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계와 동네 서점을 살리자는 취지로 도서정가제를 실시 한지 오래되었다. 도서정가제가 죽어가는 작은 책방과 출판을 살리는 것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덧없는 희망이 될 뿐이다. 세상이 너무도 바뀌었다. 그래도 작은 출판사가 (다른 사업에 비해 미약하지만) 거대 출판사를 상대로 콘텐츠로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는 약간의 희망이 있다. 출판도 사업이고 살아남아야 후일을 도모할 수 있으니 출판업자에게만 ‘도덕군자’이기를 바라는 자체가 무리이다.
일지사 창업주 故 김성재의 《출판 현장의 이모저모》를 인용한 글을 보았다. 조금 오래되었지만 지금 적용해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해마다 단군 이래 최대 출판 불황이라 외치는 출판업자가 (물론 모두 읽었다고 생각하지만) 한 번 읽었으면 한다. 더불어 책을 읽는 독자(讀人이 아니고 讀者인지는 의문이 들지만)는 물론 출판업자가 고고하거나 이 땅의 문화를 모두 책임질 필요는 없다. 그럼에도 출판업자에게만 무리한 요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출판과 그것을 하는 업자는 최소한의 道는 있어야 한다.
출판사의 평가 기준이 다른 기업의 그것과 다른 이유는 출판업의 특성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곧 출판업은 기업으로서의 측면과 문화적 측면을 함께 지닌 특수한 산업인 까닭이다. 출판업은 그 생산되는 상품이 정신적 소산이므로 영리만을 추구해서는 안 되고, 문화적 사명을 다 해야 한다는 구조적 특성이 있는 것이, 다른 기업과는 본질에서 다르다.
문화적 사명을 다 하기 위해 때로는 밑지는 것을 뻔히 알면서 펴내는 책도 있다. 이는 자기의 이상을 출판이라는 수단을 통해 실현하려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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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출판사의 평가는 규모의 대소가 생산량이나 수익률로써 하지 않고 질이 좋은 책을 얼마나 많이 내고 있는가에 의해서 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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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의지로써 양질의 책을 내고 있다면, 비록 일 년에 한두 권밖에 내지 않더라도, 그 출판사는 높이 평가받아 마땅한 것이다. 물론 양질의 책을 지속해서 많이 내고 있다면 더 말할 나위 없다. 한편 양질의 책을 꽤 많이 낸다 하더라도 질이 낮은 책도 아울러 내고 있다면, 그 출판사의 평가는 낮아질 수밖에 없으며, 아무리 좋은 책을 냈다 하더라도 그 공급 과정에서 품위를 잃어 책의 존엄성을 스스로 짓밟는다면 결코 높이 평가받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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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럭저럭 재정이 안정되자 ‘대(大)’의 논리보다는 ‘소(小)’의 논리에 충실하고자 마음을 가다듬었다. 다량 생산 품종에 의한 끝없는 확대보다, 소량 생산 품종일지라도 학술 가치와 문화적 의의가 큰 것의 출판이야말로 참된 출판의 길이며 내 성격에도 맞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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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의 비뚤어진 잠재 욕구에 영합해서 만든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경우도 종종 있으며, 대수롭지 않은 내용의 것을 막대한 광고비를 써서 시장을 조작하고 독자를 현혹해 베스트셀러로 만드는 책도 있다. 그러므로 베스트셀러가 반드시 좋은 책이 아님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럼에도, 매스컴이 베스트셀러를 많이 거론한다면 좋은 책이라 할 수 없는 것까지 독자에게 홍보해 주는 꼴이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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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출판도 규모의 경제로 발돋움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어쩌다 듣게 된다. 그것도 상당한 지위에 있는 인사들의 입에서 나오니 탈이다. 전형적인 다품종 소량생산 방식에 따르는 출판이 규모의 경제만으로 이룩될 때 과연 출판의 질은 어떻게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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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있어서도 다른 산업자본이 출판계에 손을 뻗치는 일이 점점 늘어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이로 말미암아 창조적이고 개성적인 출판 기업은 위험을 느끼는 시대가 닥쳐올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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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은 규모가 크다고 반드시 규모의 이익을 가져온다고 볼 수 없으며, 오히려 규모에 대한 수확 체감이 많은 산업임을 알아야 한다. 곧 규모의 불이익도 적지 않으며, 무엇보다도 출판의 질을 유지할 수 없으므로, 이러한 용어를 출판업에 적용하려는 것은 마땅치 않다. 출판은 ‘질의 산업’이어야지 결코 규모만의 산업이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양을 무시해도 좋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질을 중시한 결과로써의 양이 아니고서는 출판계의 참된 번영은 있을 수 없다. 양만을 추구할 때에는 출판이 타락하기 쉬우며 출판 공해로 이어지는 비리를 저지르기 쉽다는 점도 아울러 마음에 새겨둘 필요가 있다.
출판의 道, 출판업자의 道를 일개 독자가 논하는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다만 오랫동안 출판에 종사한 출판인의 글을 보니 ‘규모의 출판’이 아니라 ‘질의 출판’이 출판과 출판업자에게도 필요하며, 독자에게도 꼭 필요하다. 타락한 출판과 출판 공해가 지금까지 이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음을 새삼 깨닫게 한다.
덧_
김성재, 《출판 현장의 이모저모》, 일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