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가족앓이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빛글사랑 Dec 21. 2023

그 한 마디

널 위해서

“가정의 평화를 위해 먼저 간다.”

약속장소에 도착한 지 두 시간 만에 귀가했다. 아침부터 기말고사에, 세탁기 받고, 여섯 시간 탁구 리그전에 참여했다가 1시간 넘게 지각해서 도착한 약속장소였다. 두 시간 만에 가정의 평화를 위해 집에 오다니. 오늘 늦은 귀가는 이해해 주려 마음먹고 있었는데. 일찍 도착한 남편에게 귀가 포옹을 해주려 하니 살짝 마음이 상한 눈치였다. 누구와 다퉈서 일찍 온 줄 알았다. 무슨 일 있었냐고 물으니 내 문자 이야기를 꺼냈다. 그런 의도로 보낸 게 아닌데 남편은 전 날 내 이야기 때문에 문자를 오해한 것이다. 이유 불문하고 남편의 따스한 말과 행동은 반년 동안 가슴앓이 했던 차디찬 응어리를 녹아내렸다.


말과 글이 그 사람의 진심이라 믿었다. 글로 마음을 전달하는 건 익숙한데 말로 마음 전달은 쉽지 않았다. 말에 감정이 실렸다. 뇌를 거치지 않고 나간 말은 이성을 잃은 거친 행동으로 이어져 상황과 관계를 멀어지게 했다. 하루하루 어렵게 쌓은 행복은 그 이야기만 나오면 아물어 가는 상처가 덧났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 뾰족한 말과 행동으로 상처를 주었다.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은 숨긴 채. 수없이 뒤돌아 후회했다.


가정의 평화를 위해 먼저 온 남편의 말과 행동은 ‘널 위해서’라고 들렸다. 어디에 가든 내 생각을 해줬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알아준 거 같았다. 외국 출장으로 타국에서 근무하는 동생이 연말을 보내기 위해 왔는데 가정의 평화를 위해 먼저 왔다. 귀가하는 형의 뒷모습이 애잔했는지 내년 3월에 여행을 가자고 한 동생의 말이 위로가 되었을까. 내 문자를 오해한 게 억울했는지 남편은 내년 여행이야기를 꺼냈다. 문제의 그 이야기를. 응어리가 녹아내리고 기분 좋을 때 여행이야기를 했다면 부드럽게 들어줬을지도 모르는데 또다시 뾰족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남편은 연애시절 나에게 밀당은 절대 하지 말자고 했다. 그런데 결혼 18년 차에 우리는 밀당을 하고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인생 친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