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된 나에게 건네는 한 권의 성장소설
영화 속 똥주 선생은 처음엔 다소 과장된 인물처럼 보였다. 영화의 특성상 그렇게 캐릭터를 잡은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책을 읽고 나니, 그건 과장이 아니었다. 상상하던 그 인물이, 책 속에서 그대로 튀어나왔다. 그 이상한 듯 특별한 선생이 정말 눈앞에 있는 듯했다.
도대체 이 소설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완득이? 아니면 똥주 선생? 분명 제목은 『완득이』이지만, 읽다 보면 『똥주 선생』이라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이 이상한 어른이 있었기에 완득이는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그렇기에 똥주 선생 연출에 완득이가 주인공이다.
“미안해요
잊고 싶지 않았어요.
많이 보고 싶었어요.
나는 나쁜 사람이에요. 정말 미안해요.
혹시 전화할 수 있으면 전화해 주세요.
안 해도 돼요.
옆에 있어주지 못해서 미안해요.”
완득이 엄마가 남긴 편지다. 똥주 선생이 얼굴도 모르는 완득이의 베트남인 엄마를 찾아내 만남을 주선했고, 그 짧은 만남 이후 완득이는 처음으로 ‘엄마 냄새’를 느낀다. ‘그 흔한 아들이니 엄마니 하는 말도 없’는데, 이 편지는 나도 모르게 눈물을 글썽이게 했다. 엄마는 그냥 엄마일 뿐이다. 말보다 더 큰 존재.
이 소설에서 또 하나 주목한 인물은 핫산이다. 그는 똥주처럼 외국인 노동자를 위해 싸우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는 고용주가 고용한 염탐꾼이었다. 똥주처럼 ‘악덕 고용주’를 고발하는 사람을 찾아내는 게 그의 일이었다.
결국 핫산은 강제 추방을 당하고, 똥주는 유치장을 다녀온다. 외국인을 위한다고 했던 똥주의 행동은 핫산에게 결과적으로 도움이 된 것일까. 아니면 똥주 선생이라는 인물의 성격을 보여주는, 이야기 전개를 위한 장치였을까. 책은 이 문제를 더 깊이 파고들지 않는다. 어쩌면 청소년 소설의 한계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여전히 우리 사회의 단면이 스쳐 지나간다. 외국인 노동자를 향한 시선, 자본가의 착취, 그리고 제도적으로 고립된 그들의 현실. 이 책은 그 전체를 조명하진 않지만, 조용히 어떤 질문은 남긴다.
왜 완득이 아버지는 난쟁이이고, 엄마는 외국인일까. 왜 그 아이는 학교보다 뒷골목이 더 익숙했을까. 똥주 선생이 없었다면 그는 조폭이 되었을까. 떠오르는 건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다. 70년대의 그 현실은 다문화라는 이름으로 21세기에 모습을 바꾸었지만, 본질은 달라졌을까.
이 소설은 어쩌면 막연한 희망을 말한다. ‘내일은 오늘보다 나아지겠지’라는. 하지만 그런 막연함이 위험할 수도 있다. 그것이 이 시대 청소년들에게 심어줄 환상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 소설을 읽으며 희망을 완전히 지우지 못하는 이유는, 여전히 똥주 선생 같은 어른이 있기 때문이다.
세상이 그리 만만하지 않지만, 누군가 곁에 있어준다면, 그 불씨 하나로도 다시 걸어 나올 수 있다. 완득이가 그랬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