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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기군 Mar 24. 2021

식세기 찬가

[식기세척기, Dishwasher] 식기 세척을 위생적, 능률적으로 하는 기기. (중략) 한국은 식기 형상이 여러 가지이기 때문에 식기를 넣는 방법상 성능이 떨어지고, 쌀을 주식으로 하는 식생활로 전분질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 이유 등으로 개발이 뒤떨어지고 있다.(출처 : 두산백과)     


재작년, 새집으로 이사를 하며 야심 차게 여러 가전을 구입했다. 김치냉장고, 건조기, 에어컨, TV 그리고 식기세척기. 그중 식기세척기의 경우 과연 이 물건이 필요한지 잠시 궁금했지만 아내의 말에 토를 달지 않고 LG베스트샵에서 세트로 질렀다. 전용 신용카드까지 만들어 포인트도 쌓고 알차게 구입했다. 


식기세척기를 설치하고 익숙해지기까지 꽤 시간이 걸렸다. 식기세척기의 초반 인상은 이랬다.      


복잡하더라. 먼저 싱크대 전문 기사분이 방문해 싱크대 옆 서랍장 한 칸을 뜯어냈다. 커팅 몇 번으로 한 칸이 쑥 빠졌다. 이후 식기세척기 설치 기사님이 방문해 수도를 연결하고 제품을 설치하는 순서였다. 빼놓은 서랍장 한 칸을 폐기하는 게 생각지 못한 숙제였다.     


신기하더라. 서랍장을 한 칸 비운 자리에 식기세척기가 오차 없이 딱 들어갔다. 아내 얘기로는 최근 입주하는 아파트는 모두 식기세척기 설치를 고려해 기기 규격에 맞게 싱크대 수납장이 제작된다고 했다. 식기세척기에 수납장 사이즈를 맞췄는지 반대로 수납장 사이즈에 기기 사이즈를 맞춘 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둘이 딱 들어맞았다.     


궁금하더라. 지식백과에도 적혀있지만 반찬통, 국그릇, 냄비 등 이런저런 모양의 설거지가 제대로 될지 궁금했다. LG 매장에서도, 아내로부터도 설명을 들었지만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제 1년 조금 넘게 식기세척기를 사용했다. ‘내돈내산’의 입장에서 장점과 단점을 나누면 이렇다. 장점부터 알아보자.


먼저 당연한 이야기지만 설거지 시간이 단축됐다. 세탁기, 건조기, 압력밥솥처럼 가정에서 문명의 이기를 사용하는 주된 목적은 가사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듯 식기세척기도 가사노동의 상당 부분을 대신해줬다. 물론 설거지 시간이 0으로 수렴하는 것은 아니지만 따져보자면 대략 1시간 하던 것이 20분 이내로 줄어들었다. 덕분에 아이들 목욕을 시킬 시간, 유튜브를 조금 더 볼 수 있는 시간이 생겼다.      


이어서 귀찮은 설거지를 기계가 대신하게 됐다. 다양한 설거지 대상 중 특별히 귀찮고 시간도 오래 걸리고 손도 많이 가는 것들이 있다. 나의 경우는 락앤락이 그렇다. 네모난 락앤락 반찬용기, 이리저리 닦기 귀찮은 주전자, 텀블러 등 손이 많이 가는 설거지는 식기세척기에 맡기고 있다. 설거지 양이 많더라도 국그릇, 밥그릇처럼 설거지가 편한 용기만 손으로 하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물건은 하지 않아도 된다. 심지어 스팀살균과 건조까지 되니 점점 식기세척기 의존형 인간이 되고 있다.

     

덧붙여 아이들의 컵 접근성이 높아졌다. 주로 컵은 높은 찬장에 놓게 되는데 아이들이 컵을 쓸 때마다 아내나 내가 직접 꺼내 줘야 했다. 식기세척기를 쓰기 시작한 후로 아이들이 식기세척기 두 번째 칸에 항상 컵을 놓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이제는 더 이상 컵을 달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직접 트레이를 당겨 컵을 가져다 물을 따라 마시고 있다. 덕분에 부모를 귀찮게 하지 않는 사회적 인간으로 한 뼘 더 자랐다.


물론 빛 뒤에는 그림자도 있기 마련이다. 그림자가 얼마나 진한지는 모르겠지만 생각나는 단점은 다음과 같다.     


애벌 설거지가 필요하다. 앞서 지식백과에서도 ‘쌀을 주식으로 하는 식생활로 전분질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 이유’로 개발과 보급이 서양에 비해 늦었다고 했는데 정말 그랬다. 식사 후 바로 물에 담가 불리면 상관없지만 혹시라도 소홀해진다면 밥그릇에 말라붙은 밥풀, 국그릇에 말라붙은 미역을 수세미로 떨어내고 식기세척기에 가지런히 입장시켜야 한다. 사용 가이드를 충실히 따르자면 그릇에 많이 남은 기름기, 잔여 음식물 등은 가능하면 헹궈서 넣어야 하는데 생각보다 번거로운 일이다.     


또 편리함의 반대급부로 용기 오남용이 증가했다. 특히 컵 남용이 심각해졌다. 이사를 하며 선물 받은 컵, 새로 산 컵, 맥주 6캔 세트를 사면 주는 기념 유리잔 등 수많은 컵들이 생겼는데 항상 쓰려면 컵이 없다. 옷은 많은데 입을 옷이 없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커피를 마시고, 주스를 마시고, 우유를 마시고, 차를 마시고, 맥주를 마시고, 콜라를 마시고, 요구르트를 마시느라 항상 컵이 수북이 쌓인다. 그리고 그 컵들을 오롯이 식기세척기에 맡기고 있다.     


여기에 더해 소소하게는 설거지를 하며 멍 때리는 기회가 줄었다. 그리고 식기세척기용 세제가 일반 설거지용 세제보다 비싸다 보니 경제적으로 타격도 생겼다. 물론 다른 지출이 훨씬 많기 때문에 세제 정도 비싸진 것은 가계부에서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식세기 찬가”라는 뚜렷한 제목을 붙였으니 다시 조금 더 장점을 고민해봤다. 무엇이 있을까. 식기세척기 덕분에 21세기를 살고 있다는 자각을 하게 됐다. 물론 식기세척기가 21세기에 등장한 물건은 아니지만 내게 있어 식기세척기의 유용함은 다른 가전에 비할 바가 되지 못한다. 건조기는 건조대로 대체하면 되고, 10년이 넘는 객지 생활 동안 김치냉장고 없이도 잘 살았다. 무선청소기 대신 여전히 유선청소기로 청소를 하고 있으며 에어컨은 지난여름 며칠 틀지도 않았다. 이렇게 얘기하니 내가 식기세척기에 무척 감명받은 것 같다.

     

또 식기세척기는 내가 ‘회사를 다니면서도 가사를 분담하고 있다’는 셀프 만족감을 고양시켰다. 온갖 집안일도 하며 아이 둘을 키우는 아내에 비해 당연히, 그리고 특별히 집안일을 많이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식기세척기 덕분에 “설거지는 내가 할 테니 앉아 있어.”라는 공치사를 할 수 있게 됐다. 그러면서 오늘은 아이들이 뭘 먹었는지, 많이 먹었는지 거의 안 먹었는지 알게 되기도 한다.      


오늘도 이렇게 식기세척기를 돌려놓고 글을 적고 있다. 안도감을 가져다준 식세기에 감사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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