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멩이”를 보면서
짜증스럽다.
편견과 아집뿐이다.
편견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그렇게 본다.
쉼터의 김 선생은
쉼터란, 불우한 아이가 모이는 곳 아니던가.
늘 힘들 거야. 난 그것을 지켜주어야만 하는 사명으로 이 자리에 있는거야.
나는 그 일을 해야만 해.
세상에 나쁜 놈으로부터 아이를 보호해야만 해.
은지는 계부와 친모의 학대 속에 죽은 아빠를 쫒고 있다.
아이를 돌본다면 그 이면을 봐야 하거늘.
은지도 그저 그런 아이중 하나일 뿐이다.
그저 별일 없으면 된다. 어차피 그런 아이들만 모인 곳이니.
아동청소년 복지 소장의 완장을 채워주니 안하무인이다.
내가 곧 정의이고 진리이다.
사제라는 노신부는
석구를 믿지 못한다. 그럴 것이라 생각한다.
세상의 눈으로 똑같이 바라본다.
무슨 일인지 알아봤어야 했다.
진심으로 석구를 믿었어야 했다.
자신의 행동을 평생 사제로서 생활해 온 자신의 명예를 먼저 생각해서는 안되었다.
석구보다 자신의 명예가 더 중요해서는 안되었다.
역시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믿는 사람을 믿어서는 안 된다.
타협이 그 아이를 돕는 게 아닌데.
결국 그 타협이 석구를 더 큰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
김 선생과 노신부는
석구와 은지는 안중에 없다.
서로의 자존심만 내세운다.
과거의 일로 서로를 신뢰하지 못하는 것을 투영하고 있다.
앙금이 남아있다.
낳아 준 엄마, 피가 섞이지 않은 계부는
돈 냄새를 귀신같이 맡고, 흡혈귀처럼 달려든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빨아먹으려 혈안이다.
돈 냄새를 풍긴 것은 노신부의 역할이 컸다.
은지는 엄마를 따라갔을까?
다른 쉼터로 갔을까?
관객이 알아서 생각하라고 한다. 은지는 어디로 가든지 불행할 것이다. 믿어주는 사람이 없을 테니.
풍뎅이의 기도
_김창완
하느님, 종아리를 모두 꺾으시옵고
하느님, 모가지를 비트시옵고
하느님, 뙤약볕 아래 발랑 뒤집어 놓으시옵고
하느님, 전능의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그리시는 하느님,
왼쪽으로 돌까요 오른쪽으로 돌까요?
그러면, 정말 그러면
버려진 이 땅도 짊어지고 날아갈 수 있을까요?
재판을 그렇게 해서는 안되었다.
만일 그런 재판이 현실에 있지도 않지만, 안일하다.
영화판에서는 감독이 신이라지만 잘못된 손가락질은 공감받지 못한다.
계부 손등의 문신은 왜 보여주을까.
은지의 그림은 왜 보여 주었는지. 무언가 하려했지만 여차 한 사정으로 보여주지 못한 어설픈 전개.
감독은 그러면 안되었는데.
(조금 몸만 큰) 아이, 석구를 죽이는 것으로 끝난 오픈 결말은 안이하다.
감독은 무책임하다.
그렇게 끝내서는 안 된다.
조금 더 열린 마음으로 세상을 봤어야 했다.
그래야 공감할 수 있었을텐데.
나의 결말은
(얼마간) 시간이 흐른 후 은지가 돌아온다.
석구를 바라보며 웃는다.
인형이 걸린 나무를 보면서 웃는다.
나무에 걸린 인형이 아니다.
그래도 짜증스럽다.
덧_
김정식, 《돌멩이》,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