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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무역과 금융 질서의 중심에는 늘 ‘기준이 되는 화폐’가 존재해 왔다. 이를 기축통화라 부른다. 기축통화란 국가 간 무역 결제, 외환 거래, 국제 자산 보유의 기준이 되는 통화를 의미한다. 각국이 서로 다른 화폐 체계를 사용하는 상황에서, 국제 거래는 가장 신뢰할 수 있고 가치 변동이 안정적인 통화를 중심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오늘날 그 역할을 수행하는 화폐가 바로 미국 달러다.
현재 국제통화기금(IMF)은 달러 외에도 유로화, 엔화, 파운드화, 위안화를 주요 통화로 분류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통화 가운데 ‘패권’이라는 단어를 붙일 수 있을 만큼 압도적인 영향력을 지닌 화폐는 달러가 유일하다. 글로벌 원자재 거래, 특히 원유 결제의 대부분이 달러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각국 중앙은행의 외환보유고 역시 달러 비중이 절대적이다. 이 구조는 단순한 경제력만으로 설명되기 어렵다. 달러 패권은 긴 역사적 축적의 결과다.
역사적으로도 시대마다 중심 통화는 존재했다. 고대 그리스의 드라크마, 대항해시대 스페인의 페소, 해상무역을 지배했던 네덜란드의 길더는 각 시대의 경제 질서를 상징했다. 근대에 들어 최초의 진정한 세계 기축통화는 영국의 파운드화였다. 산업혁명을 통해 세계의 공장이 된 영국은 19세기 전 세계 교역 결제의 약 60%를 파운드화로 처리했다. 이를 가능하게 한 제도가 바로 금본위제였다.
금본위제는 중앙은행이 보유한 금의 양만큼만 화폐를 발행하는 시스템이다. 종이화폐는 언제든 금으로 교환 가능하다는 신뢰를 기반으로 했고, 이로 인해 화폐 가치는 장기간 안정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은 이 질서를 무너뜨렸다. 막대한 전쟁 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유럽 각국은 금 보유량을 초과하는 화폐를 발행했고, 이는 극심한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졌다. 결국 영국은 1931년 금본위제를 공식 포기하며 파운드 패권도 함께 약화되기 시작했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직전인 1944년, 미국 뉴햄프셔의 브레튼우즈에서 새로운 국제 금융 질서를 설계하기 위한 회의가 열렸다. 이 자리에는 44개 연합국 대표들이 참석했다. 영국의 경제학자 케인즈는 특정 국가에 종속되지 않는 중립적 국제통화 ‘방코르’를 제안했으나, 미국은 달러를 중심으로 한 체제를 강력히 주장했다. 당시 미국은 전 세계 금의 70% 이상을 보유하고 있었고, 전쟁 피해 없이 산업 기반을 유지한 유일한 초강대국이었다. 결과는 명확했다.
브레튼우즈 체제는 금 1온스를 35달러로 고정하고, 미국이 달러를 보유한 국가에 대해 금으로 교환해 주겠다는 약속을 핵심으로 했다. 달러는 금과 직접 연결된 유일한 통화가 되었고, 다른 국가들의 통화는 달러에 고정되었다. 이 구조를 통해 달러는 단순한 미국의 화폐가 아니라 세계 금융 질서의 중심축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오늘날 중국은 이러한 달러 패권 구조에 도전하고 있다. 시진핑 주석이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해 원유 결제에 위안화 사용을 제안한 장면은 상징적이다. 이는 단순한 통화 사용의 문제가 아니라, 달러 중심 국제 질서에 균열을 내려는 시도로 해석된다. 그러나 기축통화의 지위는 정치적 선언만으로 바뀌지 않는다. 통화의 패권은 군사력, 금융 인프라, 자본시장 신뢰, 그리고 역사적으로 축적된 신뢰의 총합 위에서만 형성된다.
달러는 단지 미국이 강했기 때문에 선택된 화폐가 아니다. 전쟁 이후의 세계 질서 설계, 금 보유 구조, 국제 금융 시스템의 제도화라는 복합적 결과 속에서 만들어진 ‘시스템 화폐’다. 오늘날의 통화 경쟁 역시 결국 화폐 자체가 아니라, 어떤 국가가 세계의 신뢰 구조를 설계할 수 있는가에 대한 싸움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