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 경영혁신학회 30기 박준형
“그만 넣어주셔도 됩니다.” 집 앞에 쌓여가는 신문을 보며 어딘지 불편한 마음을 느껴본 적 있을 것이다. 흐릿한 기억 속에서 2교시 종이 울리고 나면 책상 위에 놓여지던 급식 우유 역시 마찬가지이다. 다음,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로 주제를 옮겨보자. 월 9,500원만 지불하면 5,000편에 가까운 콘텐츠를 무제한으로 스트리밍할 수 있는 “Netflix”, 비슷한 금액에 내가 좋아하는 아티스트의 노래를 원할 때마다 들을 수 있는 “Spotify”도 있다. 제공되는 재화·서비스의 성격부터 소비자들의 인식까지 어느 것 하나 접점이 없어 보이는 사례들이지만 놀랍게도 이들은 모두 동일한 비즈니스 모델을 채택하고 있다. 바로 ‘구독경제’이다. 구독경제란 소비자가 일정 금액을 지불하고 필요한 제품이나 서비스를 주기적·지속적으로 제공 받는 방식을 의미한다. 고전적 의미의 소유에 집착하기보다는 본인의 취향에 기반하여 다양한 물건과 서비스를 경험하고자 하는 MZ세대의 성격을 떠올려본다면 구독 경제가 받는 스포트라이트가 조금은 이해가 갈 것이다 . 특히 구독 경제는 코로나 사태로 인해 자리잡은 언택트 소비문화로 인해 그 성장세가 가팔라지고 있는데, 한국무역 협회 발표에 의하면 구독 기반 글로벌 전자상거래 시장은 2018년 132억 달러에서 2025년 4,728억 달러로 매년 70% 가량 성장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바야흐로, 소유와 공유의 시대를 지나 구독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한편, 구독 경제하면 막연하게 기술의 첨단을 떠올리게 되는 사람들을 위하여, 여기 전통과 혁신을 결합시킨 색다른 구독 경제 기업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우리나라의 음주 문화하면 가장 연상되는 주종은 무엇인가? 아마 많은 이들이 초록색 병에 담긴 투명한 액체를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소주(엄밀히 말하자면 ‘희석식 소주’)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술이라고 부르기에는 아쉬운 부분이 많다. 우리나라에 희석식 소주가 최초로 도입된 것은 19세기 말엽으로 알려져 있는데, 동아시아 최초로 주정 생산에 성공한 일본이 조선에 들여온 것이 저렴한 가격을 앞세워 주류 시장을 장악한 것이다. 이후 20세기 일제강점기와 전란을 겪으며 쌀로 빚은 전통주가 주춤하게 되며 타피오카 등 전분으로 만들어진 희석식 소주는 국민들에게 가장 접근성이 좋은 술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결국 우리가 지금 손에 들고 있는 초록색 병은 우리 선조들이 즐기던 술과는 사뭇 다르다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를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술은 무엇인가? 유구한 주조 역사를 통해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쌀과 누룩으로 만들어 얕게 거른 우윳빛의 ‘탁주’, 탁주를 다시 여과시켜 만든 달짝지근하고 고소한 맑은 ‘약주’, 탁주와 약주를 증류시킨 ‘증류주’와 같은 다양한 종류의 전통주들이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현재 2,000종이 넘는 전통주가 국내 시장에서 유통되고 있지만 2019년 기준 전통주의 시장 점유율은 0.27%로 소주(25.35%)나 맥주(58.75%)에 크게 뒤처진다. ‘술담화’는 바로 이러한 안타까운 현실을 바꿔보기 위하여 등장하였다.
술담화는 ‘이 세상의 술자리를 다채롭게 만들자’라는 비전하에 2018년 설립된 전통주 구독 서비스이다. 월 39,000원에 ‘담화 박스’ 서비스를 구독하게 되면 엄선된 2~4병의 전통주를 달마다 집 앞으로 배송받아 볼 수 있다. 이러한 구독 모델을 통해 술담화는 안정적인 수익과 고객 충성도를 확보할 수 있고, 구독자는 개별 판매 단가에 비하여 15%가량 저렴한 가격에 양질의 전통주를 만나볼 수 있다. 그러나 술담화는 단순히 ‘술 그 자체’를 배송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담화 박스’ 구독자는 배송된 술의 특징, 페어링 정보, 향미, 칵테일 레시피, 양조장의 역사 등 다양한 정보를 담은 큐레이션 카드를 같이 받아보게 된다. 이 큐레이션 카드는 술담화의 자체 제작 콘텐츠로서 전통주를 처음 접할수도 있는 구독자가 자신의 기호를 파악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결국 제품에 스토리텔링과 긍정적인 경험을 더한 것이 술담화의 차별화 지점이다. 사명이 술 + 담화(談話)인 이유도 조금은 이해가 갈 것이다. 이런 술담화의 비즈니스 모델에 대한 시장의 반응은 꽤나 뜨겁다. 창업 3년 차에 접어든 2021년 3월 기준 정기 구독자 수는 1만명을 돌파하였고, 월 매출 4억원(연 매출 50억원)을 기록하는 등 성장을 이어가고 있다. 더하여, 80%를 상회하는 재구독률에서 소비자들의 긍정적인 반응을 읽어 볼 수 있다.
백문이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 아니 백문이불여일음(百聞不如一飮)이다. 술담화의 경쟁력을 직접 확인해보기 위하여 9월 담화박스를 구매해보았다. 깔끔한 디자인의 박스 속에는 <안동소주 일품 40>, <백련 미스티>, <계룡백일주> 총 3병의 전통주가 들어 있었는데, 각각의 시중 판매가는 25,650원, 4,500원, 15,700원(계룡백일주 700ml 상품 가격을 용량기준 배분)으로 도합 45,850원이다. 담화박스의 1달 구독료는 39,000원와 단순 비교하였을 때 시중 판매가의 85.05%에 전통주를 즐길 수 있는 것이다. 큐레이팅 카드 역시 기대 이상이었는데, 보도되었던 내용들 외에도 음용하기 적정한 온도와 보관 방법 등 세심한 부분까지 기재되어 있어 꽤나 공들여 만들었음을 알 수 있었다. 카드에 적힌 내용과 나의 느낌을 비교하며 맛보는 재미는 덤이다.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필자의 경우 약간의 선물을 열어보는 듯한 기분을 받을 수 있다는 점 역시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싶다. 그리고 무엇보다 맛이 좋다.
필자는 술담화의 비즈니스 모델이 해외에서도 충분히 경쟁력을 지닐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구독 모델이 지니는 강점이나 양질의(혹은 새로운) 주류에 대한 욕구는 국가 간 경계를 초월하여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의 시장 환경을 고려해 보았을 때 미국 시장으로의 진출이 특히 매력적인 선택지로 여겨지는데,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북미 주류 전자 상거래 시장의 성장
코로나 확산 이후 하강 국면에 접어든 여타 산업과 다르게 주류 시장은 예상 밖의 호황을 맞이하고 있다. 주류 전문 시장 조사업체 IWSR에 따르면, 2020년 미국 주류 섭취량은 전년 대비 2% 증가하며 2002년 이후 최대의 증가폭을 보였다. 물론 호텔과 레스토랑 등 영업소에서의 on-trade 부분에서의 매출은 감소하였으나 off-trade 시장의 확대가 이를 상충한 것이다. 더하여, 2019년부터 2020년 사이 미국의 주류 전자 상거래 시장은 80%의 성장률을 보였는데 이는 일시적인 현상에 그치지 않고 2021년 말에는 중국을 추월하여 세계 최대 규모를 달성할 것으로 예상된다. 온라인 주류 구매 경험이 있는 미국 소비자 중 44%가 2020년 처음 거래를 시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처럼 아직 성숙되기 이전의 시장에서는 '술담화'와 같은 niche player에게 역시 기회가 주어질 수 잇을 것이다.
(2) 우호적인 주류 시장 규제
주류 유통업자에게 가장 큰 걸림돌은 관련 시장 규제이다. 국내 법제를 살펴보더라도,「주류의 통신판매에 관한 명령위임 고시」에 의하여 주류 통신 판매업자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지역특산주를 포함한 전통주를 판매하거나 영업장에서 소비자에게 상품을 직접 인도할 것이 요구된다. 이 때문에 O2O(Online to Offline)와 같은 변칙적인 사업 모델이 등장하게 된것이다. 이러한 규제의 측면에서 보자면 미국의 시장이 오히려 더 우호적일 수 있다. 코로나 여파로 인해 대부분의 주들에서 D2C(Direct to Customer)방식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고 있으며, 워싱턴 D.C, 뉴햄프셔, 플로리다, 하와이, 켄터키 등 일부 주에서는 모든 주종에 대하여 직접 배송이 허용된 상황이다. 이런 배경으로 미국의 경우 D2C 모델을 활용한 주류 거래 역시 2024년까지 연평균 24%의 성장률을 보일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3) 문화적 요소
미국의 주류 사랑은 코로나 이후 촉발된 특이한 현상이 아니다. IWSR의 Brandy Rand에 의하면 코로나 이전에도 이미 미국 내 주류 소비의 80%가 가정에서 이루어지고 있었고,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하여 음식과 함께 간단한 술을 대접하는 파티 문화가 정착되어 있을 정도로 미국인들은 ‘홈술’에 익숙하다. 더하여 미국은 한국에 대하여 가장 우호적 인식을 지닌 국가 중 하나이다. 또한 미국은 한국 문화를 가장 빈번하게 접하고 있는 국가 중 하나이다. 특히, 지난 7월 26일 기준 넷플릭스 북미 스트리밍 순위 8위에 오른 '킹덤:아신전'의 흥행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킹덤과 전통주가 무슨 상관이냐며 고개가 갸우뚱 해질 수 있지만, 킹덤의 유행이 우리나라의 전통 의복인 '갓'의 유행을 이끌었다는 점을 떠올려 본다면, 한국 콘텐츠에 대한 관심이 한국 전통 문화에 대한 관심으로 연계될 가능성을 점쳐볼 수 있을 것이다. 2,000여 종이 넘는 전통주의 '전통'과 혁신적인 '구독' 모델을 결합시킨 술담화의 차별화 지점은, 이러한 측면에서, 보편적인 주종(소주, 맥주)에 비하여 다소간의 이점을 가져갈 수 있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복기해 본다면, 술담화가 당장이라도 비행기표를 알아봐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혹은 그랬으면 좋겠다). 그럼 이제, 필자가 만약 술담화를 싸들고 미국으로 넘어간다면 이렇게 하겠노라 싶은 몇가지 제안을 건네며 글을 마치고자 한다.
(1)고급화 전략
국내 영업에서 술담화는 시가에 비하여 저렴한 가격을 마케팅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미국 시장에서도 꼭 이와 같이 가격 경쟁력을 강조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국내에서 운영 중인 와인 추천 업체 '퍼플독'은 술담화와 동일한 39,000원부터 100만원까지 멤버쉽 금액을 달리하여 서비스를 제공 중이다. 결국 콘텐츠(주류)의 경쟁력만 확보된다면 서비스의 금액은 생각만큼 핵심적인 요소가 아닌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미국보다 긴 역사를 지닌 2,000여 종의 전통주는 확실한 강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 국내 서비스에서는 가격 부담때문에 선정하지 못하였던 고가의 전통주 위주로 상품을 구성하는 고급화 전략, 혹은 금액에 따라 서비스의 등급을 나누어 제공하는 방식 역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2)현지 유통업자들과의 협업
기본적으로 미국의 주류 산업은 3 tier 시스템을 채택하고 있다. producer(importer)가 distributor에게 1차적으로 상품을 넘긴 이후 다시 retailer를 거쳐야만 소비자에게 상품을 판매할 수 있다. 결국 술담화가 미국에 진출하게 된다면 직접적인 유통을 담당하기 보다는 주류 선별이나 큐레이팅 콘텐츠 제작에 집중하게 될 가능성이 더 크다고 여겨진다. 일반적으로 규모의 예측이 어렵거나 너무 niche한 시장에 대해서는 수출입이 원활하게 이루어지기 어렵지만, 술담화가 채택한 구독 모델은 이러한 물량의 불확실성을 어느 정도 해소시켜줄 수 있다. 이러한 점에 더하여, 전통주의 품질과 다양성을 어필한다면 미국 retailer들이 아직은 미성숙한 시장에 진출하도록 설득할 수 있을 것이다.
(3)탁주보다는 약주와 증류주에 집중
주류는 일반적으로 유통기한 문제나 변질에 대한 걱정이 덜한 상품이지만 탁주는 예외이다. 술담화 사이트에 올라와 있는 상품들의 유통기한을 확인해본 결과 탁주는 짧게는 20일에서 길게는 3개월 정도의 분포를 보였고(일부 살균탁주의 경우 1년), 약주는 이보다 긴 1년 내외 정도의 유통기한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증류주의 경우 별도의 유통기한이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월 단위로 배송이 이루어지는 구독 모델의 특징이나 주류 소비가 즉각적으로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위험을 부담하면서까지 탁주의 비중을 높게 가져갈 필요는 없을 것이다. 짧게 덧붙이자면, 담화박스에서 추천 받은 3종의 주류를 맛본 결과 시큼한 맛과 걸쭉한 목넘김의 탁주보다는 깔끔한 고도수의 주류가 서양인들에게는 더 익숙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은 막걸리를 처음 맛본 영국인의 반응인데, 자막을 한번 유심히 살펴봐주길 바란다. 증류주의 경우 서구권 문화에서 즐겨마시는 진이나 보드카와 같은 주종과 유사성을 지닐 수 있고, 약주 역시 일종의 허브 리큐르와 유사한 향미를 풍긴다는 점에서 서양인의 기호에 부합할 수 있다.
필자는 술담화에게 펼쳐질 청사진을 이야기했지만, 어쩌면 이는 전통주가 더 널리 알려졌으면 하는 개인적인 바람이 투사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일례로, 활성화된 미국의 주류 시장은 술담화에게 기회로 작용할 수 있음과 동시에 극복해야할 난관을 부여한다. 세계 최고 규모의 시장에서는 언제나 각국의 내로라하는 상품들이 각축전을 벌이기 마련이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전통주라는 콘텐츠가 지니는 경쟁력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는 객관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산개된 인구 분포로 인하여 구독 모델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비판 역시 타당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여전히 술담화에게 응원의 말을 건네고 싶다. 수익성이나 사업의 용이성을 기준으로 생각한다면, 국내에서 막걸리를 대량생산하여 일본에 수출하는 것이 최적의 전략일 수 있으며, 더 극단적으로는 술담화의 대표와 같이 전통주의 세계화를 입에 담는 것은 금기시되어야 할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려운길을 고집하는 사람들에게서만 비춰지는 묘한 매력이 있지 않는가. 술담화 역시 그러한 부류 중 하나라 생각한다. 본인만의 뚜렷한 가치를 바탕으로 혁신을 일궈내고자 하는 술담화의 사업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설 수 있기를 바라며 이만 마치고자 한다.
연세대 경영 박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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