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빛그림 Oct 10. 2024

반지

 


   

   오전 일곱 시. 은색 스테인리스 식기세척기를 열고 유리잔과 머그잔, 타원볼과 접시를 비롯한 커트러리를 꺼낸다. 수진은 마른 린넨 수건으로 아직 온기가 느껴지는 식기들을 다시 한번 싹싹 닦는다. 두 손으로 정성 들여 닦아야 남아 있던 얼룩이 완전히 제거되면서 새것과 같은 상태에 가까워진다고 사장은 말했다. 정말 새것이 될 순 없지만 그런 느낌을 내는 건 가능하다고. 누군가 썼던 식기를 재사용하는 것이므로 세심한 손길로 청결한 상태로 돌려놓는 것이 직업윤리라는 말도 했다.  

   “쉬워. 컵을 닦을 때 말이지, 그 일이 전부인 것처럼 하면 돼.”

   사장은 사장이니까 그렇다 치고 수진은 알바로서 컵을 그렇게까지 닦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왔다. 일회용품이 아니고서야 늘 새 식기를 사용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샌드위치 하나 먹으면서 식기의 청결 상태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손님도 없을 테니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릇 정리를 할 때면 사장의 목소리가 은근한 힘을 발휘하면서 마치 이 일이 전부인 것처럼 열중하게 되는 것이었다. 마른 수건으로 컵의 표면을 밀고 비비는 반복적인 노동이 마음을 진정시키는 효과가 있는 걸까. 

   반지를 어떻게 해야 하나.

   수진은 그릇을 닦는 내내 반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반지를 발견하자마자 주머니에 집어넣던 민첨함은 온데간데없고 희미한 양심만이 유령처럼 수진의 곁을 배회하고 있었다. 

   ‘물건을 훔치는 건 명백하게 나쁜 짓이고… 감옥에 갈 수도 있고… 평생 죄책감에···.’

   수진은 자신이 매우 착하고 도덕적이고 헌신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현실 속 자신의 위치를 겸허하게 받아들이며 분수를 알고 행동한다고. 지각은 절대 하지 않고, 일찍 출근해서 약간 늦게 퇴근하는 걸 당연히 여기며 매사에 자신이 손해를 보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습관도 그런 태도에서 기인한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반지는. 

   반지는 주방의 가장 오른쪽 찬장의 맨 위 칸, 안 쓰는 그릇을 놓아두는 자리에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사장이 다도에 흥미를 잃고 그 쓰임이 점차 줄어들다가 아예 사라진 분청상감 다도 세트의 다관 안에 들어 있었다. 도대체 반지가 왜 그 안에 들어가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어제저녁 느닷없이 시작된 대청소만 아니었어도 반지는 아직 그 자리에 있을 것이었다. 언젠가는 발견되겠지만 당분간은 아닐 것이고 그걸 발견하는 사람이 수진도 아닐 터였다. 수진은 곧 일을 그만둘 예정이었으니까. 다음 달… 혹은 다음다음 달에. 우식과 헤어져도 그만둬야 했고, 혹시 그렇지 않더라도 일을 계속할 순 없었다. 결국 ‘일’은 터졌고 현재로서는 아무 증상도 없지만 몸은 원래 안 보이는 곳에서 더 격렬한 변화를 일으키는 법이었다.  

   어쨌든 사장이 잃어버린 1캐럿짜리 다이아몬드 반지는 지금 수진의 주머니에 들어 있다. 명동 신세계에서 이천 만원이나 주고 산, 클레리티 등급이 우수한 레디언트컷 반지가 없어졌다고 펄펄 뛰면서 알바생을 추궁했던 게 벌써 2년 전의 일이다. 사장에게는 그 사건이 역대 최악의 사건으로 남아 있겠지만 수진에게는 그렇게까지 유별나게 기억되지 않았다. 가게에서는 크고 작은 일들이 늘 일어났고 다른 기억에 남는 일-이를테면 손님이 데리고 온 검은색 리트리버를 보고 (보기만 했는데도) 까무러친 손님 때문에 구급차를 부른 사건이나 공장 식당에서 가스 배관에 이상이 생겼다며 갑자기 샌드위치 50개를 주문하는 바람에 두 시간 동안 미친 듯이 만들고 포장하고 배달까지 성공한 기적 같은 일-이 더 기억에 남았다. 

   그렇다고 반지 사건이 수진에게 아무것도 아닌 건 아니었는데 사건 자체보다는 윤재경이 한 말 때문인 것 같았다. 윤재경은 사장으로부터 의심과 추궁을 받고 기분이 몹시 상해서, ‘사람을 뭐로 보느냐’며 불같이 화를 내고 앞치마도 벗지 않고 가게를 나가버린 마감조 알바생이었다. 

   윤재경 이야기는 우식이 먼저 꺼냈다.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그렇듯 그 얘기도 공기처럼 가볍게 튀나왔고, 정확히 말하면 윤재경이 아니라 윤재경이 한 말에 관한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우식과 그런 심오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게 믿기지 않지만. 미세먼지 때문에 평년보다 기온이 훌쩍 높고, 뭉게구름 같은 하얀 안개가 호숫가를 신비롭게 감싸고 있어서 그랬을까. 텅 빈 시간. 되찾은 기쁨. 미래가 있는 삶. 같은 말들이 축축한 이슬비처럼 수진의 머리카락 사이로 파고들었다.

   마감을 담당했던 윤재경이 가버리는 바람에 수진은 그날 연장 근무를 했다. 윤재경은 다음 날에도 출근을 하지 않았다. 소지품을 찾으러 오지도 않았다. 대신 일주일 뒤에 샌드위치 가게의 열악한 고용 환경과 소소하지만 빈번하게 행해진 사장의 언어폭력을 고발한다며 소송을 걸었다. 검은 서류 가방을 든 말끔한 차림의 변호사라는 사람이 가게를 드나들며 사장을 만난 걸 보면 완전 뻥은 아니었겠으나 사장에게 사과를 받는 일은 사과를 먹기보다 쉬워서 합의는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다신 못 볼 줄 알았던 윤재경이 찾아온 건 반지 사건이 있고 두 달이 지나서였다. 사장이 없는 시간대였고, 사장이 없다고 말하자 윤재경은 알고 있다고, 사장을 만나러 온 게 아니라 샌드위치를 먹으러 왔다며 토마토야채가득샌드위치를 주문했다. 영업시간이 끝나가고 있던 터라 내심 귀찮은 마음이었지만 수진은 토마토와 야채를 가득 넣고 샌드위치를 만들어 주었다. 

   “콜라는 서비스로 줄게.”   

   “고맙다.” 

   윤재경은 테이블에 앉지 않고 배식구 앞에 서서 샌드위치를 먹었다. 수진이 앉아서 편하게 먹으라고 해도 괜찮다며 굳이 그 앞에 선 채로 샌드위치를 베어 먹더니 두고 간 소지품을 찾을 수 있을지 물었다. 수진은 윤재경의 가방과 옷가지를 찾으러 사장의 골방(카운터 뒤에 있는 창고 같은 곳)에 들어가 먼지 쌓인 박스를 뒤진 끝에 겨우 가방 하나를 찾아 나왔다. 수진이 나왔을 때 홀에는 윤재경이 아닌 우식이 서 있었다. 

   “윤재경은?”

   수진이 묻자 우식은 “윤재경이 왜?”하고 되물었다. 두 사람의 의문에 화답하듯 주방에서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났고 주방으로 가보니 윤재경이 다 먹은 샌드위치 그릇을 치우고 있었다. 

   “너 거기서 뭐해.”

   수진은 황당하다는 투로 나오라고 말했고, 윤재경은 돕고 싶어서 그랬다며 빙그레 웃었다.

   “됐으니까 나오기나 해.”

   “그래, 나간다.”

   윤재경은 우식을 보더니 “수진이 데리러 온 거야?” 하고 물으며, 너희 둘은 정말 잘 어울린다는 뜬금없는 소릴 했다. 우식은 좀 모자란 사람처럼 그러냐며 고맙다고 했고 윤재경은 정말 관심이 있어서 그런 건지, 이 상황이 어색해서 횡설수설하는 건지 모를 모호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너희가 몇 년 사귀었다고 했지? 수진이가 휴학하고 공장 식당에서 알바할 때 만났다고 했지? 근데 우식아, 너 공장은 왜 그만뒀니?” 

   그러더니 대뜸 ‘너희는 정말 좋은 애들이고 제대로 된 삶을 찾았으면 좋겠다.’고 말해서 수진과 우식을 황당하게 했다. 수진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제정신인가 싶어서였다. 나쁜 말은 아니었지만 그런 말을 친하지도 않은 윤재경에게 들으니 너무 이상하고 기괴하고 무섭기까지 했다. 

   “너희도 진짜 삶을 찾아야지.” 

   윤재경의 얼굴은 진지했고 딱히 무시하는 말투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노동이 어쩌고 미래가 어쩌고 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은근히 짜증이 났다. 외부세계와 내부세계를 인식하고 주체성을 깨달아야 한다는 소리를 지껄일 때쯤 수진은 이미 딴생각을 하고 있었다. 집에 가서 잠이나 자고 싶다는 생각. 윤재경 나름대로는 의미가 있어서 떠들어 댄 것이었겠지만 수진은 윤재경이 말하는 진짜 삶이 뭔지, 인식이며 의식이며 하는 것들에 관심이 없었다. 게다가 윤재경의 말에서 흘러나온 정보들 -부모님이 모두 법조인이라서 법대에 간 것, 1년 만에 그만두고 철학으로 전공을 바꾸어 스트라스부르로 간 것, 그 길도 아닌 것 같아 2년 만에 귀국해서 이 일 저 일 하고 있다는 것- 을 알게 되자 이유도 없이 정이 더 떨어졌다. 그래서 수진은 주방으로 들어가 내일 아침에 해도 되는 일 -그릇 닦기-를 했고, 딱히 할 일이 없던 우식은 윤재경의 페이스에 말려들어 무방비하게 쏟아지는 언변에 노출되었다. 달콤한 것은 쓸모가 없다는 둥, 반짝이기만 하면 안 될 일이고 뾰족한 끝을 지녀야 한다는 둥, 열정적 자아가 눈을 뜰 수 있도록 환경을 바꾸어야 한다는 둥, 난해하기 짝이 없는 말을 한참 듣던 우식은 어렵게 끼어들 타이밍을 잡고, 이런 걸 물었다. 

   그러는 너는 왜 여기에서 일을 한 것이냐.  

   그때 윤재경이 뭐라고 대답했던가. 그게 우식과 수진이 나눈 대화의 핵심이었다. ‘텅 빈 시간을 못 견디겠어서’가 수진의 기억이었고, ‘빼앗긴 기쁨을 되찾기 위해서’가 우식의 기억이었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의 기억에 이렇다 할 확신은 없었다. 하지만 어렴풋이 뉘앙스만 남아 있는 윤재경의 대답은 그럴 이유가 전혀 없는데도 그들을 우울하게 만들었다. 오래된 불행들이 성큼 다가와서 애써 외면하고 있던 궁핍한 삶을 당혹스러울 정도로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느낌이랄까. 하지만 왜? 이미 오래전에 삶의 일부로 받아들인 익숙한 불행이 새로이 태어나는 기분이 왜 들었을까. 궁색하고 구차한 생활이 곧 너의 삶이고 그게 너의 전부라는 것을 일깨우는 목소리가 왜 들리는지 수진은 알지 못했다. 너에게는 텅 빈 시간도, 되찾을 기쁨도 없으며 미래가 없으니 자유도 열망도 찾아올리가 없고, 늦은 봄 시들어가는 시금치처럼 누렇게 쪼그라들어 생기 없음이 억울한 일인지도 모른 채 사는 대로 사는 서글픈 사람이 될 거라는 예언을 귓가에 속삭이는 정체가 무엇인지 수진은 정말이지 몰랐다. 

   우식은 수진의 해석이 과하다고 말하면서도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였고 그들 사이에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사장이 여친하고 헤어진 게 반지 때문은 아니었지?” 

   우식이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했지만 수진은 반지 따위는 궁금하지도 않았고 그건 우식도 마찬가지라서 그 얘긴 암울하게 막을 내렸다. 

   바로 그 반지가 지금 수진의 주머니에 있는 것이다. 그것도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뇌의 지배자가 되어 수진의 모든 생각을 ‘그래서 반지를 어떻게 할 거냐’는 의문으로 귀결시키면서. 

   수진은 깨끗하게 닦인 머그잔을 꺼냈다가 마음을 바꾸어 사장이 쓰는 (정확히 말하면 쓰지는 않고 아끼기만 하는) 컷글라스를 하나 꺼냈다. 도요사사키인지 도도사사키인지를 카피했다는, 전 여친이 선물한 컵 세트에 사장은 손도 대지 않았다. 새것의 상태로 두면 언젠가는 사랑하는 사람이 돌아올 거라고 믿는 건가? 수진은 막연하게 상상하면서 칼집이 아름답게 아로새겨진 유리잔에 얼음을 가득 채우고 그 위에 콜라를 부었다. 컵이 얼마나 예술적으로 생겼는지와는 아무 상관없는 탄산 알갱이가 가열 차게 터져나가는 동안 얼음은 덜그럭 소리를 내며 자리를 옮겼다. 판매용 캔 음료에 손댄 걸 알면 싫어하겠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호기로웠다. 

   반지의 위력인가. 

   수진은 내친김에 찬장의 맨 아래 칸에 북파공작원처럼 숨어 있는 위스키 병들 중에서 (더 비싼 것도 있었지만) 30년산 글렌피딕을 꺼냈다. 사장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아주 조금만 따랐다가 좀 더 따랐다. 수진은 두 액체가 완전히 섞이기도 전에 일단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또 한 모금. 희미한 위스키 향이 콧구멍에서 목구멍으로 하강하듯이 미끄러지는 걸 음미하고 난 뒤에야 비로소 ‘마시면 안 되는구나···.’ 하는 사실을 깨달았다. 

   수진은 자신이 임신 중이라는 사실이 도무지 실감 나지 않았다. 실감이 나지 않는다고 해서 없던 일이 되는 건 아니었고 수진도 그 사실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참 슬픈 일이었다. 아이가 생겼다는 게 슬프다는 게 아니라 일어난 일은 일어난 일이라는 게 슬펐다. 이미 써버린 시간은 되돌릴 수 없고, 방향을 바꾼 길은 앞으로 예상치 못한 길만 열어줄 것이며, 기대는커녕 원치 않은 길만 골라줄 것을 알기에 슬픈 것이었다.

   수진은 잔을 내려놓았다. 위스키는 이제 콜라와 완전히 섞여 그 색도 향도 알아볼 수 없었다. 약간 밝은 갈색과 진한 갈색, 두 층위가 있었는데 어느새 차이는 감쪽같이 사라지고 평범한 콜라로 돌아와 있었다. 그 안에서 뭔가 발견하려는 것처럼 글라스 안을 들여다봤지만 당연히 그 안에 수진이 보고자 하는 건 없고 그냥 콜라와 얼음과 위스키가 섞인, 일정한 형태는 가졌으나 일정한 부피는 갖지 못한 응집력 없는 물질이 담겨 있을 뿐이었다.  

   그때 출입문 열리는 소리가 나면서 누군가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사장의 인기척은 아닌 것 같더니 사장의 누나인 백영해가 서 있었다. 

   “덥다, 더워. 에어컨도 안 틀고 뭐 해?” 

   아직 이른 시간인데도 백영해의 분홍색 긴팔 티셔츠는 많은 부분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백영해는 오이와 양파 따위가 든 이미 수차례 쓴 것이 분명한 낡은 쿠팡 프레시백을 배식구 위로 밀어 놓더니 홀로 나가서 에어컨을 틀었다. 2인용 테이블 세 개와 4인용 테이블과 6인용 테이블로 꽉 찬 공간은 그리 크지 않아서 금방 서늘해질 것이었다. 수진은 시간을 확인했다. 일곱 시 사십 분. 아직 영업 시작까지는 삼십 분 가량 남아 있어 그렇게 서둘러 에어컨을 가동시키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주인이니까 마음대로 하라지. 수진은 전혀 덥지 않았다. 

   “얘는 아직 출근 안 한 거야?”

   “오늘 좀 늦는다고 하셨어요.”

   사장과 백영해는 남매였지만 성이 달랐고, 나이 차이도 열 살 이상 났다. 사장이 온갖 멋을 내는 반면 누나 쪽은 더할 나위 없이 안 꾸미는 스타일이어서 남매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사장이 무채색 계열의 옷만 고집하는 반면 백영해는 주머니 달린 작업복 바지에 화려한 색상의 상의를 즐겨 입었고 머리에는 야구모자든 털모자든 귀도리든 반드시 뭔가를 둘러썼다. 사장은 완전히 쓰지도 벗지도 않은 모자의 상태를 질색하면서 그 패션은 정말 아니지 않냐고, 동의를 구했지만 수진의 눈엔 그게 그렇게까지 거슬리지는 않았다. 

   “보아하니 오늘도 푹푹 찌게 생겼다. 5월부터 이러면 어떻게 사니.”

   수진은 차가운 물을 한 잔 따라서 건넸다.

   “그래, 오늘은 또 왜 늦는대?”

   백영해가 모자를 살짝 들어 올리며 물었다.

   “메뉴 때문이라고 한 것 같아요.”

   “메뉴? 메뉴가 왜?”

   “메뉴를 개발해야 할 것 같다고···.”

   백영해는 물을 다 마시고 빈 잔을 수진에게 주었다. 

   “놀고 있다. 있는 거나 잘 하라 그래. 그치?” 

   수진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지만 백영해의 말이 백번 맞는다고 생각했다. 알바를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수진은 사장의 사업 수완이 그다지 뛰어나지 않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역시나 가게의 모든 것은 누나인 백영해가 일군 것이었고 건강이 안 좋아져 사장에게 운영을 맡긴 상황이었다. 사장은 특별한 직장 없이 주식으로 일정한 수입을 만들며 요가와 도자를 -취미치고는 진지하게- 배우러 다니는 사람이었는데 편의상 직업이 있는 척하기 좋겠다는 이유로 제안을 받아들였다. 백영해는 가게를 넘긴 뒤로 호수 옆에 있는 텃밭을 분양받아 야채를 직접 재배하고 마크로비오틱 요리를 연구했다. 이따금 양파나 배추 같은 걸 들고 와서 채소는 뿌리부터 머리까지 전부 먹어야 한다며 조리법을 가르쳐주었는데 조금 귀찮긴 해도 수진은 그 시간이 재미있었다.

   “바쁜 거 아니지?”

   조리법을 가르쳐줄 줄 알았던 백영해는 주방의 뒷문을 열더니 담배를 꺼냈다. 

   “한대만 피울게. 요즘 진짜 피울 데가 없어. 심지어 텃밭에서도 못 피운다.” 

   백영해는 주방의 뒷문으로 난 좁은 계단참에 걸터앉았다. 

   “잔인하지 않니.”

   “뭐가요?”

   “흡연 말야. 그렇게까지 억압할 일이냐고.”

   “아. 근데 피우셔도 돼요? 병원에서···.”

   백영해는 살짝 웃음을 짓는 것 같더니 담배를 입에 물었다. 

   “결국 내 마음 아니겠어?”

   그러고는 조리대에 있는 콜라 잔을 가리키며 말했다.

   “너도 그거나 마셔. 얼음 다 녹겠다.” 

   어느새 얼음이 녹아서 투명하게 콜라의 표층을 덮고 있었다. 수진은 새로 생긴 물의 층위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액체의 윗부분은 미세한 진동을 받는 것처럼 조금씩 계속 떨렸고 한시도 멈추지 않았다. 

   “그 컵 오랜만이네. 커팅을 직접 했다지. 칼집이 예술이긴 해. 술맛 나게 잘 만들었어. 그거 아직도 끔찍하게 아낄걸?”

   앞치마를 두르려던 수진은 마른 사래가 나올 뻔했다. 

   “아, 이게요… 제가 꺼낸 건 아니고… 아니 꺼내긴 했는데 보기만 하려고 잠깐···.”

   수진이 버벅거리자 백영해는 컷글라스에 대한 관심은 끝났다는 듯 갑자기 옛날 얘길 꺼냈다. 자신이 뉴욕에 살았던, 10년 전 시절의 이야기였다. 

   “내가 거기서 애 봐주는 일을 했잖아. 갓 태어난 아기들 있지? 신생아.”

   수진은 이야기를 듣기도 전에 백영해가 하려는 얘기가 ‘미드 타운 아기 엄마’이야기라는 걸 알았다. 20일 된 아기를 두고 고층 아파트에서 뛰어내리려고 했던 젊은 여자의 목숨을 구한 이야기. 전에도 몇 번 들은 적이 있었다. 그 사건의 하이라이트는 백영해가 베란다의 위가 아닌 아래쪽으로 손을 뻗어 여자의 손이 아닌 몸을 꼭 붙든 것이었다. 

   “몸을 꽉 껴안았으니 망정이지 손을 잡았으면 그대로 떨어졌을 거야. 내가 생각해도 참 영리했지. 순발력이 있었어. 집에 들어가자마자 공기가 이상한 걸 알아챘거든.”

   수진은 조용히 앞치마를 매고 머리를 묶은 다음 글라스에 있던 콜라를 개수대에 따라 버렸다.

   “수진아, 네가 지금 미국 나이로 몇 살이지? 스물일곱이던가?”

   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생일이 안 지났으니 따지자면 스물다섯이겠지만 한국 나이고, 미국 나이고 무슨 상관이겠나. 

   “그 애기 엄마가 딱 네 나이였는데. 일 그만두고 딱 한 번 더 봤거든?” 

   백영해는 브롱스크에 있는 도넛 가게에서 우연히 그 여자를 다시 봤다. 백영해는 여자를 한눈에 알아봤고 여자도 자기를 알아본 것 같은데 아는 척은 하지 않았다고 했다. 도넛 가게는 테이크아웃을 전문으로 하는 곳이라 매장 안이 지저분했다. 테이블은 두 개뿐이고 그마저도 위에는 신문이며 자동차 열쇠며 주인의 잡동사니가 산만하게 놓여 있어 선뜻 앉고 싶은 자리는 아니었다. 백영해가 거기에 앉아 있었던 것은 그곳에 일자리를 구하러 간 것이기 때문이었다. 백영해는 대충 통성명이나 하면 될 일이지 왜 사람을 기다리게 하나 싶으면서도 앉아 있었는데 그때 마침 출입문이 열리더니 허름한 도넛 가게와는 영 매치가 안 되는 멋쟁이가 들어온 것이다. 레이스와 프릴이 풍성하게 달린 핑크 드레스를 입은 여자는 신이 난 목소리로 통화를 하고 있었다. 

   “나를 못 본 것 같더라고. 처음에는.” 

   여자는 도넛 진열대 옆에 놓인 쟁반을 들어 딸기 도넛과 오리지널 도넛을 각각 두 개씩 담아서 계산대로 가져갔다. 그쪽으로 가려면 어쩔 수 없이 백영해가 앉은 테이블을 지나게 되어 있었는데 통화에 열중하느라 백영해의 존재를 못 알아챘던 여자는 백영해와 눈이 마주치고 화들짝 놀라더니 도넛을 쟁반째 떨어뜨리고 가게를 나가버렸다.  

   “그걸 내가 다 치웠다.”

   수진은 샌드위치 빵을 종류별로 분류해서 브레드 박스에 넣으면서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러나 백영해는 말없이 한동안 담배만 피웠다.

   “왜 그냥 나갔을까요?”

   수진이 물었고, 백영해는 잠시 생각하는 것 같더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그 여자의 뭔가를 건드리지 않았나 싶어. 신나는 기분에 찬물을 확 끼얹는 짜증 나는 뭔가를. 죄책감이나… 수치심 같은 거일 수도 있고. 갑자기 과거의 인물이 등장해서 초를 친 거지.”

   백영해는 계단참에 담배를 비벼 끄고 꽁초를 자신의 케이스에 챙겨 넣었다. 

   “오늘따라 그날 기억이 나서 주절거려 봤어. 요즘 내가 불면이 좀 있어서 새벽에 깨어 있거든. 가만히 앉아 있으면 이 생각 저 생각이 나.  그러면 당연히 잘한 일이라고 여겨 온 것도 후회가 들고 후회되었던 일도 괜찮아지더라. 잠이 안 오니까 별 쓸데없는 생각을 다 하는 거지. 웃긴 건 결론은 내가 왜 이렇게 살고 있나. 이게 내가 원하는 삶이었나. 하는 의문으로 끝난다는 거야. 처음엔 되게 우울했는데 새벽에 나와서 텃밭에 있는 상추랑 토마토 같은 걸 보면 기분이 나아지긴 해. 아침부터 별 얘길 다 했다. 그러려니 해.”

   수진도 처음엔 백영해가 별 얘길 다한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요리를 배우는 게 낫겠다고. 그런데 막상 얘기를 듣다 보니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휘몰아쳤고 백영해가 불면 얘길 하자 왈칵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당연히 눈물은 안 나왔지만 말을 하고 싶은 욕구가 저 밑바닥에서부터 강렬하게 올라왔다. 저도 불면이 있고 하루하루 사는 게 너무 힘들다고. 뭘 해야 할지 모르겠고, 샌드위치를 만드는 일은 좋지만 죽을 때까지 이 일을 할 수 없는 건 안다고. 미래가 있어야 기쁨이 있고, 기쁨이 있어야 텅 빈 시간을 채울 수 있는데 너희에게는 그런 게 없으니 더 넓은 세상을 찾으라는 말이, 들을 땐 아무렇지도 않던 말이 어느 날 부메랑처럼 날아오더니 점점 더 큰 소리를 내서 괴롭다고. 그 목소리가 들린 뒤로 나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생각만 들고, 전에는 몰랐는데 미래는 내가 갖고 싶다고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라 어느 순간 주어진다는 걸 알게 됐다고. 우식도 미래가 없는 건 마찬가지 아니겠냐고. 걔는 대학도 안 나왔으니 더 막막하다고. 임신을 한 것 같다고 하니까 행복하다고 했는데 임신이 뭔지 알고나 그러는 건지 모르겠다고. 아직 병원에 다녀온 건 아니지만 생리를 두 달이나 안 한 데다 레몬처럼 신맛이 당기는 걸 보면 거의 확실하다고. 오늘 아침엔 컷글라스를 몰래 꺼내 썼지만 어제는 반지를 훔쳤고, 그 반지가 주머니에 있는데 그걸로 뭘 할 수 있을까요? 묻고 싶었다. 

   “내 얘기가 좀 우울했나? 손님 온 것 같다.”

   이른 시간이었는데 정말로 손님이 들어왔고 결국 수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우린 또 보자고. 채소는 깨끗하게 씻어서 머리부터 끝까지 다 먹어. 그게 좋아.”

   백영해는 모자를 푹 눌러쓰고 가게를 나갔다. 




   염색하지 않은 긴 백발을 아래로 묶고 보라색 카디건에 검정 치마를 입은 노인. 앤은 가장 안쪽 테이블에 앉아 수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침마다 오는 단골손님. 샌드위치 빵으로 스프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닦아 먹고 깨끗한 스프볼과 접시만을 남기고 가는 앤. 진짜 이름은 따로 있겠지만 수진은 그에게 앤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오늘은 신선한 로메인을 넣어줄 수 있으니 야채가득 샌드위치를 추천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앤의 테이블로 걸어가는데 문밖에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말? 정말이야?” 

   “아라 진짜 대단하지?”

   “아라, 제법인데. 귀도 좋고 머리도 좋고 손재주까지 좋다고.”

   손님이 오기엔 아직 이른 시간이었는데 문이 벌컥 열리더니 정장 차림의 여자 두 명과 캐주얼한 복장을 한 남자가 들어왔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 두 여자와 달리 입을 툭 내밀고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남자는 마지못해 따라 온 것처럼 보였다. 

   “가게 귀엽다.”

   여자 중 한 명이 선글라스를 벗고 가게를 둘러보았다. 다른 여자는 벌써 자리를 잡고 앉아 테이블에 놓여 있는 메뉴판을 펼쳤고, 남자는 죽상을 한 채로 선글라스를 든 여자 옆에 서 있었다. 여자들이 화려하게 차려입은 편이었다면 남자는 평범한 차림이었는데 이목구비의 균형이 좋고 턱 선도 날렵해서 한눈에도 미남이라는 사실을, 본인도 본인의 잘생김을 알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세 사람 모두 수진이 사는 호숫가 공장 동네에서는 보기 어려운 타입이었다. 

   “이 동네 점점 마음에 든다?”

   여자는 가게 안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수진은 그제야 아직 바깥에 달린 돌출 간판의 조명도 켜지 않았고, 음악도 틀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불을 켜기도 전에 손님이 두 팀이나 오다니. 아직 영업을 시작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기엔 이미 앤이 앉아 있었다. 

   “뭐가 맛있나요?”

   여자가 자리를 잡고 앉아 메뉴를 살피면서 물었다. 통이 넓은 핀턱 팬츠에 가슴골이 훤히 보이는 갈색 브이넥 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그 차림이 아주 근사했다. 수진은 오랜만에 멋을 낸 사람을 보니 왠지 기분이 좋았고, 오늘은 신선한 야채가 있으니 야채가 들어간 샌드위치가 맛이 좋을 거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선글라스 여자가 좀 더 빨랐다.  

   “지영아, 그냥 맨 위에 있는 세 개 시켜.”

   “맨 위에? 거기 뭐가 있는데? 여기 술도 파나요?”

   지영이라는 이름의 여자가 수진을 보며 물었다. 

   “병맥주는 있어요.”

   “와인이나 칵테일 같은 건 없는 거죠?”

   지영이라는 여자가 와인과 칵테일을 물어보자 선글라스 여자는 메뉴판을 탁 소리 나게 뒤집어버렸다.

   “지영아 맥주든 칵테일이든 좀 참아. 참을 수 있잖아. 있다가 끝나고 마셔. 실컷 마셔. 저희 그냥 이거, 스페셜 비니거 야채 샌드위치? 이거 세 개랑 주스 세 잔 주세요. 하나는 오이 빼야 되는데, 뺄 수 있나요?”

   “네. 알겠습니다.”

   수진이 돌아서는데 그때까지 가만히 있던 남자가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다른 메뉴가 먹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자 선글라스 여자는 손바닥을 쫙 펼쳐 남자의 이마를 살짝 밀면서 “아라야 너는 그냥 주는 대로 먹어.” 라고 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떠나는 수진을 불러 세워 메뉴를 바꾸겠노라고 했다. 그들은 종류가 다른 세 개의 샌드위치를 주문했다. 

   수진은 주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카운터로 가서 시디플레이어를 작동시켰다. 한동안 빈티지 소품에 빠져 있던 사장이 사다 나른 물건 중에 그나마 쓸 만한 것이었다. 플레이 버튼을 누르자 마이클 잭슨의 <You Rock My World>의 반주가 흘러나왔다. 언제 적 마이클 잭슨이야···. 수진이 다급하게 임윤찬이나 조성진 시디를 찾고 있을 때 홀에서 활기찬 대화가 들려 왔다.  

   “오! 마이클 잭슨!”

   “얜 마이클 잭슨이 백인 되려고 성형했다는 루머를 아직도 믿잖아.”

   “아니거든.”

   “이 노래 알아? 마이클 잭슨이 죽기 직전에 낸 앨범인데.”

   “알 리가 있나.”

   “죽기 직전은 아닐걸.”

   수진은 세 남녀가 무슨 사이일까 곰곰이 생각하다가 그런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단호박스프를 데우고 계란을 삶았다. 반지에 대해서도 더는 생각하지 않았고 텅 빈 시간이라느니 기쁨을 되찾아야 한다느니 미래가 없다느니 하는 말도, 죄책감이니 수치심이니 하는 감정도 쓸어버렸다. 고매하게 앉아 생각이나 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당장 해야 할 일의 순서를 매겨야 했다. 아니 그냥 몸을 움직여야 했다. 

   수진은 샌드위치 만드는 일이 좋았다. 조리대에 왁스 페이퍼를 깔고 빵 위에 소스를 골고루 펴 바르는 것부터 좋았다. 아니 소스를 만들기 위해 피클을 잘게 써는 일부터 좋았다. 손님들은 샌드위치 소스에 몇 가지 양념이 들어가는지 모를 것이다. 레몬즙, 머스타드, 설탕, 후추, 잣, 피클, 파슬리, 마요네즈. 그 외에도 샌드위치의 종류에 따라 갈릭 후레이크가 들어갈 때도 있고 통마늘을 갈기도 했다. 바질 샌드위치에는 홀스래디쉬와 그라나 파마노를 넣은 소스가 잘 어울렸고 잠봉뵈르에는 가염 버터를 넣었다. 빵의 배를 가르고 소스를 발라 그 위에 치즈를 깔고, 삶은 계란을 동그랗게 썰어서 여섯 개씩 올리는 일, 그 위에 토마토나 양파나 오이를, 메뉴에 따라서는 가지나 베이컨을 놓는 것도 좋았고 적채를 감싼 양상추를 올리고 탑처럼 높아진 속을 뚜껑 덮듯이 꾹 누르는 것도 좋았다. 샌드위치를 선물처럼 포장하는 것도, 그걸 반으로 썰었을 때 나오는 데칼코마니 같은 형상을 보는 것도 좋았다. 

   메뉴의 종류가 제각각이라서 평소보다 속도가 더디긴 했지만 수진은 네 개의 샌드위치를 능숙하게 만들었다. 플레이팅을 끝내고 두 개의 접시를 들고 나갔을 땐 손님이 한 명이 더 와 있었다. 아침부터 손님이 줄줄이 들어오는 이상한 날이었다. 점심시간에도 좀처럼 없는 일인데. 게다가 오늘은 휴일이고 휴일에 이 동네를 찾는 사람들은 대체로 나이 든 연인으로 커피나 차를 마셨다. 그들이 부부가 아니라는 건 대충 다 알았고 호숫가 공장 동네에서 그런 걸 일일이 신경 쓰고 의식하는 사람도 없었다. 

   새로 온 손님은 남자였고 외국인이었다. 파란 니트에 청바지를 입은 남자는 몸집이 매우 작아서 중학생처럼 보였다. 피부는 어두운 편이었고 머리카락은 까맣고 짧고 곱슬거렸다. 수진은 그를 신기한 듯이 쳐다보았다. 그가 외국인이라서가 아니라 어깨에 메고 있는 엄청 큰 사이즈의 반려동물 이동가방에서 희한한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남자는 조금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마음을 정한 듯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 자리는 가게에 있는 유일한 단체석이라서 수진은 자리를 옮길 것을 부탁할지 말지 고민스러웠지만 아직 이른 시간이었고 사장도 없는 마당에 빡빡하게 굴지 않기로 했다.  

   수진이 두 테이블에 차례로 서빙을 끝냈을 때 남자가 손을 들어 주문하겠다는 의사를 전해왔다. 남자는 조용한 목소리로 바게트 샌드위치와 탄산수를 주문하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잠깐 내놔도 될까요?”

   “뭐··· 뭘요?”

   “둥둥이요.”

   남자는 자신이 들고 온 가방을 두 팔로 감싸면서, 둥둥이가 안에 있는 걸 너무 답답해한다고, 얌전한 아이라서 괜찮다고 말했다. 수진은 이런 적이 처음이라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는데 남자의 눈빛이 너무 간절해서 알겠노라고 대답하고 말았다. 남자가 가방에 달린 두툼한 지퍼를 내리자 기다란 회색 꼬리를 가진 다람쥐인지 족제비인지 모를 생명체가 고개를 쏙 내밀었다. 둥둥이는 콩콩콩 걸어 나오더니 정말 어디로 도망가지 않고 얌전하게 남자의 옆에 앉아 있었다. 

   “어머! 쟤 뭐야! 진짜 귀엽다. 얘들아, 저기 좀 봐. 고양이야!”

   선글라스 여자는 다람쥐를 보고 고양이라고 하면서 신난 얼굴로 남자의 테이블로 왔다. 수진은 염려스러웠지만 다행히 남자는 괜찮은 것 같았고, 미소 띤 얼굴로 대화도 주고받았다. 

   “회색큰다람쥐예요. 이름은 둥둥이고요.”

   “꼬리가 빗자루처럼 기네요.” 

   여자는 둥둥아, 둥둥아, 하며 다람쥐의 등을 쓰다듬으며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었고, 나머지 일행은 음식을 먹었다. 

   수진은 주방으로 돌아와 남자가 주문한 샌드위치를 가져다주고 나서야 겨우 한숨 돌렸다. 다행히 손님이 더 오지는 않았고 대신 우식에게 문자가 왔다.

   -끝나고 미술관 안 갈래?

   수진은 미술관은 너무 멀지 않냐고 답장을 보냈다.

   -그 앞에 잔디 광장에서 공연을 한대.

   -공연?  

   -가수도 온대.

   수진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쉬고 나니 오랫동안 한숨을 참아 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 자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지금 우리가 공연이나 볼 때가 아니라는 것을 우식도 알아야 했지만 그걸 누가 알려준단 말인가. 수진은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고 싶었다. 그러나 짧은 시간에 다양한 메뉴를 만드느라 어수선하게 늘어놓은 재료들을 치워야 했다. 평소에 잘 쓰지 않는 비니거와 앤초비까지 모조리 꺼내놓은 탓에 조리대가 엉망이었다. 수진은 억지로 몸을 일으켜 올리브 병을 겨드랑이에 끼우고 치즈를 집어 들었다. 그러다가 앞에 있던 피클 병을 툭 치는 바람에 병이 바닥으로 떨어져버렸다. 병은 예외 없이 와장창 깨졌고 짠 냄새가 진동했다. 수진의 입에서 저절로 한탄이 나왔다. 

   그냥 눈이나 감고 앉아 있을걸.

   수진이 맨손으로 깨진 유리 조각을 대충 모으고 있을 때 지영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가 주방으로 고개를 쑥 내밀었다. 

   “괜찮아요? 뭐가 깨졌죠?” 

   수진이 가만히 앉아 있자 여자는 더 큰 소리로 말했다. 

   “거기 손에 피가 나네요. 손 다치셨어요. 피 나요, 피!” 

   여자의 말을 듣고 보니 손등에 가느다란 생채기가 나 있고 동글동글 피가 맺혀 있었다. 

   “알아요. ”

   수진은 현기증이 났지만 여자가 더 이상 호들갑을 떨지 않도록 구급상자를 들어 보였다. 손등에 난 피를 물로 씻고 밴드 여러 개를 교차해서 붙여 핏자국이 보이지 않도록 했다. 여전히 어지럼증이 가시지 않아서 눈을 감았는데 눈앞이 깜깜하니까 머리가 더 빙빙 도는 것 같아 도로 눈을 떴다. 다행히 여자는 자리로 돌아간 것 같았다. 아침부터 손님이 너무 많이 왔어. 

   “언니, 사장님이 손을 다치셨다. 그 위험한 것이 여기까지 따라왔나 봐.”

   밖에서 여자의 명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명랑한 목소리와는 대조적으로 그 내용은 어딘지 좀 섬뜩한 구석이 있었는데 아마도 살이니 부적이니 하는 단어들 때문인 것 같았다. 

   “지영아. 점 좀 그만 보고 다녀.”

   “점 아니고 타로 봤어. 그치, 아라야?”

   “타로 아니고 신타로.” 

   “그게 그거잖아.”

   “지영아.”

   지영이라는 여자는 선글라스 여자의 다음 말을 가로채 자신이 요리하다가 다친 일화를 이야기했다. 아이를 위해서 요리할 땐 한 번도 다친 적이 없는데 아이가 그렇게 되고 난 뒤로 이상하게 자꾸 다친다고. 칼에 베이는 게 아니라 냄비 뚜껑이나 샐러드 집게 같은 전혀 위험하지 않은 것이 자기를 공격한다고.

   “그래서 이제부터 부엌 출입을 아예 안 하기로 했어. 악기를 그만둘 순 없잖아.” 

   일행은 대답이 없었다. 그래도 왠지 다정한 얼굴로 여자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는데 그 이유는 여자의 말투에 활기가 넘쳤기 때문이다. 

   그들의 관계를 내키는 대로 상상하면서 이야기를 엿듣던 수진은 미묘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지금이라도 싹 다 뒤집어야 한다는 생각, 다른 누구의 손이 아닌 자신의 손으로 길을 터야 한다는 생각이 맹렬하게 타올랐다. 외부 세계를 바꿀 수 없다면 내부 세계부터 부수고 볼 일이었다. 기쁨이든 열망이든 없으면 없는 대로 살겠지만 서글픈 시금치는 되지 않겠다는 예상치 못한 다짐이 날카롭게 정수리를 때렸다. 

   그러나 밀려드는 온갖 감정에 젖어 들 여유도 없이 수진은 고무장갑을 끼고 접시 조각을 치워야 했다. 시계를 보니 9시 40분이었다. 아직 열 시도 되지 않았다니. 변덕스럽게도 절망스러운 기분이 되었다가 백영해가 가져온 야채를 다 다듬지도 못했는데 곧 점심시간이 될 거라는 생각에 마음이 바빠졌다. 그렇게 생각기가 무섭게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너덧 명은 되어 보이는 발소리. 설마. 환청이겠지. 수진은 기진맥진한 채로 그들을 돌려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음을 잘 알았고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바로 그때, 계단의 디딤판에 있는 거뭇한 자국이 눈에 띄었다. 백영해가 담뱃불을 끄면서 재미 삼아 만든 동그라미 모양인 듯했다. 수진의 눈에 동그란 도넛처럼 보이던 담배빵은 곧 반지 모양으로 바뀌었고 수진은 흠칫 놀라면서도 주머니에 있는 반지를 꺼내어 손바닥 위에 올렸다. 

   조그맣고 반짝이는 이 작은 물건이···. 

   수진은 다각도로 굴절되어 뿜어져 나가는 무지갯빛 섬광을 가만히 손안에 가두었다가 손가락을 쫙 펴서 반지를 끼웠다. 약지에서는 헐렁하게 돌았지만 가운데 손가락에는 딱 맞았다. ■


by @Hyejin_talented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