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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요아 Oct 12. 2024

잘 쉬자는 욕심


맞지 않으면 도망친다. 벅차다는 이야기를 해봤자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 열심히 하거나, 아예 그만두거나. 내가 고를 수 있는 대안은 이것뿐이다. 많지 않은 나이에 여섯 번의 퇴사를 한 건 이런 가치관을 품어서였다.


뜻하지 않은 야근이 확정되거나, 당일치기로 지방에 외근을 다녀오는 일정이 늘어나거나, 상사의 피드백이 고깝게 들릴 때면 달력을 열고 퇴사일을 정했다. 더욱이 스스로를 다 태울 만큼 커다란 프로젝트를 끝낸 뒤에는 퇴사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직속 상사에게 면담을 요청하기 전에 인사팀에게 연락을 했다. 일을 그만두겠다는 말은 적어도 같은 프로젝트를 하는 상사에게 먼저 얘기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지만, 어차피 다시 볼 사이가 아니니 굳이 의례는 지키지 않았다. 심지어 어떤 회사에서는 당일 퇴사를 하기도 했으니, 내게 직장 동료란 ‘돈으로 얽히는 비즈니스 사이’에 그쳤다. 퇴사를 했음에도 전에 만난 직장 동료의 결혼식에 간다거나, 전에 다니던 직장의 상사와 회사 밖에서 밥을 먹는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그저 신기했다. 내게는 그런 경험이 없었다. 애초에 한 회사를 일 년 이상 다녀본 경험이 없으니, 기다란 프로젝트를 같이 하며 생기는 유대감을 느끼지도 못했다.


언젠간 잘리고, 회사는 망하고, 우리는 죽는다! 어느 책의 제목처럼, 나는 회사에서 힘듦을 겪을 때마다 빠르게 끝을 상상했다. 사직서를 내고 몇 없는 짐을 챙긴 뒤 거리로 나오면 드디어 이곳을 빠져나왔다는 행복에 절로 후련해졌다. 오후 네 시에 문을 닫는 카페에 가거나, 한적한 오후에 병원에 들를 때면 자유로운 몸이 되었음을 실감하게 됐다. 그런 후련함이나 상쾌함이 이어지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텐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답답한 건물에서 빠져나왔음을 느끼는 건 순간이었고, 당장 내야 할 월세나 식비가 걱정스러웠다. 직전 회사에서는 정리 해고를 당했으니 실업 급여를 받을 수 있었지만, 일주일이라는 짧은 기간을 두고 환승하듯 다른 회사로 옮긴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월세를 걱정하기 싫어서. 마음에 드는 카페를 자주 가고 싶어서. 때때로 만나는 친구들에게 밥을 얻어먹는 게 미안해서. 전세 대출을 받기 위해 직업란을 채울 때, ‘프리랜서’라고 답하면 한참 못 미치는 금액만 빌려줄 수 있다는 게 슬퍼서.


옮긴 회사는 다행히 괜찮았다. 나름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었고, 인정도 받는 느낌이었다. 점심을 혼자 먹는 일도 확연히 줄었다. 출근하면 동료들과 점심에 어느 맛집을 갈지 고르는 하루. 월요일이면 주말에 어떻게 쉬었냐고 묻는 평범한 삶. 그런 날들을 보냈다. 요령이 생겨 당황하는 일도 줄어들었으니 회사가 망한다거나 커다란 실수를 하지 않는다면 일 년 정도야 거뜬히 다닐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여태까지의 경험으로 쌓인 이미지를 무시하기란 어려웠다. 회사란 버텨야 하는 곳이고, 월급을 주기 때문에 종일 자고 싶은 날에도 억지로 몸을 일으켜 향해야 하는 곳. 회사원이란 자유를 속박당하고 주체적으로 시간을 운용할 수 없는 직업. 직장인 바깥의 하루를 살 때면 넘쳐흐르던 시간이, 직장에 다니는 순간부터 모조리 사라진 것 같았다. 교통비를 아끼며 집에 가기 위한 방법으로는 사람이 가득 찬 버스에 몸을 밀어 넣는 것만 있음을 깨달을 때, 그런 마음이 들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아무런 일도 하지 않으며 살 수는 없을까.


이상한 건, 회사 밖에 나올 때에야 그런 마음을 알아챈다는 거였다. 다 그만두고 자고 싶다는 감각 같은 것. 푹신한 사무용 의자에 앉아 내가 직접 고른 키보드를 치며 광고주에게 메일을 보낼 때는 그런 생각에 빠질 겨를이 없었다. 퇴근 버튼을 누르고 동료들과 내일 보자는 인사를 나눌 때가 되어서야, 깜깜한 집에 도착해 신발을 아무렇게나 벗고 의자에 앉아 물을 마실 때가 와서야 비로소 감정을 매만질 수 있었다. 그만두면 얼마나 편할까. 일을 그만두고 책임감을 벗어던지면 얼마나 후련할까. 이불 속에만 있다면 얼마나 아늑할까. 사실 이런 생각보다 가장 많이 머릿속을 채운 한 단어는 이거였다. 쉼. 눈을 감으면 다시 뜨지 않아도 될 만큼 쉬고 싶었다. 기다란 추석에 집도 가지 않고 아무런 약속도 잡지 않은 건, 명절을 내내 잠으로 보내면 나를 옭아매는 이런 생각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하늘에 있지도 않으면서 비행기 모드를 켰다. 어떤 연락도 받고 싶지 않았다. 그저 잠만 잤다. 암막 블라인드를 치고, 이어 플러그를 끼고, 수면 안대로 빛을 가렸다. 너무 많이 자서 억지로 눈이 뜨일 때면 안대를 걷고 시간을 확인했다. 세 시간이 흐른 줄 알았지만 한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조금 망연했다.


도토리를 가득 챙기고 겨울잠에 빠지듯 잠만 자면 개운할 거라고 믿었지만, 전혀 아니었다. 불안하고 쓸쓸했다. 등이 아프고 허리가 쑤셨다. 몸은 잠들었다지만 머리는 팽팽 움직였다. 급기야 악몽을 꾸고 가위에 눌렸다. 움직이지 않는다는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늘어난 수면 시간에 맞게 휴식의 질도 덩달아 오를 거라고 추측했지만, 현실은 배고픔과 두통에 시달리는 나를 발견할 뿐이었다. 오래 잤으니 머리가 아파서 두통약을 삼켰다. 빈 속에 약만 넣었으니 속이 쓰렸다. 연휴 셋째 날이 되어서야 몸을 일으켰다. 힘을 내 씹지 않아도 자연스레 부서지는 카스텔라를 먹으며 나에게 맞는 휴식법을 찾아야겠다고, 쉬는 법을 제대로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대학생일 때는 몸이 힘들었으니 당연히 잠이 효과가 있었다. 과외 때문에 하교 후에도 서울을 한 바퀴 돌고, 주말이면 팔 하나에 접시 세 그릇을 두고 서빙을 했으니까. 한창 몸을 움직일 때는 자는 게 개운했다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지친 건 몸이 아니라 마음이었다.


삼 년 전에는 죽음학에 골몰했다면, 요즘은 휴식학에 빠졌다. 자는 것은 쉬는 것이 아니라는 내용의 책을 여러 번 읽고, 앉은 채 머리를 굴리는 게 업무인 현대의 직장인은 다른 일로 환기를 하거나 몰입을 하는 게 휴식이자 활력이라는 문장에 밑줄을 친다. 책은 이렇게 말한다. ‘평일 뒤에 오는 주말에 쉰다’가 아닌, ‘주말에 쉰 만큼 평일에 일한다’로 생각을 전환하라고. 따라 평일에 가는 회사는 무조건 벗어나야 하는 공간이라고, 월급을 받는 일은 다 하기 싫은 일이라고, 벅차다는 이야기를 해봤자 달라지는 건 없다는 믿음도 조금씩 지우는 중이다. 힘들면 왜 힘든지, 어떤 것 때문에 힘든지, 이 힘듦을 누구에게 얘기해서 해결할 수 있을지 궁리한다. 상사를 만나 용기를 낸다. 지금 맡은 일이 과중하다고, 어떤 업무 때문에 지치다고, 이 일보다는 저 일을 더 하고 싶다고. 심지어는 팀원을 한 명 더 채용하자고 제안한다. 사건의 근원을 찾고 마음의 정체를 더듬는 일을 좀처럼 하지 않아 번거롭기는 하다. 문제 해결을 위해 나서는 일은 오랫동안 멈췄던 터라 익숙하지 않다. 하지만 순간적인 충동에 도망쳤다가 궁핍한 생활 때문에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는 경험은 다시 하고 싶지 않아 귀찮음을 감수한다.


일을 그만두지 않고도 충전하는 방법을 찾으면 내가 좋아하는 일을 꾸준히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마음에 틈이라는 단어를 슬며시 떨어뜨린다. 틈을 내어 쉬는 일, 틈을 내어 몰입하는 감각, 틈을 내어 아끼는 사람들 사이에서 웃는 편안함을 늘린다. 그러면 어느 순간에는 현실과 일상이 도피처로 여겨지지 않을 테니까. 낯선 이와 대화를 한다는 자극이, 누군가와 일적인 통화를 한다는 자극이, 더는 탈진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미리미리 쉬는 법을 찾는다. 휴식에 잠을 연결 짓지 않는 게 굉장히 어렵지만, 못할 일은 또 아니다. 먼지가 쌓인 닌텐도에 일주일 내내 해도 엔딩을 보기 어려운 모험 게임을 깔고, 십 년 내내 미뤘던 료칸을 위해 후쿠오카행 티켓을 끊었다. 영상을 보며 빈둥거리는 대신, 카페에서 아무도 청탁하지 않은 글을 성실히 쓴다. 실업급여를 받는 법 대신 어떻게 하면 즐겁게 일할 수 있을지 고민하기까지 한다. 성공하고 싶은 욕심, 인정받고 싶은 욕심, 명예를 움켜쥐고 싶은 욕심 대신 ‘잘 쉬려는 욕심’을 챙긴다. 이왕이면 잠을 자지 않는 방식으로. 이렇게 지내다 보면, 언젠가는 나의 인터넷 검색창이 삶과 관련된 단어로 가득 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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