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각은 모든 감각과 통한다. 섬세하게 다듬으면 세상이 보이고 들린다.
“어둠이 있어야 빛의 황홀도 있다. 미식美食이란, 음식에서 어둠의 맛까지 느끼는 일이다.”
책에는 한자가 없지만 내용상 좋은 음식 또는 그런 음식을 먹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황교익은 말한다. “미각은 모든 감각과 통한다. 섬세하게 다듬으면 세상이 보이고 들린다.” 내가 ‘미각味覺은 미학美學이다.’라고 말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미각味覺은 미학味學이다. 미학味學은 미학美學이다.
“미각은 모든 감각과 통한다. 섬세하게 다듬으면 세상이 보이고 들린다.”
눈으로만 보지 말고, 혀로만 느끼지 말고, 모든 감각으로 느끼고 음미해야 한다.
“인간의 감각과 사고의 확장은 문자를 기반으로 한다. 문자가 없으면 인간은 외부 세계와 소통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문자로 정리하다 보면 사물의 실체가 분명해진다. 쉽게 말해, 개념이 잡을 수 있다.”
황교익이 생각하는 음식의 단상이다. 감각과 사고의 확장을 위해서. 자신의 생각을 적은 책이니 당연히 자신의 생각을 적어야 마땅하다. 자신과 생각과 다르다고 글쓴이의 생각이 틀린 게 아니다. 단지 다른 의견을 말하는 것이다. 그 다른 의견이 틀린 게 아니라 맞다. 옳고 그름을 따지기보다 생각의 다름을 인정하고 그 생각의 다름을 ‘왜’라는 시각에서 보자.
물: 물에 든 여러 물질로 인해 잡내가 있으면, 아무리 좋은 음식 재료가 있다 해도 맛을 버린다. 눈으로 봐서 맑아야 하며 냄새가 없어야 한다. 혀에서 가벼워야 하며 목구멍으로 넘길 때 부드러워야 한다. 좋은 물은 마지막으로 ‘정신적’ 조건은 아름다워야 한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물은 음식 맛, 그 음식을 먹는 사람의 마음을 맑게 한다.
소금: 우리 미각이 오래전부터 소금에 익숙해져 있다. 태초부터 소금이 있었고, 소금의 고향인 바다에서 생명이 탄생했다. 음식 재료에 숨어 있는 맛을 끌어내는 것이 그 핵심이다. 잡다한 맛이 없으면서 짠맛이 부드러운 소금을 가장 좋은 소금이다. (소금은 달지 않다. 그래도 단맛이 나는 소금은 무엇인가.)
식초: 우리가 바라는 맛은 신맛뿐이 아니다. 술을 마시는 것이 취하는 데에만 그 목적이 있지 않은 것과 같다. 신맛 안에 그 원료의 향을 품고 있으며, 그 향은 원료였을 때보다 미약하나 때로는 더 감미로운 맛을 보탠다. 음식에 뿌려지고 섞이면 그 향은 식재료에 이리 치이고 저리 받으면서 온갖 맛을 증폭시킨다. 공장에서 나온 주정으로 만든 양조식초에 만족한다. 저만의 천연식초 하나 없이 ‘2배 식초’를 쓰면서 부끄러운 줄 모르고, 막걸리 식초가 있는 줄도 모른다.
고추: 맵다고 느끼는 감각은 맛이 아니다. 맵다는 감각은 아픔의 감각인 통각이다. 캡사이신이라는 매운 성분이 있는데, 이것이 입 안에 들어가 통각을 자극하면 통증을 잊기 위해 엔도르핀이라는 ‘생리적 마약’을 분비한다. 기분이 좋아진다. 한국 음식에서 매운 음식이란 그 음식 자체가 매운 성분으로 처발라진다는 특징이 있다. 우리 민족의 막무가내 고추 사랑을 일종의 집단적 정신질환으로 읽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설탕: 당의정의 코팅과도 같다. 식재료의 온갖 맛을 설탕으로 감싸 버리면 중독자에게는 환상의 맛이다. 미성숙한 미각의 소유자일수록 이 단맛에 쉽게 자극받고 중독된다. 중독자를 위해서는 좋은 식재료와 좋은 맛을 낼 수 있는 기술이 필요 없다. 중독인 줄 모르는 중독자에게 굳이 비싼 해독제를 투여할 이유가 없으며, 또 자칫하면 돈 들이고도 ‘맛없다’라는 욕만 들을 수도 있으니, 단맛의 음식을 두고 맛있다 찬사를 보내는 것은 미식가로서 자질이 없다는 증거이다.
참기름: 한 방울이면 고소한 향을 풍겨 식욕을 돋우고 맛있다고 느낀다. 그 강력한 고소함은 음식 맛을 죽이기도 한다. 단 한 방울로 모든 맛을 평정하는 한국음식의 폭군. 맛있는 것과 맛없는 것을 똑같은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독재자이다. 참기름이 한국 음식 맛의 다양성을 죽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화학조미료: 싸구려 식재료를 숨기는 악덕 마법사이다. 가장 큰 해악은 식재료의 질을 숨길 수 있다는 것이다. 화학조미료 한 방이면 맛을 다 비슷하게 만드는 마법을 부린다. 한국 음식에서 화학조미료를 버리자면 짜고 맵고 강한 양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심심하고 순하게 먹으면 화학조미료가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 (속이는 사람이 문제이지 화학조미료의 문제가 아니다. 약을 과용한다고 약을 없앨 수야 없지 않은가.)
혀: 음식 맛의 대부분은 향으로 느끼는데 이를 담당하는 것은 코이다. 혀에서 느끼는 맛은 음식물 맛의 극히 일부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음식 맛은 오롯이 혀로 느끼는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 편한 대로 ‘의도적 왜곡’하고 있다. 이유는 단순하다. 입으로 음식을 넘기면서 음식 맛은 코로 느낀다고 설명하기는 부적절해 보이는 것이다. 그러니까 코로 음식을 쑤셔 넣지 않으니까 생기는 의도적 왜곡이다.
가을: 가을은 냄새로 온다. 가을 냄새에는 달콤함이나 감미로움이 없다. 건조하고 서늘하여 여름내 들떠 있던 우리의 오감을 오그라뜨린다. 가을로 해서 빼앗긴 감각을 음식으로 채우려는 것이다. ( “내일이 새로울 수 없으리라는 확실한 예감에 사로잡히는 중년의 가을은 난감하다.” 그래도 입 맛은 오른다.)
밥: 기름이 자르르 흐르고 촉촉한 물기가 배어있으며, 구수하고 달콤한 향이 나며, 밥알이 낱낱이 살아 있음이 느껴지고, 침이 고이면서 단맛이 더해지며, 살짝 씹을 때도 무르지도 단단하지도 않게 이 사이에서 기분 좋은 마찰을 일으켜야 한다. 밥은 한국 음식의 중심에 있다. 지역, 품종, 재배 방법과는 관련 없이 갓 도정한 쌀이 밥맛에서 가장 중요하다. 벼는 생명체이고, 이를 도정한 쌀은 주검이다.
추어탕: 마꾸리 또는 미꾸라지로 끓이는 탕이다. 미꾸리가 미꾸라지에 비해 구수한 맛이 더 있어 토종 대접을 받는다. 요즘은 미꾸라지가 대부분이다. 미꾸라지가 미꾸리에 비해 더 빨리 자라기 때문이다. 옛 맛이 아닌 것은 재료의 변화 탓만은 아니다. 미꾸리든 미꾸라지든 주재료는 조금만 넣고 여기에 구수한 맛을 더하기 위해 콩가루며 들깨가루를 잔뜩 넣기 때문이다. 콩탕이라 부르는 것이 더 나은 추어탕도 흔히 보지만 이를 구별하는 손님은 적다. 그래서 여기저기 대규모 추어탕 식당이 차려지는 것이다.
삼겹살 구이: 1970년대 중반에 외식업계에 등장했다. 돼지고기를 요리하는 방법 중 가장 원시적이다. 달구어진 불판에 올려 굽기만 하면 음식이 되기 때문이다. 돼지고기 그 자체의 맛을 즐기는 음식이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삼겹살 구이는 훨씬 다양한 방식의 양념 법과 굽는 방법이 개발되었을 것이다. ‘된장 쌈’의 한 재료에 불과할 수도 있다.
돼지갈비: 돼지의 갈비로만 조리되지 않는다. 넙데데하게 펼 수 있는 돼지고기의 거의 모든 부위가 돼지갈비로 구워진다. 음식 이름을 바로잡자면 돼지 양념구이가 맞다. 질 떨어지는 돼지고기일수록 양념이 강해지고 숙성 기간이 길어진다. 과다하게 양념해서 돼지고기 맛을 느낄 수 없다. 결국 돼지 강정 수준의 돼지갈비를 먹는다.
한우고기구이: 마블링 고기에 대한 강한 기호도는 일본인들의 식습관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음식을 이로 씹는 행위를 강하게 하지 않는다. 그들이 음식 먹는 것을 보면 씹는다기보다 오물거린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이다. 그에 반해 우리 민족은 치아 사이에 음식물을 두고 강하게 오래 씹는 버릇이 있다. "입에 살살 녹는" 고기가 맛있다는 생각은 일본인의 쇠고기 기호를 무턱대고 좇아 만들어진 것일 수도 있다(마블링이란 단어가 일반화된 것은 1990년대 이후의 일이다). 마블링 쇠고기에 대한 잘못된 신화가 한우고기의 진정한 매력을 죽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된다.
설렁탕: 쇠고기와 소뼈로 끓이는 국이다. 담겨 나오는 국수는 없애야 한다. 국수의 밀가루 냄새로 국물 맛이 다치기 때문이다. 설렁탕에 국수가 들어가게 된 것은 한국전쟁 이후 미국 구호물자로 밀가루가 흔해지면서부터이다. 못 먹고 살 때 양을 늘이기 위한 것이었지 맛을 더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밥 대신 국수만 말아먹어도 맛있는데 앞으로 어쩌나. 좀 맛이 덜 하다라도 고깃국물에 말아먹는 국수는 맛있다.)
비빔밥: 식당에서 팔리면서 고추장이 더해진 것으로 보인다. 나물 각각의 맛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니 고추장으로 맛을 얼버무리기 위한 술책으로 밖에 안 보인다. 비빔밥의 나물을 제대로 조리해 내자면 보통 공력이 드는 것이 아니다. 그 공력을 고추장이 대신하고 있다. (경북에서는 제사 후 나물을 넣어 간장에 비벼 먹는다. 나물 맛이 살아있음을 매번 느낀다.)
잔치국수: 멸치장국에 말아먹는 국수이다. 예전에 잔칫날 먹던 국수라 이렇게 부른다. 장국수라 부르기도 한다. 국수는 제조 후 묵힌 것이 좋다. 그래야 생밀가루 냄새가 나지 않는다. 헹구는 물은 얼음처럼 차가워야 한다. 싼 가격이라고 함부로 맛을 내는 경향이 있다. 제대로 된 국물과 국수를 만들어 내자면 돈이 많이 드는 음식이다.
칼국수: 닭국물, 사골국물, 해물국물을 쓴다. 국물 종류가 다르면 면의 굵기도 달라야 한다.
냉면: 평양냉면과 함흥냉면을 아울러 말한다. 이런 분류는 잘못되었다. 면의 재료와 양념법, 무엇보다도 맛의 중심이 전혀 다른 음식이기 때문이다. 평양냉면은 메밀 면과 육수의 조화를 중시하는 음식이고, 함흥냉면은 감자면과 고춧가루 양념의 조화를 중심으로 하는 음식이다.
메밀국수 - 평양냉면, 막국수, 소바, 진주냉면
감자국수 - 함흥냉면
밀국수 - 부산 밀면
매사에 분별력이 없으면 사물을 제대로 볼 수 없다. 마찬가지로 분류를 엉터리로 하면 그 음식 맛의 중심을 찾을 수 없다.
떡볶이: 주요 소스는 고추장이다. 이 고추장에 설탕이 듬뿍 들어가 있다. 들덕지근하게 매운맛을 내는 소스이다. 이 당도를 맞추다 보니 소금 간도 센 편이다. 가래떡 맛은 중요하지 않다. 쫄깃한 식감만 제공하면 그 기능은 끝난다. 그래서 떡볶이는 떡을 이용한 음식이라기보다 고추장과 설탕을 이용한 음식이라고 보는 것이 더 맞다.
배추김치: 식당에서 보면 제일 많이 남기는 반찬이 김치이다. 흔해서? 아니다. 맛없어서 안 먹는 것이다.
고수: 가장 큰 오해는 외래에서 온 것이라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오래전부터 우리 땅에서 재배하였던 푸성귀이다. 독특한 향을 내는 푸성귀이다. 고기 요리에 더없이 잘 어울린다. 이를 거부하는 것은 한국 음식에서 귀중한 맛을 하나를 잃는 것이다.
사과: 단맛에 적절한 신맛이 어우러져야 한다. 당도가 너무 높은 사과에서는 향을 느낄 수 없다. 향이 없는 것이 아니라 단맛이 너무 강해서 다른 맛을 느낄 여유가 없다. 보기 좋은 것, 단맛 강한 것 좇다가 진정한 사과 맛을 잊고 사는 것이다.
막걸리: 탄산가스는 충분히 발효되었을 때 많이 생긴다. 공장 막걸리는 충분히 발효시키지 않고 출고한다. 탄산가스로 인해 병이 터질까 봐 그러는 것이다. 공장 막걸리는 상온에 할 정도 둬서 병이 부풀어 올랐을 때 냉장했다가 마시면 탄산가스 맛을 얻을 수 있다.
희석식 소주: 좋은 술은 깨끗하게 넘어가고 뒷맛이 깔끔해야 한다. 도수 낮은 희석식 소주가 그렇기는 한데, 이는 첨가제를 넣어 얻어 낸 맛일 뿐이다. 좋은 술은 술기운이 단전에서부터 스멀스멀 올라와 좀처럼 머리까지 치지는 않아야 한다. 희석식 소주는 머리부터 친다. 첨가물로 인해 이게 더 심할 수도 있다.
생선회: 일본식이 낫다 우리 식이 낫다가 아니라 회를 치는 방법에 따라먹는 방법을 달리해야 한다.
무엇이나 다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음식은 “기본이 없으면 사이비일 뿐이다.” 음식을 해서 먹인다는 것은 곧 생명을 유지시켜 주는 일이다. 이것은 가장 근원적이고 원초적인 사랑의 행위이다. 세상은 넓고 먹을 것은 많다. 굳이 식도락가가 아니더라도 새로운 맛에 대한 호기심은 삶의 활력이 된다. 인간은 지구 상에서 가장 다양한 음식을 먹는 잡식성 동물이다.
우리의 미각이 온전히 우리의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있다. 음식은 문화이다. 문화를 바꾸고 인식을 바꾸는 갖아 편한 방법 중에 하나가 입맛을 바꾸는 것이다. 그들이 정해주는 대로 먹고 그들의 기준에 맞추려 노력하는 우리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다시 한번 느끼지만 기본이 없으면 사이비이다. 포장되고 조작된 미각에서 벗어나 우리의 미각을 찾는 것이 곧 우리의 미학을 갖는 것임을 새삼 깨닫게 한다. 모든 편견은 무지에서 온다.
영향력 확장의 본능이 집단화하고 정치화한 것이 제국주의이다. 제국주의자들은 그 영향력 확장을 무력으로 이루었으나 이제는 경제와 문화 등 속의 것으로 그 도구를 바꾸었다. 미각도 그 도구의 하나이다. 제국주의자들은 미각 기준을 그들의 것과 같아지게끔 조작하고 있다. 제국주의자들의 미각 조작은 그럴싸한 포장을 하고 있어 피식민자들은 그것을 하나의 멋 정도로 여길뿐이다. 마침내 피식민자들은 제국주의자들이 제안하는 음식이어야 맛있고 건강하며 합리적이라 생각한다. 제국주의자들에 대항하는 어설픈 피식민자들은 자신의 음식을 제국주의자들의 미각 기준에 합치시키려 할 뿐이다.
먹고 쓰는 동안 제국주의자의 미각 기준은 끊임없이 나를 괴롭혔다. 그들의 논리는 달콤하고 대중적(보편적이 아닌)이기 때문이다.
덧_
《미각의 제국》, 황교익, 따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