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정부가 경기 침체기에 사용하는 가장 전통적인 방법은 ‘돈을 푸는 것’이다. 실직자에게 지원금을 지급하거나 산업에 보조금을 투입해 수요를 부양한다. 이를 위해 정부는 화폐를 새로 발행하거나 국채를 발행해 부채를 늘린다. 이런 방식은 단기적으로는 경제에 숨통을 틔우지만, 장기적으로는 반드시 상환해야 할 빚으로 되돌아온다.
물론 경제가 회복되고 일자리가 늘어나면 늘어난 고용과 소비에서 비롯된 세수를 통해 국가 부채는 자연스럽게 상환된다. 대한민국도 지난 수십 년간 이 공식을 충실히 따랐다. 1960~70년대 고속도로 건설, 화학공업 육성, 건설경기 활성화, 새마을운동 등을 통해 산업 기반을 닦았고, 이 과정에서 늘어난 국가 부채는 경제성장과 함께 상환 가능해졌다. 미국도 1930년대 대공황 이후 뉴딜정책으로 실업을 줄이고 경제성장을 유도하며 같은 구조를 따라갔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과거와는 전혀 다른 경제구조 앞에 서 있다. 경제는 성장하지만 고용은 증가하지 않는다. AI와 자동화 기술의 발달은 인간의 노동을 점점 더 대체하고 있다. 대형 물류플랫폼의 확장은 소상공인의 시장을 침식시키고 있으며, 현재 대한민국에서만 매달 10만 명이 넘는 자영업자가 폐업하고 있다. 1,000만에 달했던 소상공인 수는 이미 절반 수준으로 줄었다.
기업은 노동자보다 효율적인 자동화 기술에 더 많은 자본을 투자하고, AI는 24시간 쉬지 않고 데이터를 분석해 최적의 생산과 판매 방법을 찾아낸다. 이로 인해 기업은 생산성과 수익률을 높이지만, 사회 전반의 일자리 수는 줄어든다. 더 이상 AI는 단순 반복작업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제는 창의력과 분석력을 요하는 영역까지 빠르게 잠식하고 있다.
이 현상을 우리는 ‘AI 혁명’이라 부른다. 그러나 이 혁명은 기존의 산업혁명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과거 산업혁명은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어냈고, 더 많은 이들에게 물질적 풍요를 안겨줬다. 반면 AI 혁명은 사람을 ‘일’에서 해방시키지만, 해방된 인간에게 ‘경제적 대체 수단’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저 ‘기본소득’이라는 개념으로 생존만을 보장할 뿐이다.
기본소득이 전면화된 사회는 소비가 극단적으로 정체된다. 노동에서 해방된 대중은 지출 여력이 제한되고, 기업은 수익 기반을 잃게 된다. 결과적으로 법인세와 소득세 수입은 급감하고, 정부는 기존 복지 지출을 유지하기 위해 또다시 국채 발행에 의존하게 된다. 반복된 재정 적자는 궁극적으로 국가 부도의 위기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
이 악순환의 유일한 탈출구는 인플레이션이다. 정부는 인위적으로 화폐가치를 떨어뜨려 부채 부담을 줄이는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물가는 상승하고, 통화량은 늘어나며, 명목상 부채의 무게는 줄어든다. 이는 이미 IMF 외환위기 당시 우리가 경험했던 바다. 고금리와 고물가가 동시에 밀려오며 서민 경제를 직격 했던 그 시절은 단지 과거의 일이 아니라, 다가올 미래의 전조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가? 먼저 AI가 대체하지 못할 인간 고유의 가치를 탐색해야 한다. 감정, 공감, 창의적 사고와 철학적 사고, 공동체적 삶의 설계 같은 영역에서 새로운 일자리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 또한 분배와 과세 체계 전반에 대한 재설계가 필요하다. 기업의 이익이 독점되지 않도록 기술세 도입 등 실질적인 조정이 시급하다.
다가올 인플레이션은 단순한 통화 현상이 아니라, 문명 구조의 전환에서 비롯된 필연적 결과다. 이 변화는 한 사람, 한 정부의 힘만으로는 막을 수 없다. 그러나 대비는 지금, 우리 모두가 함께 할 수 있다. 인류가 만들어낸 기술의 끝이 인간의 파산으로 귀결되지 않도록, 이제는 기술과 인간의 공존 방식에 대한 새로운 철학과 시스템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