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을 알아야 개념이 선다
개념이란 무엇인가?
개념이라는 것은 그것이 무한을 받아들이는 순간 내재성의 평면에서의 특이성의 운동 그 자체가 된다. 개념은 조각난 전체로 정의된다. 개념은 이질적인 구성 요소들의 유한한 다양체를 일관적이고 불규칙한 방식으로 자르고, 이를 강도적 떨림 속에서 응축시킨다. 우리는 개념을 주름의 조각이라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개념은 무한한 속도로 절대적 비행 상태에 있는 점이 두루 돌아다니는, 유한한 수의 이질적인 구성요소의 분리 불가능성이다. 개념은 이웃관계 외에 다른 규칙을 갖지 않는다. 개념은 항상 질서에 속한다. 그것은 어떤 아주 활기찬 무엇이고, 삶의 양태이다. 개념을 광적으로 창조하는 것은 여러 수준에서 이 함성을 표현한다. 개념은 자유롭고 야생적인 상태에 있는 사물 자체이다.
개념 안에 무한히 존재한다는 것은 이해가 될 수 없음이 분명하다. 개념이란 그 구성요소의 불규칙한 윤곽의 떨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념과 개념은 근본적인 점에 의해 구분된다. 이념은 특이성이 카오이드를 형성하기 위하여 어떻게 짝짓기를 할 수 있는지를 예견하도록 내버려 두는 데 비하여, 개념은 이웃관계의 펼쳐짐으로 무한에 이른 이 특이성에 의해 이미 형성된 주름의 조각이다. 개념이란 연속적이고 이질적이면서 본성을 바꾸지 않고는 분할이 불가능한 강조적 다양체를 규제하는 이웃관계이다. (반면 양적인 다양체는 우리가 알고 있듯이, 불연속적이며-이산적인, 그리고 등질적인 것으로서, 본성을 바꾸지 않고 분할이 가능하다.) 그러나 개념 역시 내재성의 평면 위에서 절단된 윤곽이다. “개념은 윤곽이고 배치이며, 앞으로 도래할 사건의 결정체이다.”
개념이란 결국 그 강도적 좌표에 따른 주름 자체의 정합적인 조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개념이란 ··· 체험된 모든 것을 훑는 사건을 일으키는 것이다.”
《들뢰즈 개념어 사전》(갈무리, 2012)에서 정리된 들뢰즈의 개념이다. 들뢰즈의 철학 입문서 역할을 한다. 그의 철학에 대한 개념어를 정리했다. 그 개념을 알기 위해서는 들뢰즈가 생각하는 개념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들뢰즈가 말하는 개념에 대한 개념에 대해 “이 정의가 수수께끼 같다는 사실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라고 말하고 있다. 들뢰즈의 생각을 논하는 것은 이후로 미루고 먼저 개념에 대한 개념을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다.
문자로 정리하다 보면 사물의 실체가 분명해진다. 쉽게 말해, 개념이 잡힌다. 정리하면 정리가 되고 개념이 잡힌다. 또 정리된 것을 읽는 것만으로도 개념이 잡힌다. 하지만 정리도 유연하고 가동적이어야 한다. 기계적 정리로는 사물의 실체를 알 수 없다.
덧_
들뢰즈 입문서 역할이지만 인용된 용어에 대한 번역은 생경한 것이 너무 많다. 들뢰즈를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익숙하겠지만 처음 접하는 이에게는 생소한 단어가 너무 많다. 몰이, 불공가능한, 불균한 등이다. 개념을 파악하기 위하여 이 책을 읽을 터인데 그 단어의 생경함으로 그 의미가 제대로 전달될지는 의문이다.
정의
사유에 가하는 폭력으로서의 이 개념이라는 것은, 그것이 무한을 받아들이는 순간 내재성의 평면에서의 특이성의 운동 그 자체가 된다. 즉 자유롭고 야생적인 상태의 사물들의 운동 자체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념은 조각난 전체로 정의된다. 개념은 이질적인 구성 요소의 유한한 다양체를 일관적이고 불규칙적인 방식으로 자르고, 이를 강도적 떨림 속에서 응축시킨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개념을 주름의 조각이라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연대기
《철학이란 무엇인가》의 <개념이란 무엇인가>라는 장에서 들뢰즈 자신이 강조한, 개념에 대한 정의는 다음과 같다.
① 개념은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무한한 속도로 절대적 비행 상태에 있는 점이 두루 돌아다니는, 유한한 수의 이질적인 구성요소들의 분리불가능성, 이것이 개념이다.
이 정의가 수수께끼 같다는 사실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개념에 대한 이러한 생각은 들뢰즈의 전체적인 독창성을 가장 잘 드러내 주는 것임에 틀림없으며, 우리는 이것을 들뢰즈의 바로크적 예술이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종류의 정의들에 대한 기나긴 입문 과정 없이 어떻게 다음 내용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② 개념은 이웃관계 외에 다른 규칙을 갖지 않는다.
개념들이 “강도적 특질들”, “절대적 차원들, 항상 조각난 표면들 또는 체적들”, “내포들”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가?
③ 개념은 항상 질서에 속한다. 그것은 어떤 아주 활기찬 무엇이고, 삶의 양태이다. 개념을 광적으로 창조하는 것은 여러 수준에서 이 함성을 표현한다.
이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개념의 계보학이 결정적으로 필요하다. 들뢰즈가 명목상의 개념과 자연의 개념 그리고 자유의 개념을 연구할 때에는, 전통적인 개념과 다른 의미를 ‘개념’에 부여해야 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1935년부터 “개념의 광적인 창조”로서 분석된 경험론은 이미 “개념의 신비주의”, Erewhon-개념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순간부터 개념은 자유롭고 움직이는 어떤 실재와 동외연同外延적인 것이 된다.
④ 개념은 자유롭고 야생적인 상태에 있는 사물 자체이다.
수수께끼가 부분적으로나마 베일을 벗는 것은 《차이와 반복》의 61쪽에서이다. “재현이 자기 안에서 무한을 발견할 때, 그것은 재현은 소란과 동요 그리고 정념을 발견하고, 괴물을 되찾는다. 개념은 ··· 모든 변신을 ··· 따른다.”
다시 말해서 “사유는 마치 사유가 가장 낯설고 위험한 모험 안에서 자신의 모델을 찾아서는 안 되는 것처럼 말하는 전통적인 이미지와 아무 상관이 없다.” 그 결과 전통적인 개념과 들뢰즈적인 의미의 개념이 구분된다. 다음 구절에서 ‘개념’은 여전히 첫 번째 의미를 갖는다. “사실 개념은 가능성 외에 전혀 다른 것을 지칭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사유에 가해지는 할큄과 분원적인 폭력 그리고 낯섦과 적개심이 결핍되어 있다. 사유에 우선적으로 있는 것은 무단 침입, 폭력 그리고 적이다. 지혜에 대한 혐오의 전적인 부분인 것이다.” 사유와 개념들의 이 “난폭한 움직임”을 견딜 수 있는 것은 언제나 새로운 형태에 대한 준비에 되어 있는 “애벌레 주체”일 뿐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모든 종류의 타협과 부수적인 합리화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는, 양식으로서의 사유라는 공준에 완전히 다른 것을 대립시키게 된다. 즉 사유에 있어서의 지혜 없음, 기억에서의 건망증, 언어에서의 실어증 등이다. 이들은 사유하고 기억하고 말하는 유일한 방법인데, 왜냐하면 “사유한다는 것은 창조하는 것이고, 창조하는 것은 사유 안에서 ‘사유함’을 낳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들뢰즈는 그가 “사유의 이미지”라 이름 붙인 것을 끌어낸다. 이 표현은 두 가지 의미로 읽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이 사유의 핵심은 재현의 이미지이자 연극이지, 기계적 욕망의 공장이 아니기 때문이다.
《차이와 반복》에서 제시하고 있는 이 사유의 여덟 공준 가운데 여섯 가지를 살펴보면, 이로부터 들뢰즈가 인정하지 않는 종류의 사유의 대상과 도구로서의 고전적인 의미의 개념에 관한 정의를 만들어낼 수 있다.
- 사유한다는 것은 능력의 본성적인 실행이다.
- 사유한다는 것은 사유의 선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 사유한다는 것은 재인에 의존한다.
- 사유한다는 것은 재현의 문제이다.
- 사유한다는 것은 그 유일한 부정성인 오류를 포함한다.
- 사유한다는 것은 지시 명제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들뢰즈적 의미에서 개념이 익명의 대지의 대상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에, 개념이 괴물이자 함성이자, 움직이는 방향으로 미는 힘이고, 마녀의 빗자루이며, 자유로운 상태의 사물 자체라는 것에 대하여 더 이상 놀라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비평
개념 안에 무한이 존재한다는 것은 이해가 될 수 없음이 분명하다. 게다가 전통 철학자에게 개념이 명제와도 상관이 없고 재현과도 상관이 없는 무엇을 지칭할 수 있다는 점을 이해시킨다는 것은 더욱이 힘든 일이다. 바로 여기에 들뢰즈가 사유한다는 행위와 동화시키고자 했던 몰이의 이미지가 있다. 이것은 불공가능하고 또한 불균한 명제를 제시하자마자 우리로 하여금 사유하도록 강제하는 것이다.
이념으로부터 이 개념의 어려움에 접근해보도록 하자. 이념은 사유의 미분적인 것, 즉 문제들이다. 문제는 매듭, 즉 불균등한 요소 사이의 이웃관계 복합체이며, “불이 붙기” 위해서 오로지 한 번의 번개만을 기다릴 뿐이다. 이념과 마찬가지로 자매적인 개념은, 그러므로, 조각난 전체이며 분리불가능한 구성요소에 전에 없던 일관성을 부여하는 새로운 절단이다. 이 일관성으로 인하여 개념은 내포 혹은 그 요소를 응축하고 이 요소를 두루 돌아다니는 강도적 자표, 무한한 속도로 “절대적으로 비행”하고 있는 비물체적인 것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개념이란 그 구성요소의 불규칙적한 윤곽의 떨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들뢰즈는 이에 대한 예로 데카르트의 코기토(의심하다-사유하다-존재하다) 혹은 타자의 개념(공포에 질린 얼굴-가능한 사계)을 제시한다.
그러나 이념과 개념은 근본적인 점에 의해 구분된다. 이념은 특이성이 카오이드를 형성하기 위하여 어떻게 짝짓기를 할 수 있는지를 예견하도록 내버려 두는 데 비하여, 개념은 이웃관계의 펼쳐짐으로 무한에 이른 이 특이성에 의해 이미 형성된 주름의 조각이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앞서 인용한 두 개의 정의를 한꺼번에 다룰 수 있게 되었다. 개념이란 연속적이고 이질적이면서 본성을 바꾸지 않고는 분할이 불가능한 강조적 다양체를 규제하는 이웃관계이다.(반면 양적인 다양체는 우리가 알고 있듯이, 불연속적이며-이산적인, 그리고 등질적인 것으로서, 본성을 바꾸지 않고 분할이 가능한다). 그러나 개념 역시 내재성의 평면 위에서 절단된 윤곽이다. “개념은 윤곽이고 배치이며, 앞으로 도래할 사건의 결정체이다.”
내재성의 평면이 주름의 회귀이고, 다른 한편, 주름이란 평면에 의해 카오스가 절단되어 얻어진 카오이드라면, 개념이란 결국 그 강도적 좌표에 따른 주름 자체의 정합적인 조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개념이란 ··· 체험된 모든 것을 훑는 사건을 일으키는 것이다.”
덧_
《들뢰즈 개념어 사전 - 들뢰즈 철학을 이해하기 위한 핵심 키워드 87》, 갈무리,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