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을 알아야 개념이 선다
개념이란 무엇인가?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프랑스 사상가 질 들뢰즈는 새로운 개념을 만드는 행위라고 답한다. 결국, 철학하는 행위란 낡은 개념들을 위해 새로운 무대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대상을 오른손에서 왼손으로 바꾸어 쥐는 과정에서 ‘개념’이 생겨난다. 인간은 사물을 지성으로 ‘붙잡는’ 것이고, 인식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인간은 받아들인 지각 중에서 공통적인 특성을 끄집어내어 어떤 독립적인 단위로 모은다. 인간은 사고능력에 따라 갖가지 사물에서 공통부분을 인식하고 끌어내기 때문이다. 인간이 세계를 개념으로 파악하는 것을 보면 인간이 세계를 어떻게 분절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개념은 많은 표상 가운데 공통적인 특징을 끄집어내어 만들어진다. ‘개념’이야말로 인간의 논리적 사고를 가능하게 하는 요소가 있다. 헤겔은 사물, 특히 생명체에는 개념이 씨앗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가령 가시나무의 씨앗에는 가시나무가 될 가능성이 포함되어 있다. 가시나무의 씨앗을 뿌리면 성장하여 훌륭한 수목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잠재적인 본질을 헤겔은 개념이라 생각했다. 개념은 단순히 인간의 사고에 객관성을 부여해줄 뿐 아니라 그 자체가 인간의 지고至高의 능력으로도 볼 수 있다.
니체는 ‘주어 개념이 가장 발달하지 않은’ 일본어 같은 언어문화와 서양문화는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 개념 체계가 다르다고 보았다. 동양의 ‘철학’은 서양의 철학 개념이 번역되어 이뤄진다. 하지만 언어체계가 다르면 개념이나 사고의 보편성은 유지되기 어렵다.
나카야마 겐의 《사고의 용어사전》에서 정의한 ‘개념’이다. 문자로 정리하다 보면 사물의 실체가 분명해진다. 쉽게 말해, 개념이 잡힌다. 정리하면 정리가 되고 개념이 잡힌다. 또 정리된 것을 읽는 것만으로도 개념이 잡힌다.
여러 가지 서양철학의 전통적인 개념군을 끈질기게 분석한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많이 아는 유식한 사람이 되지 위해서가 아니다. 그 개념이 안고 있는 과제를 생각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_나카야마 겐
덧_
철학이란 무엇인가? 프랑스 사상가 질 들뢰즈는 이 물음에 새로운 개념을 만드는 행위라고 답한다. 하지만 들뢰즈는 새로운 개념을 추구하고자 하지 않았다. 철학의 역사 속에 잠들어 있는 개념을 깨워 다시 무대에 세우는 데 힘을 쏟았다. 이미 형성된 개념에 대해 그 의미와 기능에 반하는 내용을 강조해서라도 그것이 새로운 의미와 역할을 연기해주길 바랐다. 결국 철학하는 행위란 낡은 개념들을 위해 새로운 무대를 만들어주는 것이라 생각했다. 저자는 들뢰즈의 답변을 빌어 철학의 역사라는 풍성한 장난감 상자 속에서 번쩍거리는 금속 병정과 곰 인형을 들춰내듯이 여러 개념을 끄집어낸다. 그리고 그 개념들을 오늘이라는 무대에 다시 세우려 한다.
감성으로 받아들인 것을 지성으로 다시 해석한다. 대상을 오른손에서 왼손으로 바꾸어 쥐는 과정에서 ‘개념’이 생겨난다. 이렇게 말하니 그럴싸하다. 하지만 인간은 원래 지성으로 세계를 이해할 수 있지 않은가. 그렇다. 개념이라는 말은 바로 이런 근원적인 물음과 관계가 있다.
라틴계의 ‘개념’은 ‘함께 붙잡다’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말이다. 독일어의 ‘개념’은 ‘파악하다’, ‘붙잡다’라는 동사에서 파생되었다. 둘 다 ‘붙잡다’가 포함되어 있는 셈이다. 인간은 사물을 지성으로 ‘붙잡는’ 것이고, 인식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덧붙여 한자의 개槪는 되로 가루 따위를 담아 잴 때 남은 부분을 긁어내리는 막대를 가리킨다. 이를테면 인식이란 ‘되’에 맞춰서 지각知覺을 조정한다.
인간은 받아들인 지각 중에서 공통적인 특성을 끄집어내어 어떤 독립적인 단위로 모은다. 모든 낱말에는 이런 과정이 숨어 있다. 예컨대 어떤 것은 ‘풀’이라고 부르고 어떤 것은 ‘나무’라고 부른다. 인간은 사고능력에 따라 갖가지 사물에서 공통부분을 인식하고 끌어내기 때문이다. 인간이 세계를 개념으로 파악하는 것을 보면 인간이 세계를 어떻게 분절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파악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간단히 대답할 수는 없지만 칸트의 생각을 들어보자. 개념은 많은 표상 가운데 공통적인 특징을 끄집어내어 만들어진다. 우선 직관이 다양한 표상을 받아들이고 오성이 이것에 하나의 개념을 부여한다. 가령 직관에 따른 여러 가지 식물에 오성이 '나무'라든가 '풀'이라든가 개념을 나눠 부여하는 것을 말한다.
얼핏 보면 칸트는 단순히 인간이 사물을 명명하는 절차를 설명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개념’이야말로 인간의 논리적 사고를 가능하게 하는 요소가 있다고 생각한 데에는 칸트의 깊이가 있다. 칸트는 이러한 특별한 요소를 카테고리라고 칭하였다. 인간은 사물을 파악하여 공통적인 것을 모아 분류할 뿐 아니라 또한 이 분류 방법에 인간 사고의 공통성을 자아내는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모두 ‘오성의 아프리오리(선천)적 개념’의 카테고리를 사용함으로써 인간의 서고는 보편적이며 객관적인 것이 된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인간의 파악 능력이 동시에 인간의 비판적인 사고 능력을 만들어낸다고 말한 바 있다.
헤겔은 칸트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헤겔은 사물, 특히 생명체에는 개념이 씨앗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가령 가시나무의 씨앗에는 가시나무가 될 가능성이 포함되어 있다. 가시나무의 씨앗을 뿌리면 성장하여 훌륭한 수목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잠재적인 본질을 헤겔은 개념이라 생각했다. 인간은 인식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개념을 인식한다. 칸트와 마찬가지로 헤겔은 인간은 사물을 하나의 공통된 사항으로 분류할 뿐 아니라 잠재적으로 존재하는 본질을 인식하는 능력도 있다고 생각했다. 객체는 인식됨으로써 객체의 참모습을 드러낸다. 이때의 개념은 단순히 인간의 사고에 객관성을 부여해줄 뿐 아니라 그 자체가 인간의 지고至高의 능력으로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이 가진 사유의 권능과 인식의 객관성을 보증해주는 이런 행복한 ‘개념’은 늘 그렇듯이 니체의 비판을 받게 된다. 니체는 서양철학에서 보편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개념이 진실로 보편적인 것인지 의심한다. 저마다의 문화체계 속에서 ‘보편성’을 형성하는 것일 뿐, 사실은 고유한 역사성을 띠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는다. 니체는 ‘주어 개념이 가장 발달하지 않은’ 일본어 같은 언어문화와 서양문화는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 개념 체계가 다르다고 보았다.
동양의 ‘철학’은 서양의 철학 개념이 번역되어 이뤄진다. 하지만 언어체계가 다르면 개념이나 사고의 보편성은 유지되기 힘들다. 굳이 니체의 지적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서양의 형이상학이 가진 역사성과 지방색을 인식해야 한다. 서양철학의 지방색을 따지다 역으로 우리의 사고가 어떤 보편성을 향해 열려 있는지 알 수 있다.
서양 형이상학의 지방색을 날카롭게 지적한 이가 20세기 말의 데리다이다. 데리다는 서양의 형이상학에는 일종의 ‘로고스 중심주의’가 존재한다고 보았다. 이는 표음문자의 기호체계를 우선시하고 유럽 민족이 최고의 인간성을 실현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로고스 중심 사상이란 표음적인 에크리튀르(문자언어, 가령 알파벳)의 형이상학이다. 이것은 근본적으로는 역사적인 상대주의로 해명될 수 없는 수수께끼처럼 모호하지만 본질적인 이유 때문에 더할 나위 없이 독자적이고 강력한 미족 중심주의이다. 오늘날에는 이것이 지구 전체에 압박을 가하고 있는 실정이다. _데리다, 《그라마톨로지에 관하여》
마찬가지로 후설도 《유럽 학문의 위기와 초험적 현상학》에서 고대 그리스 이래 사고의 기본적인 틀이 형성되었다고 확실히 밝히고 있다. 유럽 철학은 이것은 계속 이어왔다. 거기에 서양철학의 우위가 있다. 우리는 고대 그리스에서 생각해낸 ‘철학적 요소’를 활용한다. 서양철학의 전통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철학을 생각하는 것은 이러한 개념 군에 나타난 생각들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우리 역시 그리스 철학이 개척한 지평에서 사고한다. 우리는 서양철학을 기본 문법으로 하여 생각해야 하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서양철학이 가지는 ‘풍토성’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서양철학의 개념으로 사물을 생각하기 시작하면 니체가 말하는 의미처럼 ‘체계’와 ‘문법’의 틀에 고정되어 그 틀 안에서만 사고하게 된다. 하지만 철학 자체의 보편성으로 치면 서양철학에서 전통적으로 중시되어온 ‘개념군’만이 옳은 것은 아닐 것이다. 철학이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으면서 새로운 개념, 지금까지와 다른 이질적인 개념을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바타유는 이러한 이질적인 개념군을 철학에 끌어들여 노골적을 묘사했다. 바타유는 헤테롤로지 즉 ‘이타적 논리’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그리고 전통적인 철학 개념에 어울리지 않는 개념, 예컨대 웃음, 에로스, 모욕 등을 분석했다.
한편 레비나스는 서양의 형이상학에서 근본을 이루는 그리스 철학의 개념군에 대해 유대 사상을 근거로 '타자'의 사상을 대비시킨다. 레비나스는 인식과 개념이라는 말에 모두 ‘붙잡다’라는 의미가 있다는 데 주목하였다. 서양의 전통적인 형이상학에서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이어주는 ‘인식’이라는 개념이 기본을 이룬다. 하지만 이 개념이 인간 사이의 관계를 표현하는 경우에는 적합한 것인지 의심한다. 타자와의 관계에서는 인식과 다른 개념이 필요하지 않은가 하고, 즉 ‘타자를 붙잡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이 책에서 여러 가지 서양철학의 전통적인 개념군을 끈질기게 분석한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많이 아는 유식한 사람이 되지 위해서가 아니다. 그 개념들이 안고 있는 과제를 생각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타적 타자’라든가 서양철학의 지방색을 분명히 인식함을 써 사고 자체의 보편적 지평을 확대하기 위해서이다.
덧_
나카야마 겐,《사고의 용어사전》, 북바이북,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