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에도 습관의 때가 있다
‘내 인생을 바꾼 한 권의 책’이라는 것은 없다.
한 권의 책이 인생을 바꿀 만큼 인간이란 단순하지 않다. 단지 그렇게 믿고 싶을 뿐이다.
“이 지구에 살고 있는 사람 중의 절대다수가 책을 읽지 않는다.” 강유원은 말한다. 자신의 책 《책과 세계》에서 책 읽기를 강요하는 세상은 소수의 음모라 한다. “사자가 위장에 탈이 나면 풀을 먹듯이 병든 인간만이 책을 읽는다. 오늘날의 사람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인류 역사에서 책을 읽는 이는 전체 숫자와 비교해서 몇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우리는 책을 읽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린다. 대다수 사람이 행하고 있다 하여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며, 압도적 다수가 책을 읽지 않는다는 사실을 놓고 보면 ‘책을 읽어야 한다’는 것은 소수 책 읽는 이들이 벌이는 일종의 음모임이 틀림없다.”
‘책을 읽어야 한다’는 게 음모일지라도 지구에 사는 많은 사람이 책을 읽지 않아도 상관없다. 꾸준히 책을 읽는 사람은 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이 나였으면 좋겠고 또한 이 글을 읽는 독자이길 바란다.
그렇다면 매일 쏟아지는 책, 그 많은 책 중에서 어떤 책을 읽어야 할까? 책을 읽기 전까지 그 선택을 잘했는지 알 수 없다. (출간된 책 전부를 읽을 수 없으니) 가장 바람직한 것은 관심분야의 책을 모두 읽는 것이다. 이마저도 현실적으로 힘들다. 신문이나 인터넷 서점이나 블로거 서평을 참고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하지만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은 싫거나 나쁘다고 느낀 책은 많은 이가 서평을 쓰지 않는다. 서평의 90퍼센트 이상이 좋은 내용일 경우가 많다. 좋은 평가 속에서 옥석을 가리는 눈을 키우는 것 또한 독자가 가져야 할 중요한 덕목이다.
꼭 많이 읽어야 할 필요는 없다. “문제는 그게 (책을 읽지 않았다는 게) 아니고, 읽은 책을 얼마만큼 이해하고 있는가?”이다.
민주사회란 여러 가지 의견이 존재하는 사회이다. 그래서 시민이란 타인의 의견과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신과 다른 의견을 존중하고 그것과 함께 사는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요즘 이렇게 말하고 다닌다. 그래서 나는 요즘 이렇게 말하고 다닌다. 시민을 책을 읽는 사람이라고!
시민이 책을 읽지 않으면 우중愚衆이 된다. 책과 멀리하면 할수록 그 사람은 사회 관습의 맹목적인 신봉자가 되기에 십상이고 수구적 이념의 하수인이 되기 일쑤다.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내밀한 정신의 쾌락을 놓치는 사람일 뿐 아니라, 나쁜 시민이다.
독서는 논술이나 수능을 잘 치르는 데 필요한 것도, 또 교양이나 정보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독서는 민주사회를 억견臆見과 독선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시민이 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의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장정일은 “좋은 책을 읽는 방법은 먼저 나쁜 책을 읽지 않는 것”이라 했다. 나쁜 책도 읽어봐야 나쁜 책인 줄 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많이 읽어야 한다. 정작 염려하는 것은 좋은 책을 선택하는 게 아니다. 책의 내용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이다. 책에 나온 내용이 모두 진실은 아니다. 저자의 가설로 시작해 가설로 맺는 책이 많다. 어설픈 책 읽기는 모두 진실로 받아들여 잘못된 사고가 굳어지는 경향이 있다. 이런 책 읽기는 읽지 아니한 만 못하다.
많은 책이 나무의 희생으로 세상에 나온다. 그중 한몫하는 게 ‘책 권하는 책’이다. 그중에서 먼저 《장정일의 독서일기》를 소개한다. 나무의 희생이 헛되지 않을 책이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1993년부터 2007년까지의 독서 일정을 7권으로 엮은 것이다. 14년 동안 장정일은 독서일기를 통해 좀 더 성숙해졌다. 물론 ‘필화’와 같은 세파가 그를 더욱 성숙하게 하였을지도 모른다. 그 이후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이름으로 ‘독서일기’를 이어갔다.
나는 나의 읽기와 쓰기가 어떤 검열도 의식하지 않고 어떤 권위에도 연계되지 않는 혼자만의 쾌락이 되길 원했고, 그랬기 때문에 나는 이 책이 독자나 저자 누구에게도 아무런 암묵적 힘을 행사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또 그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기껏해야 중얼거림에 지나지 않는 쾌락이라니? 그런데도 나는 이것을 멈출 수 없다.
《독서일기》를 통해 책을 선택하는 방법을 훈련하는 데 이 책을 읽는 목적이 있다. 장정일의 말을 빌리면 ‘책을 세상에 존재하게 만드는’ 위대한 일을 하는 방법을 익히는 데 있다. 단지 책을 선택하는 방법을 알고자 한다면 꼭 이 책이 아니어도 된다. 수많은 ‘책 권하는 책’이 있기 때문이다. 장정일이 지나간 수많은 책의 여정을 밟아가며 책을 활자로 그 자체로만 받아들이지 않고 이면을 볼 수 있는 혜안을 키우기 위함이다.
항간에 유행했던 (지금도 있지만 없어졌다고 믿고 싶은 하지만 악령은 쉽게 없어지지 않는) ‘주례사 비평’은 장정일에게는 없다. 장정일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좋은 것은 좋고, 안 좋은 것은 안 좋다고 말한다. 싫은 게 아니다. 물론 장정일의 의견을 전부 받아들일 필요 없다. 단지 이러한 이견이 있음을 생각하고 자신만의 견해를 갖는 게 이 책을 읽는 가장 중요한 이유이다. “책을 다 믿느니 차라리 책이 없는 것이 낫다.”
장정일의 솔직한 평을 몇 가지 소개한다. 어떤 책에 관한 내용인지는 각자 책에서 알아보기를 바란다.
‘팔리는 책’에 중독된 독자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 시체가 된다. 이따위 소설의 독자가 다음에는 만화책을 사들기에 십상이다.
평론, 특히 소설책 뒤에 붙는 해설이 그 책을 좀 더 잘 이해하고자 하는 평범한 독자를 향해서가 아니라, 작가나 평론을 하는 동업자 사이에서 읽히기 위해 쓰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론서가 아닌 소설의 경우 그 독자가 중학생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평가는 알아야 한다. 그러면 중학생이 읽어서 알 수 있도록 쓰는 것도 중요하지 않을까.
장편으로는 좀 부실하다는 생각. 사전을 꼼꼼히 찾아서 쓰는 그의 까다로운 단어 선택이 수사처럼 느껴지는 대목이 많다.
이토록 재미없는 소설을 내 생애에 또 읽게 될까 봐 겁난다. 억지로라도 재미를 붙여보려고 소설을 읽는 중에 역자 해제를 두 번이나 읽어보았으나, 작가에 대한 악감정만 생겼다.
전체적으로 난삽하고, 상투적이다. 꼭두각시 같은 주인공을 내세워 한 시대의 연표나 나열해도 소설이 되는 건가?
특히 21장과 25장은 차라리 없는 게 낫다. 어제와 오늘 나는 진짜 허접쓰레기들을 읽었다.
우리가 소설을 읽다 보면, 면수가 넘어갈수록 ‘뭐 이따위 작가가 다 있어?’ 하면서 책에 실린 저자의 사진을 몇 번이고 들춰보게 하는 작가가 있는데, 그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가나다라를 깨우치고도 OOO를 읽어보지 않은 사람은 한국인으로 태어나서 누릴 수 있는 즐거움 가운데 하나를 맛보지 못한 사람이다.
《독서일기》를 ‘책 권하는 책’ 중에서 가장 먼저 소개하는 더 큰 이유가 있다. 다양한 분야를 접할 수 있다. 소설가이자 시인이니 본업에 충실한 많은 소설을 읽었다. 제목만 들어본 것도 있지만 존재조차도 모르는 많은 소설을 읽을 수 있다. 소설만이 아니라 많은 인문학 서적을 접할 수 있다. 게다가 매 권마다 재즈에 관심을 가져 재즈 관련 책도 있다. 이렇게 다양한 분야의 책을 접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책 권하는 책’이다.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1권이 1994년에 출간되어 절판된 책이 많다. 하지만 그의 평을 보고 책을 찾아 읽고자 한다면 그 수고는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가끔 헌책방을 들러 그 책을 찾는 기쁨을 갖는 것도 이 책이 주는 다른 즐거움의 하나이다.
7권과 3권을 포함하여 10권이나 되는 책을 순서대로 읽을 필요는 없다. 모두 절판이지만 관심을 가지면 모두 구할 수 있다. 구하는대로 읽는 것도 좋겠지만 연령대에 따라 읽는 순서를 정하는 것도 이 책을 읽는 요령 중의 하나이다. 대학을 2000년 이전에 다녔다면 1권부터 읽고 아니라면 마지막 권부터 읽는 게 좋다.
내가 읽지 않은 책은 이 세상에 없는 책이다. 예를 들어 내가 아직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는 내가 읽어보지 못했으므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톨스토이도 다른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내가 그 책을 읽어야 한다. 내가 한 권의 낯선 책을 읽는 행위는 곧 한 권의 새로운 책을 쓰는 일이다.
이 책을 통해 이 세상에 없던 책을 한 권이라도 세상에 나오게 해 죽어있는 많은 책에게 새 생명을 불어넣어 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