내가 그 영화를 한 앱으로 결제해서 커다란 모니터로 연결해 보려고 하면 그 앱이 없어서 열리지 않았다. 스마트폰 화면을 그대로 모니터로 송출하는 방법으로 보려고도 해 봤지만 저작권이 걸려 막혔다. 우리는 호텔에 전화해 티브이 리모컨을 새로 받고 한 시간째 어떻게 하면 영화를 큰 화면으로 볼 수 있을 지에 대해 고민했다.


고민하지 않고 영화를 보는 방법이 물론 하나 있기는 했다. 티브이 자체에 설치된 영화 리스트에서 구매 버튼을 클릭하고 결제하면 스마트폰과 연결할 필요 없이 바로 영화를 볼 수 있었는데, 나는 그게 꺼려졌다. 영화를 한 편 구매하면 그 아이디와 연동된 적어도 이 티브이를 사용하는 다음 사람은 우리가 돈을 내고 구매한 영화를 무료로 볼 수 있다. 심지어 그 영화는 신작이고 인기 있는 영화라서 그 사람 또는 사람들이 행복해하며 우리에 대한 감사 없이 그저 영화를 틀어버릴 수 있다. 나는 그게 싫었다.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이고 착한 사람이면 선뜻 그럴 마음이 있는데, 그 사람이 나쁜 사람이라면? 초록불에서 건너는 내게 차를 들이대며 비키라고 손가락질한 이상한 사람이라면? 그 가정을 배제할 수 없어서 쉽사리 결제를 하지 못하겠다는 내 말에 건이 우선 이해하겠다고 스마트폰 앱으로 결제를 하다가 볼 수 없는 사달이 나서 급기야 이 영화를 오늘 보기 위해서는 두 번 결제해야 하는 상황까지 놓인 거였다. 그 원인 제공자는 나였다.


"그냥 영화 보지 말까?"


내가 묻자 건이 의자에 다소곳이 앉았다. 어딘가 앉아서 얘기를 한다는 건 목소리가 길어진다는 뜻과도 겹쳐서 나는 건의 말을 끊지 않기 위해 애써야겠다고 다짐하는 중이었다. 어쩌면 조금은 혼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강경하게 다른 사람에게 이 영화를 보여주기 싫어서 결제하고 싶지 않다고 고집부렸으니까. 건이 말했다.


"우리 오늘 먹은 수박 빙수 있잖아. 편의점에서 산 물도. 그 편의점과 카페 주인 분들이 실은 네가 생각하는 나쁜 사람이라면? 그러면 우리는 그 사람들의 물건을 사고 돈을 건네준 꼴이 되잖아. 세상을 살면서 나쁜 사람을 완전히 피하는 방법은 없다고 생각해. 나쁜 사람만 생각하다가 우리만 피해볼 수는 없어. 목이 마른데 편의점 사장님이 악덕 주인일까 봐 물을 사지 않고, 호텔에 가고 싶은데 호텔 사장님이 나쁜 사람일지도 몰라서 호텔을 포기할 수는 없잖아."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째 손톱이었다. 사람을 믿지 않고, 믿지 않는 걸 넘어 그 사람이 어쩌면 나쁜 사람일지 모른다고 가정하고, 익명의 사람을 골탕 먹여야 할지도 모른다는 마음까지 드는 게 부정적인 사고의 흐름이라고. 그 사고를 하루아침에 완전히 끊을 수는 없다. 갑자기 사람을 사랑하고,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람의 말을 모두 믿고, 내가 상대방을 좋아하는 만큼 상대방이 나를 좋아한다고 여길 수도 없다. 하지만, 적어도 그 사람이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는 있다. 티브이를 켜고 영화를 다시 결제했다. 돈은 두 번 나갔고 한 시간은 사라졌지만, 분명 뜻깊은 경험이었다.


후일담

호텔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다음 날 아침, 지하철에 자리가 생겨서 냉큼 앉았다. 원래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잘 앉지 않는 나다. 옆 사람과 어깨나 엉덩이를 마주치는 게 불편해서 차라리 구석에 서 있는 게 마음 편했다. 오늘부터는 양보할 수 있다면 충분히 양보하겠지만, 자리가 여유롭다면 다리가 아플 때 꾹 참는 것보다 잠시라도 앉아서 가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했다. 언젠가 사람들을 믿는 날이 오겠지. 적어도 그 사람이 어떤 말을 했을 때 그 말을 의심부터 하는 사람이 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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