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재간돼 나오면 다시 젊은 독자를 만나게 된다. 가장 읽히길 바라는 작품은.” 기자가 이문열에게 물었다.
“그런 게 있을 거 같지 않다. 세상이 바뀌고 감정적 수요도 달라졌다. 우리 시대는 종합 인문학적 사고, 교양주의에 대한 수요와 인기가 있었다. 나는 가장 운 좋은 시대, 내 기질과 맞는 시대에 글을 썼다. 그때와 같이 쓰더라도 세상이 변해 수용되기 어려울 것이다. 지금은 단절의 시대다. 그저 어떤 사람은 추억으로 볼 것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옛날에 그랬다던데 하며 들여다보고 그 시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지금 시대가 이문열은 어떻게 보는지는 이문열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는 ‘추억’으로, 또 다른 누군가는 ‘시대를 이해하는 한 요소’로.
어떤 일을 왜 하는가란 물음은 한마디로 그 일을 하는 목적을 묻는 것이고, 목적이란 대개 그 일을 통해 어떤 가치를 실현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의도를 말한다. 그 적극적인 의도는 크게 두 단계로 형성된다. 첫째는 어떤 가치의 존재를 인지하는 단계이고, 다음은 그 가치의 실현을 위해 자기를 내던질 결의를 하게 되는 단계이다.
‘그 시절 이문열이 없었으면 한국문학은 너무나 참혹했을 것’이라는 후한(?) 평가를 받기도 했던 한 시대를 풍미한 ‘소설가’ 이문열. 그를 빼고 80년대 한국 현대 문학을 말할 수 없다. ‘보수논객’으로, 정치권 주위에 있던 그는 정치적 편향으로 욕을 그의 공만큼이나 먹고 있는 작가 중에 하나이다. 자신의 문학관에 대한 생각, ‘나는 문학을 왜 하는가’이다. 등단한 지 얼마 안 된 시절 최인훈의 대답이 자신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고 한다. 더하여 세상 사람이 “문학을 통하여 어떤 가치를 가지고 실현하고자 하는지”의 물음에 대한 자신의 변이기도 하다. “왜 문학을 하는가. 너는 왜 문학을 하는가.”라는 물음에는 말한다. “오래 잊고 지낸 상처를 헤집는 듯 매섭고도 적의 어린 데가 있다.”
등단 이듬해인가, 어떤 잡지사가 마련한 최인훈 선생과의 대담이다. 그때 나는 최 선생님은 왜 소설을 쓰는지 진심으로 궁금하여 여쭈어 보았다.
“그걸 왜 내가 대답을 해야 하나? 소설이란 내가 창안한 것도 아니고, 또 존재해야 할 가치가 없는 것이었다면, 몇 세기나 존속해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는 이미 가치를 승인받고 존속되어 온 소설이란 문화적 제도를 활용하고 있을 뿐이다. 더 이상 어떤 설명이 필요한가.”
선생님은 대강 그런 뜻으로 말씀하셨는데, 솔직히 내게는 충격이었다. 당신의 작품에 담겨 있는 그 엄청난 관념성에 비해 그 답이 너무 간명하고 단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서 재활용하기에는 오히려 수월해, 그 뒤 얼마간 나는 왜 문학을 하느냐는 물음을 받으면 곧잘 선생님의 말씀을 인용했다.
하지만 내 나이 마흔을 넘기고 이제는 속절없이 소설가로 늙어 죽게 되리라는 예감이 강해지면서 내 마음도 달라졌다. 여전히 왜 소설을 쓰느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그런 식의 대응이 너무 성의 없게 들릴 것 같아서였다. 그래서 고백하듯 털어놓게 된 게 소극적 선택의 개념과 ‘사인성’이었다.
문학이 다른 어떤 것보다 더 좋아서가 아니라 덜 싫었기 때문이며, 난파한 내 삶의 바다에서 가장 헤어 가기 좋은 곳에 우연히 있었던 돌섬 같은 것이었다는 ‘소극적 선택’의 내용이다. 또 문학은 누구보다도 나 자신을 위해, 나를 으뜸가는 독자로 삼는 사적 행위라는 것이 ‘사인성’의 논리다. 딴에는 겸손하면서 진솔한 답이라고 믿으면서 한 10년 다시 그것으로 잘 버텨 냈다.
그런데 50대도 중반을 넘기면서 보니 아직도 그것만으로는 답이 궁색해 보인다. 그동안 문학에 바친 만큼이나 많은 빚을 지고, 좋아하는 쪽으로부터든 싫어하는 쪽으로부터든 분에 넘치는 대접을 받아와서 일까, 늦어서야 문학의 ‘공리적 실용’이란 것에 눈이 떠졌다. 문학은 소극적 선택으로 가 닿을 수 있는 우연의 섬이 아니며, 사인성만으로는 결코 온전하게 영위될 수 없는 삶의 한 방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문학은, 특히 소설은 사람의 이야기다. 사람의 안목과 인식으로 번역되지 않고는 어떤 세계도 드러낼 수 없듯, 사람에 대한 사랑과 믿음 없이는 어떤 문학도 우리를 감동시킬 수 없다. 왜 문학하느냐는 물음에 이제 다시 답을 찾아야 한다면 아마도 바로 그런 문학의 특성이 한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다.” 50대인 그때도 답이 궁색하다고 말하지만, 70대인 지금도 궁색하다. 백번 양보해 그의 생각하는 문학은 이게 아닐까 한다. “한 사회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 그 구성원을 특정의 기준에 따라 분류하는 것은 유용할 수도 있다. 또 사회발전을 위해서는 그렇게 분류된 계층 또는 집단의 병폐와 악덕을 들추어내는 것도 필요하다.”
이문열의 생각이나 사상이 옳고 그름을 따지려는 게 아니다. 단지 한국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이다. 보수가 살아야 나라가 산다. 동의하지는 않지만, 자신의 처지에서는 충분히 공감 가는 말이다. “가장 광범위하게 썩어 무너지는 것은 극단화된 보수에 의해서다.”
좌우 양 날개, 새의 날개처럼 둘 다 필요한데, 보수든 진보든 극단화되지 않아야 한다. 진보가 극단화되면 제일 무섭다. 역사적으로 가장 파괴가 광범위하고 잔인하게 일어난 것이 극단적인 진보의 시기이다. 반대로 가장 광범위하게 썩어 무너지는 것은 극단화된 보수에 의해서다. 이 경우는 모두 서로 피해야 한다. 지금은 진보의 필요성이 강한 시대지만 보수가 지나치게 부정되면 그것은 결국 진보가 극단화되는 길이다. 진보의 극단화를 막기 위해서라도 보수는 보수의 값어치와 품위를 유지해야 한다.
멀게는 개화파와 수구파의 투쟁에서, 가깝게는 민주 · 공산의 대립에 이르기까지 근대사에서 가장 격렬하고 비극적인 사건은 모두 이념의 부재에서가 아니라 과잉에서 왔고, 옛것 또는 동양적인 것에 대한 집착보다는 새것 또는 서구적인 것에 대한 지나친 민감에서 온 것이다. _《황제를 위하여》, 머리말
한 사회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 그 구성원을 특정의 기준에 따라 분류하는 것은 유용할 수도 있다. 또 사회발전을 위해서는 그렇게 분류된 계층 또는 집단의 병폐와 악덕을 들추어내는 것도 필요하다.
객관식 출제의 주요 방식으로는 선다형, 진위형, 연결형 따위가 있다. 그런데 그 방식들에 공통된 특징은 응답자가 하나를 고르면 나머지는 반드시 틀려야 한다. 다시 말해 답이 한 문제에 둘 이상이거나, 진眞도 되고 위僞도 되는 것이거나, 아무 쪽과 연결해도 맞는 그런 출제는 해서 안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 살이의 여러 문제는 반드시 객관식으로 출제되어 있지 않다. 이것도 답이지만 저것도 답이 될 수 있고, 어떤 때는 오히려 여러 가지 답을 모아야 제대로 풀린다.
_《우리가 행복해지기까지》, 문이당, 1990 작가의 말 中
덧_
《신들메를 고쳐매며》, 이문열, 문이당, 2004년 3월 초판 12쇄
《우리가 행복해지기까지》, 이문열, 문이당, 1990년 1월 4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