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직계비속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연기군 Mar 13. 2021

이불비행기

  몇 년 전, 차가 생겼다. 아버지가 차를 바꾸시면서 11년 된 헌 차가 생겼다. 주차할 공간은 마땅치 않았지만 일단 서울로 끌고 왔다. 지난겨울 아이를 데리고 소아과, 응급실, 모임을 나갈 때마다 겪었던 불편함을 다시 재생하고 싶지 않았다. 명절마다 차를 렌트하고 반납하는 불편도 해결될 터였다.    

 

2017년 봄, 담양 □□펜션

  차를 받자마자 휴가를 내고 담양으로 놀러 갔다. 본토의 떡갈비가 궁금했다. 방송에서만 봤던, 뼈에 붙여 나온다는 본고장의 떡갈비는 어떻게 다른지 알고 싶었다. 갓 돌이 지난 아이를 데리고 이곳저곳 다녔다. 죽녹원에 가보고 근처 창평의 삼지내마을도 가보고 대나무박물관에도 갔다. 아이는 생각보다 잘 걸어 다녔다. 잔뜩 신기한 눈으로 곳곳을 뛰어다녔다. 

  숙소로 돌아와 씻기고, 씻고 나니 한적해졌다. 방바닥에 이불을 펴는데 그 위로 아이가 굴러왔다. 아내와 함께 이불의 네 귀를 잡아 들어 올렸다. 꽃무늬로 가득한 핑크색 이불을 좌우로 합을 맞춰 흔들었다. 이불 위에서 어리둥절했던 아이는 이내 좋아했다. 해먹처럼 출렁이는 이불 위에서 공중에 뜬 상태로 아이는 한참을 날아다녔다. 담양에서 지낸 시간 중에 가장 행복한 모습이었다.   


2017년 초여름, 속초 △△관광호텔

  회사가 (어떤 일로) 망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휴가에 관대해지더니 급기야 권장휴가를 남발했다. 졸지에 어린이날 전후로 긴 연휴가 생겼다. 걱정은 나중에 하자는 생각으로 속초로 향했다. 서울-양양 고속도로 개통 전이라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그래도 연휴가 길어서 큰 문제는 아니었다. 남들 일하는 날에 놀러 다니니 기분이 상쾌해졌다. 곧 남들 일하는 시간에 하릴없이 놀게 될지도 몰랐지만 일단 신경 쓰지 않고 놀았다. 팀장이 추천한 횟집, 신뢰하는 블로거의 단골 생태탕, 모든 사람들이 속초에 가면 퀘스트처럼 사 먹는 닭강정까지 만족스러웠다. 

  속초해수욕장 근처에 있는 숙소는 오래됐지만 객실이 넓었다. 아이가 어려 온돌방을 택했더니 침대가 빠진 자리가 더 넓게 보였다. 아이는 담양에서의 기억이 강렬했는지 아예 이불 위에 자리를 잡았다. 머물던 3일 동안 저녁마다 아이를 이불에 태워 날아다녔다. 나중에는 힘이 들어 바닥에 놓고 질질 끌고 다녔다.     


  살고 있던 집에서는 이불비행기를 해줄 수 없었다. 취직을 하고 얻었던 12평 투룸에서 결혼까지는 괜찮겠다 생각했지만 아이까지 낳아 기를 줄은 몰랐다. 짐이 점점 많아졌다. 작은방에는 옷, 이불, 책, 장난감들이 빈틈없이 맞춘 테트리스처럼 쌓였고 베란다에는 세탁기, 보일러, 휴지, 청소기, 빨래건조대 등 온갖 잡동사니가 모였다. 거실이라고 부르기 민망한 주방에는 겨우 냉장고가 하나 들어갔고 작은 밥상을 펴면 간신히 앉을자리가, 밥상을 접으면 간신히 누울 정도의 공간이 생겼다. 안방은 최대한 아이를 위해 공간을 확보해보려 했지만 겨우 셋이 잘 수 있는 수준이었다. 이불비행기가 이륙하고 비행할 곳이 없었다. (아내에게 미안하지만 이 집에서 둘째가 두 돌이 될 때까지 지냈다.)      

 

2019년 여름, 완도 ○○리조트

  이불비행기 승객이 두 명으로 늘었다. 이불 한 채에서 같이 타는 건 무척 무거워서 따로 탑승할 것을 권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승객은 합승을 원했다. 와이프와 낑낑거리며 몇 번 흔들었지만 고객만족은 쉽지 않았다. 

  다섯 시간 반을 운전해 도착한 완도의 리조트는 시골 인심만큼이나 넓었다. 동아리 엠티를 와도 괜찮을 정도였다. 화장실이 우리 집 안방 사이즈와 비슷해 보였다. 그래서 이불비행기 기장으로서 노선을 바꿨다. 이불 위에 자식 둘을 태우고 숙소의 방과 거실을 오가며 끌고 다녔다. 고객만족 점수는 다행히 회복됐다.  

 

2020년 봄, 우리 집

  퇴근을 했다. 거실로 큰아이가 이불을 질질 끌고 나왔다. 비행기를 태워달란다. 각자 다른 일을 하던 아내와 나는 반복되는 첫째의 성화에 못 이겨 양손으로 이불의 네 귀를 잡았다. 소식을 들은 둘째가 장난 감방에서 뛰어나왔다. 부부의 악력이 떨어질 때까지 두 아이는 이불 위에서 중심도 잡지 못하고 즐거워하며 좌우로 흔들렸다. 지난겨울 이사한 새로운 집에서는 어디로 놀러 가지 않고도 이불로 비행기를 태워줄 수 있게 됐다.       


2020년 가을

  육아여행의 성지, 괌이라도 가보려고 매달 10만 원씩 하던 적금이 만기가 됐다. 하지만 괌은커녕 비행기조차 타볼 수 없는 코로나 시국이 기약 없이 이어졌다. 이런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첫째는 유튜브 ‘라임튜브’를 탐독하더니 얼마 전부터 진짜 비행기를 타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다. 적금으로 마통을 해결할 수도 있었지만 에라 모르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제주도 항공권을 끊었다. 역병이 창궐하는 이 시국에 제주도라니. 범법자가 된 기분이었지만 그럼에도 항공권을 샀으니 김포공항으로 갔다. 바글바글했다. 죄책감이 조금 줄어들었다. 수속을 마치고 탑승장 벤치에 앉아 창밖을 보니 아이들이 탈 하늘색 비행기가 보였다. 


“저기 하늘색 비행기가 우리가 탈 비행기야. 엄청 재미있겠지?”


  첫째와 둘째는 쪼로로 달려가 창문에 코가 닿을 정도로 바짝 붙어 섰다. 아이들은 이불이 아니라 이제 진짜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변한 자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