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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루장 Feb 07. 2022

물에 빠진 개새끼는 때려잡아야 한다

다른 누군가가 권력을 얻는 기회를 만들어주는 자는 자멸한다

개의 본성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 혹 일만 년 뒤라면 지금과 다를지 모르겠으나, 내가 지금 말하는 것은 현재의 일이다. 만일 물에 빠진 뒤 그의 처지를 너무 가련하다고 여긴다면, 사람을 해치는 동물 중 가련한 것들은 얼마든지 있다. 콜레라 균만 보더라도 번식은 빠르지만 성미야 얼마나 솔직한가? 그렇지만 의사는 그것을 절대 내버려 두지 않는다.


페어플레이는 이르다. 백여 년 전에 노신이 한 말이 아직도 유효한 이 땅에 사는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해야 할까. 노신을 아직도 읽게 해주는 세상에 감사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 긍정적인 사고일 것이다. 이 땅에는 친일, 친소, 친미로 이어지는 놈들이 수두룩하다. 그들은 친미뿐 아니라 그게 무엇이 되든지 할 수 있다. 


흥, 그 사마귀 같은 일본 놈들 틈에서도 살았고, 닥싸귀 같은 로스케 속에서 살아났는데, 양키라고 다를까……혁명이 일겠으면 일구, 나라가 바뀌겠으면 바뀌고, 아직 이 이인국의 살 구멍은 막히지 않았다. 나보다 얼마든지 날뛰던 놈들도 있는데, 나쯤이야……. _〈꺼삐딴 리〉, 전관용 


다른 누군가가 권력을 기회를 만들어주는 자는 자멸한다_마키아벨리


이 땅에는 때려잡아야 할 발바리나 개새끼가 왜 이리도 많은지. 그것이 누구인지 일일이 열거하면 얼마나 많을지 각자 생각하기 나름이다. 물에 빠진 개를 측은하게 생각하면 안 된다. 물에 빠졌다고 그들의 습성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건드려도 노하지 않는다'는 것은 관용의 도道이고,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갚는다'는 것은 곧음의 도(直道)이다. 그러나 중국에 제일 많은 것은 삐뚤어진 도(枉道)이다. 물에 빠진 개를 때리지 않으면 도리어 개에게 물린다. 이는 순진한 사람이 사서 고생을 하는 꼴이다.


“악인들은 구제되고 나서, 자신들이 이익을 보았다고 생각할 뿐, 절대 회개하지는 않는다.” 순진한 사람이 사서 고생한다. 더욱이 교활한 그들은 “얼마 안 가서 빛나는 명성을 되찾게 되며, 이전과 마찬가지로 못된 짓을 한다.” 노신은 페어의 상대가 누구인지 먼저 살펴봐야 한다고 말했다. “물에 빠진 상대가 사람이라면 건져야만 하고, 개라면 내버려 두어야 하며, 나쁜 개라면 때려야 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개의 본성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누더기 걸친 사람이 지나가면 발바리가 컹컹 짖어댄다. 그러나 이것은 꼭 개 주인의 뜻이거나 주인이 시켜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발바리는 종종 그의 주인보다도 더 사납다.


페어플레이 정신을 보편적으로 실시하려면, 적어도 물에 빠진 개들이 인간다워진 다음에 해야 한다. 물론 지금은 절대로 안된다는 것은 아니며, 언급한 대로 상대를 봐가며 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차등을 두어야 한다. 즉 페어의 상대가 누구인지를 보아야 한다. 어떻게 물에 빠졌든 상대가 사람이라면 건져야만 하고, 개라면 내버려 두어야 하며, 나쁜 개라면 때려야 한다.


어려워도 해야 한다. 어려울수록 해야 한다. 자고로 개혁이 순풍에 돛 단 듯이 진행된 적은 한 번도 없다. 개혁에 냉소적인 사람들이 찬성하는 것은 개혁이 효과를 본 뒤이다.


아직도 개혁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노신은 ‘단언’한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나는 감히 단언코자 한다. 반 개혁가의 개혁가에 대한 악랄한 박해는 한 번도 미뤄진 적이 없으며, 그 수단의 극렬함도 이미 극에 달했다. 오직 개혁가만이 아직도 꿈을 꾸고 있으며, 늘 손해만 보고 있다. 이 때문에 중국은 아직도 개혁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이후, 이러한 태도와 방법은 반드시 고쳐야 한다!


가끔, 종종 개보다 못한 인간을 볼 수 있다. 때려잡아야 할 개가 아니라 충직한 개보다 못한 인간에 대한 ‘개의 반박’이다. 개보다 못한 인간은 노신이 말하는 페이플레이에 포함되지 않는다. 그들이 때려잡아야 할 개새끼이며, 종종 그 주인보다 사나운 발바리에 다름없다.


개의 반박


꿈에서 나는, 비좁은 골목을 걷고 있는 나 자신을 만났다. 옷도 해지고 신발도 찢긴 채 거지꼴이었다.

개 한 마리가 내 뒤에서 짖었다.

나는 거만하게 나무랐다.

이놈! 닥치지 못해! 권력이나 재물만 보면 코를 벌름거리며 빌붙는 개새끼 같으니라고

히히히놈이 웃었다. 그러더니 입을 나불거린다.

흥! 설마 하니 내가 사람만 못할라고

뭐야!나는 화가 치밀었다. 굉장한 모욕이라 여겨졌다.

부끄럽습니다만, 나는 아직도 은과 동을 가릴 줄 모릅니다. 삼베와 비단도 가릴 줄 모르고요, 거기다가 관리와 백성, 주인과 머슴을 구별할 줄도 모릅니다. 그리고 또 ···

나는 도망치기 시작했다.

잠깐만요, 아직 할 말이 더 있어요 ···개가 등 뒤에서 소리를 치며 붙들었다.

나는 죽어라 도망쳤다. 달리고 달려 간신히 꿈에서 도망쳐 나왔다.

잠을 깨니, 나는 내 침상에 누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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