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작 - 단편소설
"봤지? 너처럼 모범생이라도, 그곳에서는 별 거 아닐 수 있다고." 나는 마치 미래에서 온 소년이라도 되는 듯이, 확신에 찬 말투로 당당하게 경고했다.
".... 와아, 어떻게 그걸 알아낸 거야? 학교 끝나고 그 얘기 더 해줄 수 있어?"
"어.. 어? 이걸 더 듣고 싶다고? 대체 왜?"
"그야 재밌으니까? 학원 가기 전까지 얼른 해줘. 알겠지? 맛있는 거 사줄게. 응?"
수정이는 내 짓궂은 스토리가 꽤나 마음에 든 눈치였다. 왜 먹을 걸 사주면서까지 본인 욕을 듣고 싶은 건지.. 수정이의 정신은 순수함과 멍청함 사이 그 어딘가에 위치하는 모양이었다. 그런 생각과는 별개로, 나는 얼마 안 가 수정이와 곧잘 붙어 다니게 되었다. 내 이야기에 십분 공감해주는 사람은 수정이 뿐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꿈꾸던 세상에 수정이를 아내로 끼워 넣은 것도 그 무렵이었다.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서 힘든 생활을 보냈지만, 결국에는 멋진 사람을 만나서 행복한 삶을 영위하게 되는 식의 흔하디 흔한 얘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정이는 이 흔해빠진 스토리가 꽤나 관심이 가는 눈치였다.
"그래서 그 멋진 사람은 대체 어디에 있는데?"
"글쎄.. 그 사람은 여기에선 엄청 하찮은 사람이라서" 수정이는 내가 이런 식으로 얼버무릴 때마다 금방이라도 울 기세로 따지고 들곤 했는데 이 바보는 대체 어디까지 믿을 셈인지 그 멍청함에 걱정이 되면서도 이 순수함을 마주하고 있자면 이야기가 정말 현실이 될 것 같다는 착각에 더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참으로 혼란스러운 감정이었다.
"우리 반에 있어" 그렇게 나는 수정이를 진정시키기 위해서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수정이에게 힌트를 하나씩 던져댔던 것이다. 그럴 때마다 수정이는 눈이 이만큼 커져선 환하게 미소 짓곤 했는데, 아마 다음 힌트를 얻어내기 위해 꾀를 쓴 것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을 뽑자면 나는 수정이의 그런 환한 미소를 엄청 좋아했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따금씩 소싯적의 내가 조금만 더 솔직했었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하곤 한다.
"빨리 알고 싶어. 여기선 그 사람이 하찮은 사람이고,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면 내가 그 사람이랑 결혼하면 되는 거 아냐? 반대쪽 세계에선 그 사람이 나를 챙기면 되는 거지. 데칼코마니처럼 말이야." 나는 수정이가 태평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당황한 나머지 대충 대화를 얼버무렸다. 데칼코마니가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그것까지 세세하게 물어볼 정신은 없었으므로.
그 날은 수정이가 빨리 남편을 알려달라며 유난히 떼를 쓰던 날이었다. 집에서 대체 어떤 결심을 하고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요전처럼 한 두 개의 힌트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는 듯이 달려들었다.
"시간이 없어. 빨리 알려 달란 말이야!" 수정이는 새빨간 눈을 한 채로 울먹이며 말했다. 아마 수정이의 인내심은 한계에 다다른 모양이었다.
"그럼 내일은 무조건 알려줄게! 됐지?" 언젠간 말하겠다고 다짐은 했었지만, 그날은 마음의 준비가 덜 되어있었기에 도저히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수정이는 환하게 미소 짓는 대신에, 잔뜩 시무룩한 표정을 하고는 운동장을 벗어났다.
그게 마지막으로 수정이를 본 기억이다. 선생님으로부터 전해 들은 바로는, 아버지 사업 때문에 먼 해외로 떠났다는 이야기. 아쉬움에 끝끝내 수정이에게 말하지 못한 것이 후회로 남았다. 이후, 나는 대학에 낙제했을 때, 사업에 실패했을 때마다 아침에 일어나면 큰 기대를 안고서 거울을 마주했다. 혹시라도 오늘 아침은 이 지긋지긋한 세상을 벗어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 그 기대마저도 하나뿐인 어머니마저 돌아가셨을 때는 다 내팽개쳐 버렸다.
그렇게 맥없는 삶을 지속하던 도중, 페이스북과 인스타를 통해서 수정이가 싱가포르의 유명한 예술 대학에 진학했다는 사실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차기 일러스트레이터로서 자신의 작품들을 잔뜩 올려대고 있었는데, 나는 스크롤을 내리다가 금방 폰을 내려놓을 수 밖에 없었다. 수정이의 데칼코마니 작품을 보고 나서는 왠지 모를 쓸쓸함에 사로잡혔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수정이에게 본심을 말하지 않았던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지금 이곳뿐이고, 내 삶은 너무도 비극적인 나머지 좌우가 반전된 데칼코마니 같은 세계는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너무도 명확하게 깨달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