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욕구는 본능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표현의 욕구를 가지고 있다. 글을 읽지 못해도 낙서를 시작한다. 읽기보다 쓰기 본능이 먼저이다. 쓴다는 것은 그린다는 것을 포함한다. 공간을 보면 무엇인가 그리고 싶고 쓰고 싶어 진다. 이곳저곳. 쓰기는 인간의 욕망을 표출하는 자연스러운 행위라고 볼 수 있다. 상황과 맥락에 맞게 다른 사람과 공감하여 의미를 전달하는 표현이라면 낙서가 아니라 예술이다.
쓴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의사소통 행위로써 가치를 가진다. 개인과 개인, 집단과 집단, 계층과 계층, 세대와 세대, 나아가서는 시대와 시대가 소통하는 수단이 쓰기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대체로 쓰기라고 하면, 시험을 보기 위한 글쓰기나 훌륭한 문장가가 되기 위한 글쓰기를 연상한다. 쓰기가 인간의 본능에서 비롯된 것인데, 누구나 쓸 수 있다는 생각보다는 잘 쓰고 바르게 써야 한다는 의무감을 가지고 있다.
글쓰기, 바로 이것이 문제다
여기서부터 문제의 시작이다. 시험뿐만 아니라 글을 써야 할 상황은 물론 글의 유형도 다양하다. 다양한 유형의 글을 무시한 채 글쓰기에 공식이 있다고 믿는다면, 그 자체가 우리의 쓰기 욕구를 억압하는 메커니즘으로 작동한다. 먼저 쓰기는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게 시작임을 아는 것이 시작이다.
쓰기가 인간의 본능에서 시작한 점을 생각한다면 누구나 시를 쓰고 소설을 쓸 수 있다. 문학 교육은 ‘창작과 감상’보다 ‘생산과 수용’에 맞추어져 있다. ‘글 쓰는 일’을 ‘특별한 일’로 생각하는 풍토가 생겨났다. 창작이나 감상은 왠지 전문가의 몫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생산과 수용은 누구나 할 수 있다는 뜻이다. 거창하게 시나 소설을 ‘창작’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자신의 삶과 관련된 자연스러운 이야기를 엮어 간다고 생각하자. 쓰기가 훨씬 수월해질 것이다. 우리는 일상의 삶에서 매일같이 이야기를 경험하고 만들어가고 있으니까.
시험 준비를 위한 쓰기도 마찬가지다. 시험 준비를 위한 쓰기를 배운다고 생각하지 말고 나의 삶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하고 쓰자. 어느 한 분야, 특정한 목적만을 고집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쓰기에 젖어들도록 쓰자.
이 모든 것은 교과서에 있다. 우리는 초등학교 때부터 글 쓰는 연습을 하고, 받아쓰는 연습을 한다. 그 자체가 쓰기 공부의 시작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문장을 바르게 쓰고, 문단을 구성하며, 글을 조직하는 연습 해 왔다. 다만 그러한 과정이 교과서 학습의 한 부분일 뿐, 일상의 삶에 배어들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하지 못했다. 그러한 탓에 글을 쓰는 일을 특별한 일로 간주하는 풍토가 생겨났다. 논술시험을 대비하기 위해 별도의 수업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단지 글쓰기에 꼭 필요한 지식을 알고, 쓰기에 필요한 기술과 능력을 갖출 수 있으면 된다. 이 모든 것도 교육 과정과 교과서에 들어 있다.
끊임없이 생각하며 글을 쓰자
글을 쓰는 과정은 읽는 과정과는 달리 생각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과정이다. 단절되면 쓰기를 할 수 없다. 쓰기를 시작하는 순간부터 마무리하기까지 어느 한순간도 생각하지 않고 쓸 수 없다. 좋은 글은 화려한 문체나 그럴듯한 인용과 예시에서 비롯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읽히는 글이다.
독자를 예상하고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 무엇인지 먼저 생각해야 한다. 무분별하게 나열하는 게 아니라 의도를 가지고 선택해서 기술해야 한다. 그리고 주제에 맞는 내용을 선택하고 그것에 집중함으로써 읽는 이와 교감을 이룰 수 있도록 하는 게 쓰기의 첫걸음이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은 많이 알기보다는 아는 것 또 그것을 적절하게 버리고 선택해 쓸 수 있는 사람이다. 우리가 말하는 유능한 필자는 많이 알고 있는 필자가 아니라 적절하게 표현하는 필자이다.
재미(?) 있는 책이다. 아쉽게 지금은 절판이다. 오래전 통독을 하고 옆에 두고 가끔 펼쳐보는데 그때마다 보지 못했던 것이 보인다. 글쓰기에 대한 부담감을 떨치는 것이 우선이다. 이미 우리는 충분히 배워왔고 본능적으로 글쓰기에 재능을 타고났다. 다만 그걸 모르고 있을 뿐이다.
덧_
《나는 국어의 정석이다》, 허재영, 행성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