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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기군 Mar 13. 2021

변한 자매

강촌 엘리시안으로 회사 전 직원 워크샵을 왔다. 벌써 5년 가까이 지난 이야기다. 여유롭게 오후에 도착해 시작한 워크샵 첫날은 외부 강사의 특강과 부서별 업무공유, 저녁식사로 진행된다고 한다. 도대체 워크샵을 왜 하는지 궁금해하는 대부분의 직원들과 워크샵을 언제 하는지 궁금한 일부 임원들이 같은 디자인, 같은 브랜드의 등산복 바람막이를 입고 강당에 모였다. 경제전망을 주제로 모 대학 교수님의 강연이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팀장은 나를 포함한 팀원들을 로비로 호출했다. B 일간지의 출입기자가 급하게 기사 작성용 데이터를 요청한다고 했다. 팀장은 워크샵에 와서까지 일을 주는 것을 미안해했지만 나와 팀원들은 이미 예상했다는 표정으로 리조트 로비에 철퍼덕 앉아 노트북을 펼쳤다. 팀원들은 합이 좋았다. 매일 하는 일이 기획기사 작성이라 그런지 자료 포맷 구성, 역할 분담, 자료조사, 취합, 송고까지 두 시간 만에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기자가 요청한 데드라인도 잘 지켜냈다. 다만 마무리를 위해 담당기자와 기사 마감시간까지 계속 카톡으로 연락을 해야 했는데 선임인 내가 맡았다.   


간신히 만찬 시간까지 일을 마치고 식당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테이블 위에 가득 놓인 클라우드 맥주를 겨우 한 캔 땄는데 카톡이 다시 서너 번 투두둑 울렸다.

“A 씨, 그 기자가 아직도 안 끝났대? 적당히 좀 하라고 해. 우리 워크샵이라고 해.”

맞은편에 앉은 옆팀 팀장이 나 대신 기자에게 핀잔을 주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뇨, 집사람 카톡인데 드디어 애가 똥을 쌌대요. 변비가 심해서 일주일이 넘었거든요.]

반 박자 틈을 두고 놀란 옆팀 팀장은 웃는 낯으로 맥주캔을 들며 건배를 외쳤다.

“자자 건배해. 축하해줘. A 씨 애가 드디어 똥을 쌌대!”


옆팀 팀장은 웃었지만 정말 아이의 변비는 우리 부부의 당면과제였다. 돌도 안된 아기가 일주일에 한 번 꼴로 대변을 보니 초보 부모는 그조차 큰 걱정거리였다. 푸룬주스도 먹여보고 변비에 좋다는 일은 여러 가지 해봤지만 딱히 ‘이거다!’하는 방법은 없는 상황이었다.     


건배를 하고 맥주를 한 모금씩 넘기자 테이블 주변에 앉은 선배들이 돌아가며 한 마디씩 거들기 시작했다. 자기 애도 어릴 때 변비로 고생했다. 뭘 먹였는데 그게 도움이 됐던 것 같다. 어라, 우리 집 작은애도 하도 똥을 못 싸서 고민이 많았다. 그런데 좀 크니까 괜찮아지더라... 


저마다의 경험을 고백하며 테이블이 갑자기 자식 변비 해결 간증의 현장이 됐다. 맛있는 뷔페를 앞에 두고 똥 얘기라니... 죄인이 된 듯한 죄책감을 느끼며 열심히 듣고 나니 결론이 한 방향으로 수렴됐다. 

“많은 아기들이 변비로 고생한다. 그런데 크고 나면 저절로 괜찮아지더라.”     


워크샵을 다녀오고 일 년쯤 지나 퇴사를 하게 됐다. 인수인계를 하고, 업무파일도 정리하고, 법인카드를 반납하고, 책상도 정리하고 마지막으로 전화를 들어 한 가지 남은 중요한 일을 처리했다. 한국야쿠르트 정기배송을 끊는 일이었다. ‘야쿠르트 아줌마’가 매일 책상에 가져다주시던 발효유 ‘세븐’(찾아보니 ‘메치니코프’로 바뀐 것 같다. 퇴사가 생각보다 훨씬 오래된 일이라는 사실을 느낀다.)을 더 이상 먹지 못하게 된 것이다. 사실 나도 대학시절까지 화장실 가는 일이 불규칙했다. 훈련소에서는 2주까지 가지 않은 일도 있었다. 이렇게 보니 우리 아이가 일주일 넘기는 것은 애교처럼 보인다.      


그러던 중 취업을 했고, 매일 출근하는 생활이 시작됐으니 아침에 뭐라도 먹어보자는 생각에 야쿠르트 배달을 신청했다. 배달을 신청한 다음날부터 6년이 지난 퇴사일까지 ‘야쿠르트 아줌마’는 한 번도 발효유를 빼먹지 않고 책상에 올려주셨다. 휴가라도 가실 때는 다른 분이 대신 배달을 해주셨다. 발효유의 효과였을까... 주 2~3회 수준이던 화장실 방문 빈도가 점점 늘어나 발효유 배달 빈도에 가깝게 수렴하는 변화가 찾아왔다. 20년 넘게 유지되던 패턴이 변한 것이다. 가까이 지내는 친구는 발효유가 아니라 음주와 과식 때문이라고 원인을 해석했지만 인생의 중요한 변화인 것은 분명했다.  

 

지난겨울, 크리스마스를 맞아 아이들과 고향에 갔다. 6살 첫째는 그때 그 워크샵처럼 여전히 변비와 싸우고 있었다. 8일째 변이 오는 소식도 없이 천방지축으로 뛰어놀았다. 이제 여기에 둘째도 가세했다. 언니보다는 사정이 좋아서 7일째 소식 없었다. 둘째 역시 언니를 따라 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녔다. 고향에서 지낸 이틀 동안 나와 아내가 아이들에게 말한 단어가 100개라면 그중 적어도 50개는 “똥 좀 싸”, “똥 안 마려워?”였던 것 같다. 지켜보던 할머니도 ‘똥’ 걱정에 합세했다. 그때마다 아이들은 이렇게 컨디션이 좋은데 무슨 얘기냐는 표정으로 우리를 지나쳐 뛰어갔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 세 시간 가까운 시간 동안 아이들이 평소와 다르게 너무나 조용했다. 수상한 기운이 감돈다. 집에 오자마자 첫째와 둘째는 각자 화장실에 자리를 잡았다. 보조 계단에 발을 딛고 스쿼트 자세로 집중을 시작한 아이들은 시뻘건 얼굴로 에너지를 모았다. 그리고 잠시 후 박수를 쳤다. ‘똥’을 쌌다. 첫째는 열흘 만에, 둘째는 9일 만에! (아내는 안도의 표정과 함께 배변 전용 달력에 동그라미 두 개를 그렸다)     


밤 10시가 넘었지만 기쁜 마음으로 두 아이를 품에 안고 페이스톡 버튼을 누른다. 화면 너머로 나타난 할머니가 대뜸 묻는다. “똥 쌌어?” 

“네!”라고 동시에 대답한 아이들은 다시 동시에 장난감을 가지러 뛰어갔다.   

  

무엇이 필요한 것일까. 어른이 될 때까지의 시간이 필요한가. ‘야쿠르트 아줌마’처럼 특별한 계기가 필요한가. 아니면 식습관이 문제일까. 뾰족한 해답은 없지만 아이들에게도 언젠가 문제가 해소되는 날이 찾아오지 않을까. 그래도 자주 변했으면 좋겠다 얘들아. 미소만 변하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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