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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OS Feb 25. 2016

머리카락 연대기

삼십대 여자가 머리카락을 기르는 이유

내 기준으로- 남아메리카 여성들의 머리가 그렇게나 아름다웠다. 빛나는 진갈색의 머리와 항상 탱글탱글하게 말려있던 우아한 컬, 흑진주색의 반짝이는 피부를 가진 그들은 정말이지 참으로 아름다웠다. 어쩜 그렇게 흐트러지지 않고 기품있게 머리스타일을 유지하는지, 아침마다 젖은 머리로 찌질하게 등교하던 동양인은 부럽기만 했다.

 이 머리 꾸미기 방식은 사람마다 다른데, 그 차이는 미추에 관심이 얼마나 있느냐 여부로 갈린다. 고대 이집트 시절부터 이어오던 홈메이드 스타일, 고데기로 머리를 바싹 태워 아이롱을 하고 오는 경우부터 센트랄(말하자면..읍내?)의 대기시간 2시간 이상인 미용실에서 연예인급으로 머리를 업스타일하는 경우까지 다양했다.


항상 우리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너는 쪽진 머리가 예뻐.


그래서 엄마는 주구장창 쪽진 포니테일만 해주셨고, 머리카락 한 올 삐져나올세라 힘을 잔뜩 주어서 잡아당긴 두피는 이마와도 연결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듯 눈 찢어진 동양인 스타일을 완성해주었다. 이런 나의 유년시절과는 달리 머리에 관심이 많은 남미 엄마들은 본인머리만 하는 것이 아니라 kinder, 즉 어린이집에 다니는 자녀들의 머리까지 우아하게 컬을 넣어줘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다.


(머리장식도 미용실에서 다 해준다. día de amor 즉 밸런타인스 데이에는 드레스코드가 빨간색이다. 그 날이 있는 주에는 여자아이들은 모두 머리에 빨간 장식을 하고 온다. 머리끈, 핀, 하다못해 귀걸이라도! 일주일 내내 머리스타일은 동일)


주 1회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감고 원하는 스타일로 드라이를 한다. 신기방기하게도 그들의 머리는 월요일에 한 드라이가 일주일 동안 유지되었으며, 슬프게도 한 방울의 물이라도 맞으면 그들의 머리는 꽃보다 남자의 구준표마냥 순식간에 돌돌 말리게 된다. 잠시 간식시간에 남자아이들-주로 아직 여성에대한 배려가 조금 없었던-이 장난친다고 여자아이 머리에 물이라도 튀기면 사랑싸움이 아닌, 피 터지는 싸움이 시작되었다. (실제로 분노한 여학생 밑에 깔려서 얼굴을 맞던 남학생이 지금도 기억난다) 이러한 그들의 모발 특성 때문에 비라도 오기 시작하면 우산과는 별도로 머리에 죄다 비닐봉지를 쓰고 돌아다니는 진풍경을 보기도 했던 것이다.

모발 특성에 따른 미의 계급이 있는데, 계급의 가장 윗 단계는 물에 맞아도 흑인머리처럼 말려들지 않는 머리였다. 물에 맞아도 말리지 않는, 백인의 피를 짙게 물려받은 소수의 학생들과 동양인의 머리는 그들에게 찬사의 대상이 되었다. 매주 드라이를 하느라 머리가 타버린 학생들은 suave 즉, 부드러워~라고 하면서 내 머리를 자주 만졌고, 비오는 날 나는 비닐봉지 여성들 사이에서 당당하게 머리를 풀고 전교생의 이목을 받으며 엘리스틴 한 것 마냥 하교할 수 있었다.

나는 몰랐다. 인종을 구분하게 하는 기준은 머리카락이라는 거. 흑인, 백인, 황인의 머리카락은 다르다. 흑인 특유의 아주 얇고 곱슬거리는 머리만을 몇십년 만져본 미용사들이 자신있게 동양인의 머리도 내가 할 수 있노라..고 장담했지만, 결과는 정말이지 내가 잘라도 너보다는 잘 자르겠더라..는 머리만 남았다. 그러한 의미에서 해외에서 미용실을 갈 경우 실패할 확률이 높다. 어쩔 수 없이 머리를 길렀고, 의도치 않게 검고 두껍고 반짝이는 긴 머리가 (머리만) 아름다운 학생으로 기억되었다.

한국에서는 머리카락을 소아암 환자에게 기부하기 위해 2년 기르고 싹둑 자르고 그러길 세 번. 육 년간 머리를 길렀다 자르길 반복했다. (25센티 이상 염색하지 않은 모발이면 기부 가능하다. 자세한 내용은 포탈 검색)






바람이 분다 서러운 마음에 텅 빈 풍경이 불어온다
머리를 자르고 돌아오는 길에
내내 글썽이던 눈물을 쏟는다
하늘이 젖는다 어두운 거리에 찬 빗방울이 떨어진다
무리를 지으며 따라오는 비는
내게서 먼 것 같아 이미 그친 것 같아

- 바람이 분다, 이소라



그가 물었다.
왜 여자들은 헤어지면 머리를 잘라요?

음, 글쎄요 왜 자를까?

기분 전환하려고?

그럴 수도 있고요. 예뻐보이고 싶은 것도 있겠고요.



남자의'사랑해'는 사랑의 시작이고 여자의'사랑해'는 사랑의 완성이라는 말이 있다. 자는 이 여자면 되겠다 싶은 선만 넘으면 사랑한다고 말하고, 여자는 이 남자가 아니면 안 되는 선에 도달하면 사랑한다고 말한다.

- 박주영, 냉장고에서 연애를 꺼내다


여자들의 사랑해와 남자들의 사랑해가 다르다는 포스팅을 보았다. 남자들이 사랑한다는 말을 너무 쉽게 한다고 생각했다. 나에게 사랑은, 너를 위해 죽을 수도 있다...라는 무거운 뉘앙스도 포함되는데, 너는 어떻게 그렇게 사랑한다는 말이 쉬울 수 있지. 심지어 만난지 오래되지도 않았는데. 너는 표현을 잘하는 걸까 아니면 감정이 금방 올라오는 사람일까 궁금했다.
 십대 이십대를 거쳐오며 삼십대의 만남은 조금 더 심사숙고 하게 되고, 배려하게 되고, 책임감을 느끼게 된다. 네가 직장일에 힘들어하면 그만 두어라, 내가 벌겠다. 네가 와병환자가 된다면 내가 간호하겠다. 나에게 사랑은 이런 의미까지 내포되어있다. 물론 감정이야 휘발되는 것이어서 사랑을 의지적이고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나가야 함을 전제로 하고. 최악의 상황까지도 염두에 두고 그것까지도 내가 감수할 수 있으면 그제서야 나는, 비로소 나는 사랑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여자들이 헤어지고 머리를 자르는 것. 그건 함께 미래를 그려가고 싶다는 마음을 접었다는 의미와 다름아니기도 하다. 일생에 한 번 있는 웨딩, 가장 아리따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짧은 머리 신부보다 풍성한 긴 머리의 신부가 해볼 수 있는 선택지도 많고 예쁜 법이다. 일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날이라는 그 날을 위해 고이고이 머리를 기른다. 한 달에 일센티 자란다는 머리를 보면서 결혼과, 너에 대해 생각한다. 머리를 기른다는 것은 누군가를 진지하게 만난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머리가 기니 나름 어울린다!

길지 않은 연애가 끝났다. 이렇게 될 것을 은연 중에 알고 있었다. 성향이 너무나도 달랐지. 서로를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다. 머리 끝이 많이 상해 한올한올 찬찬히 보던 중 나의 머리카락에 대한 기억들이 얽히고 설키며 기억이 났다.


함께한 시간들이 머리카락 속에 있는 것 같아,


갈라지고 상한 머리들이 많다.


그래서 나는 머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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