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의 평화를 위해 먼저 간다.”
약속장소에 도착한 지 두 시간 만에 귀가했다. 아침부터 기말고사에, 세탁기 받고, 여섯 시간 탁구 리그전에 참여했다가 1시간 넘게 지각해서 도착한 약속장소였다. 두 시간 만에 가정의 평화를 위해 집에 오다니. 오늘 늦은 귀가는 이해해 주려 마음먹고 있었는데. 일찍 도착한 남편에게 귀가 포옹을 해주려 하니 살짝 마음이 상한 눈치였다. 누구와 다퉈서 일찍 온 줄 알았다. 무슨 일 있었냐고 물으니 내 문자 이야기를 꺼냈다. 그런 의도로 보낸 게 아닌데 남편은 전 날 내 이야기 때문에 문자를 오해한 것이다. 이유 불문하고 남편의 따스한 말과 행동은 반년 동안 가슴앓이 했던 차디찬 응어리를 녹아내렸다.
말과 글이 그 사람의 진심이라 믿었다. 글로 마음을 전달하는 건 익숙한데 말로 마음 전달은 쉽지 않았다. 말에 감정이 실렸다. 뇌를 거치지 않고 나간 말은 이성을 잃은 거친 행동으로 이어져 상황과 관계를 멀어지게 했다. 하루하루 어렵게 쌓은 행복은 그 이야기만 나오면 아물어 가는 상처가 덧났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 뾰족한 말과 행동으로 상처를 주었다.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은 숨긴 채. 수없이 뒤돌아 후회했다.
가정의 평화를 위해 먼저 온 남편의 말과 행동은 ‘널 위해서’라고 들렸다. 어디에 가든 내 생각을 해줬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알아준 거 같았다. 외국 출장으로 타국에서 근무하는 동생이 연말을 보내기 위해 왔는데 가정의 평화를 위해 먼저 왔다. 귀가하는 형의 뒷모습이 애잔했는지 내년 3월에 여행을 가자고 한 동생의 말이 위로가 되었을까. 내 문자를 오해한 게 억울했는지 남편은 내년 여행이야기를 꺼냈다. 문제의 그 이야기를. 응어리가 녹아내리고 기분 좋을 때 여행이야기를 했다면 부드럽게 들어줬을지도 모르는데 또다시 뾰족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남편은 연애시절 나에게 밀당은 절대 하지 말자고 했다. 그런데 결혼 18년 차에 우리는 밀당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