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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루장 Feb 09. 2022

장준하, 어떻게 보아야 할까?

내가, 아니 우리가 조국 대신 형벌을 받아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가 이것을 감수하는 보람을 어디서 찾아야 할 것인가. ··· 우리의 조상이 못나기 때문에 우리가 이 설원의 심야를 떨고 지새워야 하는가. 아니 조금도 조상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돌린다는 것은 나의 비겁이다. ··· 나의 조상은 또 조상을 가졌고, 그 조상은 못난 조상을 가졌다. 앞으로도 우리는 못난 조상이 되어야 하겠는가? ··· 또다시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장준하의 삶에 두 가지 큰 마디를 만든다. 일본 패망 이후 김구의 비서로 서울에 환국했으면서도 해방 정국에서 김구와 결별한 게 첫 번째이고, 박정희가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그것을 ‘질서의 확립’으로 환영했다는 것이 두 번째이다.


대중에게는 장준하는 박정희에 의한 의문의 죽음으로만 알려졌다. 장준하를 보면 사람은 늘 변하는 존재임을 깨닫게 한다. 늘 변해야 산다. 어떻게 변하느냐가 중요하다. 빠르게 가기보다 방향성이 중요하다. 한 가지 의문점. 장준하는 과대평가되었는가, 과소평가되었는가?


장준하는 학병으로 자원입대했다. 논란이 있지만 장준하도 인정한 사실이다. 소심한(?) 저항이다. ‘우리 집안의 불행을 내 한 몸으로 대신하고자 이른바 그 지원에 나를 맡겨 버렸다’라고 회고했다. 학도병 지원할 때부터 탈출을 생각하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일본군을 탈출해 중경의 임시정부에 도착한다. 김구를 만났다. 그 후 이범석의 광복군에 합류했다. 애초 그의 영입을 시도한 것은 약산 김원봉이었다. 장준하는 공산주의자에 대한 거부감을 나타내며 이범석 휘하로 갔다. 장준하는 늘 반공주의자였다. 기독교 신앙때문 아닌가 한다. 미군 전략 첩보대(OSS) 대원으로 준비한 국내 잠입 작전은 일본의 때 이른 항복으로 취소되었다. 45년 8월 18일 연합군 군사사절단 일원으로 여의도에 이범석, 김준엽과 도착하였으나 미국과 일본의 반대로 하룻만에 중국으로 돌아갔다. 45년 11월 23일 임시정부 요인과 함께 마군 수송기를 통해 입국하여 김구의 수행비서 역할을 했다. 김구가 주석으로 있는 한국독립당을 떠나 조선민족청년단(족청)에서도 활동했으나 이범석이 좌익을 받아들인 것에 실망해 곧 떠났다. 그러니까 이 시기 장준하 선생은 백범 김구와는 다른 대결주의적 반공주의자였던 셈이다.


장준하는 기독교 신앙과 극우익 사상을 가지는 반공 국가주의를 표방했다. 그의 친구인 김준엽이 말하는 장준하가 이범석의 족청을 떠난 이유에서도 알 수 있다. “청년단 내의 좌익분자들에 대한 처리 문제로 철기(이범석)와 의견이 맞지 않아 그만두었다고 하는데, 장형의 말에 의하면 좌익 불순분자들에게 철기가 포위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이런 생각은 처음부터, 오랫동안, 어쩌면 죽을 때까지 가지고 있었다. 

 

장준하는 6·25 전쟁 전 이승만 정부에서 공무원으로 임용되었다. 1952년 3월 문교부 산하 국민사상 연구원 기획과장이 되었고, 이후 국민사상 연구원 서무과장, 사무국장 등을 역임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불가피성을 인식한 그는 사상적, 이념적인 정당성을 획득하는 길만이 북한을 이기는 길이라 확신하고 국민 계몽을 위한 칼럼, 강연 활동 등을 하였다. 그는 "6·25가 일어났다. 당연히 받을 채찍이 땅에 임한 것이다. 그러나 하늘은 무심치 않아 그래도 이 백성을 공산역도共産逆盜들의 손아귀에 아주 넣지는 않은 것이다."라고 말했다. 공산주의 보다 친일에 좀 더 너그러운 모습을 보여왔다. 장준하는 친일 문인 김동인을 기리는 '동인문학상'을 제정했다. 최남선에 대해서도 그를 옹호하는 글을 싣었다.


사상계 편집위원회는 뜻을 문화의 소장(消長)과 민족의 명운에 두는 모든 인사와 더불어 충심으로 고 육당 최남선 선생을 애도하고 그 출중한 인격과 생전에 남기신 업적의 위대성을 명감(銘感)하여 이를 영세에 전하고자 선생이 서거하신 이 해 1957년 송년호를 육당 기념호로 삼아 재천(在天)의 영전에 드리나이다. 

_〈최남선 헌정사〉 


한 때 선생의 지조에 대한 세간의 오해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선생의 본의가 어디까지나 이 민족의 운명과 이 나라 문화의 소장에 있었음은 오늘날 이미 사실로서 밝혀진 바요, 항간에 떠도는 요동부녀(妖童浮女)들의 억설과는 전면 그 궤를 달리하는 것이다. 사람을 사(赦)하는 법이 없고 인재를 자기 눈동자 같이 아낄 줄 모르고 사물을 널리 생각하지 못하는 옳지 못한 풍조 때문에 우리는 해방된 후에도 선생에게 영광을 돌린 일이 없고 그 노고를 치하한 일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욕된 일이 적지 아니하였다. 이것은 실로 온 민족의 이름으로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_《사상계》, 1957년 12월 권두언


4·19 혁명 이후 장면 정부에서 국토건설단 단장을 지냈다.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나자 자신이 발행인으로 있던 《사상계》 1961년 6월호 권두언에 〈5·16 혁명과 민족의 진로〉의 이름으로 권두언을 내보냈다. 권두언은 무기명이다. 장준하가 쓴 것이 아닐지라도 그 책임은 없어지지 않는다. 군사쿠데타를 긍정적인 모습을 담은 화보를 실었다. 본색을 파악하지 못한 오판이었다. 사실 오판이 아니다. 5·16 쿠데타가 박정희 장기 집권과 탄압에 국한해서 쿠데타가 아니라 군부가 정상적인 민주정부를 탱크와 총을 앞세워 무너뜨린 행위가 쿠데타이다. 무능하고 부패가 만연했다는 그들의 주장을 백번 양보해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건 민중이 선거로 심판하면 될 일이다. 남 · 북이 전쟁을 잠시 중지하고 있는 휴전 상태에 군인의 본인의 국방 의무를 팽개치고 총구를 거꾸로 돌렸기 때문이다.


장준하가 5·16 쿠데타를 "구악(舊惡)의 뿌리를 뽑고 새로운 민족적(民族的) 활로(活路)를 개척할 계기는 마련"한 '혁명'이며 "한국(韓國)의 군사혁명(軍事革命)은 압정과 부패와 빈곤에 시달리는 많은 후진국 국민(後進國國民)들의 길잡이요, 모범으로 될 것이다"라고 극찬했다. 그의 과거 행적과 그가 가지고 있는 사상과 무관하지 않다.


일본군에서 탈출하여 온 장준하, 김준엽을 포함한 50여 명은 임시정부가 있는 중정에 도착했다. 그들은 임정 내 세력다툼을 감지하고 있었다. 장준하가 충칭시 교포 모임에서 임정의 분열상과 졸렬함을 지적하며 “다시 일본군으로 돌아가 항공대에 지원, 충칭 임정 청사를 폭격하고 싶다”는, 말 그대로 ‘폭탄’ 발언을 해 물의를 일으킨 것이다. 이에 그치지 않고, 또 하나의 임정 내 정당을 만들기 위한 경비 조달용 댄스파티에 각목과 화약을 들고 들어가 파티를 무산시키는가 하면, 장준하 일행 일부를 자신들의 파벌로 포섭하려는 신익희 내무부장에게 폭력을 행사하고자 ‘몽둥이’를 든 일행 20여 명을 이끌고 임정 청사에 직접 난입하는 사태를 일으키기도 했다. 이범석의 만류로 복귀했지만 일종의 폭력 행사라고 할 수 있었다. 임정에 대한 기대와 민족 독립운동에의 자기 사명을 보여주는 것임에 분명하다. 기대와 사명감이 컸던 만큼 실망과 분노가 작지 않았을 것임도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들이 정식 군인 신분이었다는 점은 확실히 문제이다. 이 시기 광복군은 중국군 작전권 하에 있었으며 소속과 계급상 중국 육군 소위였다. 광복군 소속은 임정 아래였지만, 실제로는 장제스의 중국군 지휘 하에 있었던 것이다. ‘정치적인 혼란과 분열이 군인들의 물리력 행사를 정당화할 수 있는가’라는 매우 예민한 문제를 안고 있다.


기시감이 들지 않는가? 박정희와 김종필의 군사 쿠데타를 연상시키지 않는가. 지나친 억측일 수 있다. 그들이 내세운 혁명 공약 6개 중 첫 번째 항목은 "반공을 국시의 제1의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쳤던 반공체제를 재정비 강화한다."이다. 이 공약은 김종필 주도로 작성되었으며 당시 지식인 사회에 압도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사상계》를 많이 참조했다고 전해진다.


절정에 달한 국정(國政)의 문란, 고질화(固疾化)한 부패, 마비상태에 빠진 사회적(社會的) 기강(紀綱)등 누란의 위기에서 민족적(民族的) 활로(活路)를 타개하기 위하여 최후수단으로 일어난 것이 다름 아닌 5.16 군사혁명(軍事革命)이다.


4.19 혁명(革命)이 입헌정치(立憲政治)와 자유(自由)를 쟁취하기 위한 민주주의 혁명(民主主義革命)이었다면, 5.16 혁명(革命)은 부패와 무능과 무질서(無秩序)와 공산주의(共産主義)의 책동을 타파하고 국가의 진로를 바로잡으려는 민족주의적(民族主義的) 군사혁명(軍事革命)이다.


따라서 5.16 혁명(革命)은 우리들이 육성하고 개화(開花)시켜야 할 민주주의(民主主義)의 이념(理念)에 비추어 볼 때는 불행한 일이요,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으나 위급한 민족적(民族的) 현실(現實)에서 볼 때는 불가피(不可避) 한 일이다. 그러나 이번의 군사혁명(軍事革命)은, 단지 정치권력(政治權力)이 국민(國民)의 한 집단에서 다른 집단으로 넘어갔다는데서 그친다면 그것은 무의미한 것이다.

··· 〈중략〉 ··· 

5.16 군사혁명(軍事革命)으로 우리들이, 과거의 방종, 무질서(無秩序), 타성(墮性), 편의주의(便宜主義)의 낡은 껍질에서 자기 탈피(自己脫皮)하여 일체의 구악(舊惡)의 뿌리를 뽑고 새로운 민족적(民族的) 활로(活路)를 개척할 계기는 마련된 것이다.

··· 〈중략〉 ··· 

여기서 우리는 혁명정권(革命政權)이 치밀한 과학적(科學的) 계획(計劃)과 불타는 실천력(實踐力)을 가지고 모든 과제를 해결해 나아갈 것을 간곡히 기대하는 동시에 동포들의 자각(自覺) 있는 지지(支持)를 다시금 요청해서 마지않는 바이다.


무엇보다도 혁명정부(革命政府)는 우리 사회를 첩첩히 억매고 있는 악순환(惡循環)의 사슬을 대담하게 끊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민정(民政) 아닌 군정(軍政)의 의미(意味)가 있는 것이요, 혁명(革命)의 가치가 평가될 수 있는 것이다.

··· 〈중략〉 ··· 

한편, 일체의 권력(權力)이 혁명정권(革命政權)에 집중되었기 때문에 권력(權力)이 남용되지 않도록 국가재건 최고회의(國家再建最高會議)는 이에 만전의 대비책을 세워야 할 것이다. 본래 권력(權力)은 부패하기 쉽고 더욱이 절대권력(絶對權力)은 절대적(絶對的)으로 부패하는 경향이 있다 함은 하나의 정치학적(政治學的) 법칙(法則)이다. 이러한 권력(權力)의 자기 부식작용(自己腐蝕作用)에 걸리지 않고 오늘의 청신(淸新)한 자세를 끝까지 유지하기 위해서는, 국가재건 최고회의(國家再建最高會議)는 시급히 혁명과업(革命課業)을 완수하고, 최단 시일 내에 참신하고 양심적(良心的)인 정치인(政治人)들에게 정권(政權)을 이양한 후 쾌히 그 본연의 임무로 돌아간다는 엄숙한 혁명공약(革命公約)을 깨끗이, 군인(軍人)답게 실천하는 길 이외의 방법은 없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국군(國軍)의 위대한 공적은 우리나라 민주주의 사상(民主主義史上)에 영원히 빛날 것임은 물론이거니와 한국(韓國)의 군사혁명(軍事革命)은 압정과 부패와 빈곤에 시달리는 많은 후진국 국민(後進國國民)들의 길잡이요, 모범으로 될 것이다

_《사상계》, 1961년 6월 권두언


장준하가 이같이 5·16 군사 정변을 "민족주의적 군사혁명"이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은 이유는 5·16으로 등장한 군사정권이 친미親美 노선을 걸을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사실 장준하는 적극적인 친미주의자였다. 학도병 자진입대 후 광복군 자격으로 미군 전략 첩보대(OSS)에 참여한 것이 영향을 주었을 수 도 있다. 후에 그가 모든 통일은 다 좋다고 말한 것과는 달리 장준하는 이 당시만 해도 반공을 최우선에 두고 있었으며, '친미'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때문에 장준하는 극도의 혼란으로 치닫던 장면 정권을 일거에 무너뜨리고 반공논리로 무장한 채 등장한 군사정권에 지지를 보내게 된 것이다. 또 여기에 미국이 군사정권을 지지한 것이 장준하가 군정을 지지한 주요한 동기로 작용했다. 다음 달 함석헌의 〈5⋅16을 어떻게 볼까?〉를 실어 쿠데타 세력과 불화가 있기도 했다. 하지만 함석헌의 글이었다. 이후 장준하의 《사상계》는 오랫동안 쿠데타의 불가피성을 인정했다. 


내가 보기에 걱정은 이 혁명에 아무 말이 없다는 것이다. 말이 사실은 없지 않은데, 만나면 반드시 서로 묻는데, 신문이나 라디오에는 일체 이렇다는 소감 비평이 없다. 언론인 다 죽었나? 죽였나? 이따금 있는 형식적인 칭찬 그까짓 것은 말이 아니다. 그것은 혁명의 말이 아니다. 의사보고 거뜬히 인사하는 것은 병이든 사람이 아니다. 의사 온 줄도 모르면 죽은 사람이다. 참말 명의는 병이 든 사람이 허튼소리를 하거나 몸부림을 하거나 관계 아니한다. 왜? 자신이 있기 때문에.

아무래도 이 사람들이 총 칼 보고 검을 집어 먹었지. 겁난 국민은 아무것도 못한다. 국민이 겁이 나게 하여 가지고는, 비겁한 민중 가지고는, 다스리기는 쉬울지 몰라도 혁명은 못한다.

··· 〈중략〉 ··· 

혹들 하는 말이 우리 사회는 아직 민주주의를 하기에는 정도가 모자란다 하지만 모르는 말이다. 민주주의일수록 어린 아기 때부터 해야 한다. 낳은 어미가 아니니 아직은 계모의 심정을 좀 부리다가 차차 진짜 어미 노릇을 하겠다면 되는 말인가? 낳지 않았을수록 처음부터 어미 노릇을 더 정성으로 해야 할 것 아닌가? 착한 일에도 무슨 시기가 있느냐? 없다. 아직은 독재를 좀 하다가 점진적으로 민주정치를 한다는 그런 모순된, 어리석은, 거짓말이 어디 있나?

··· 〈중략〉 ··· 

혁명은 민중의 것이다. 민중만이 혁명을 할 수 있다. 군인은 혁명 못한다. 아무 혁명도 민중의 전적 찬성, 전적 지지, 전적 참가를 받지 않고는 혁명이 아니다. 그러므로 독재가 있을 수 없다. 민중의 의사를 듣지 않고 꾸미는 혁명은 아무리 성의로 했다 하여도 참이 아니다. 또 민중의 의사를 모르고 하는 것이 자기네로서는 아무리 좋은 일이라 하더라도, 또 사실 민중에게 물질적인 행복을 가져온다 하더라도, 그것은 성의는 아니다.

··· 〈중략〉 ··· 

그러므로 민중을 앞에 두지 않고 꾸미는 혁명은 참 혁명이 아니다. 반드시 어느 때 가서는 민중과 관계가 나빠지는 날이 오고야 만다. 즉 다시 말하면 지배자로서의 본색을 나타내고야 만다. 그리고 오래 속였으면 속였을수록 그 죄는 크고 그 해악은 깊다.

_《사상계》,  1961년 7월호, 함석헌, 〈5⋅16을 어떻게 볼까?


그 이후는 국회의원과 반 박정희 투쟁을 해왔다.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신민당에서 김대중이 후보로 선출되자 탈당한 윤보선가 함께 국민당을 창당했다. 윤보선은 대통령 후보를 사퇴하고 국민당은 박기출이 후보로 선거에 나섰다. 장준하는 윤보선과의 관계는 좋지 않았지만 윤보선의 국민당을 도왔다. 장준하는 1963년 6대 대통령 선거부터 윤보선을 지지했다. 유신정권 이후 1975년 모종의 거사(?)를 준비하던 장준하는 약사봉에서 의문의 추락사로 생을 마감했다.


민족주의자의 길


모든 통일은 좋은가? 그렇다. 통일 이상의 지상명령은 없다. 통일로 갈라진 민족이 하나가 되는 것이며, 그것이 민족사의 전진이라면 당연히 모든 가치 있는 것들은 그 속에서 실현되어야 한다. 공산주의는 물론 민주주의, 평등, 자유, 번영, 복지 이 모든 것에 이르기까지 통일과 대립되는 개념인 동 안은 진정한 실체를 획득할 수 없다. 모든 진리, 모든 도덕, 모든 선이 통일과 대립되는 것 일 때에는 그것이 거짓 명분이지 진실은 아니다.


한반도 주변 열강, 미·소·일·중의 요구에 따라 남북한이 평화 공존으로 동결되고 그 이상의 통일을 향한 노력을 사실상 포기한다면 민족 분단은 더욱 항구화하고 통일과는 반대쪽으로 치달리게 될 것이다. 민족 통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민중이 할 일이다. 통일은 감상적 갈망이기도 하지만 우리들 하루하루의 생활과 직결된 것이다.

모든 통일은 좋은가. 그렇다. 통일 이상의 지상 명령은 없다.


백기완 선생과 장준하의 만남은 의아한 점이 있다. 둘의 만남을 이루어지게 한 것은 박정희 정권의 한·일 협정이다. 일본과 국교를 회복하겠다는 것은 5·16 쿠데타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던 장준하도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장준하의 변화는 백기완과 바로 그 아랫세대인 6·3세대 젊은이들과 교류한 덕분이기도 했을 거다. 박정희 정권과 싸우면서 반일과 통일, 민족주의와 민주주의가 만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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