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도 맨 뒷자리다. 키순으로 자리가 정해지는 학기 초에는 늘 교실 맨 뒷자리에 앉았다. 선생님과 적정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는 자리였다. 좋았다. 선생님의 눈길을 피해 딴짓도 충분히 가능한 자리였으니까.
고등학교 입학 후 첫 수업이 시작되는 날이었다. 앞으로 3년이 중요하고,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너희 인생의 길이 결정된다는 긴 설교가 끝나고 수업이 시작되었다. 칠판에 써 내려가는 선생님의 글씨가 잘 보이지 않았다. 선생님 말씀에 집중해서 들리는 것에 의존하여 필기했다. 이상했다. 내 옆자리에 앉아있는 짝꿍은 달랐다. 칠판에 쓰인 글을 보고 정확하게 옮겨 적었다. 신기했다. 내가 보이지 않는 저 문자를 내 짝은 볼 수 있다는 것이 의아했다.
“너 저 글씨 보여?”
친구에게 물었다.
“당연하지! 왜?”
친구는 당황스러움을 숨기지 못했다.
“아니, 난 안 보이거든. 선생님이 쓴 저 글자들 다 흐릿하게 보여. 근데 넌 어떻게 보이는 거야?”
나의 엉뚱한 질문에 친구는 웃으며 답했다.
“난 렌즈를 꼈으니까 보이지. 렌즈 빼면 안보이긴 하겠지만….”
시력에 이상이 없는 한 잘 보이는 것은 당연했다. 그 당연한 일이 나에게는 당연하지 않았기에 너무 궁금해서 질문을 던졌다. 나의 우스꽝스러운 질문에 진지하게 답해준 짝과 그런 우스운 대화를 들은 내 앞에 앉은 친구의 놀란 표정. 잊을 수 없다. 혼란스러웠다. ‘왜 나만 안 보이는 거지?’ 그때까지도 내가 눈이 나빠서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10살쯤이었던 것 같다. 안경 쓴 친구들이 부러웠다. 엄마에게 거짓말을 했고 안과에서 시력 검사를 받았다.
“세상에서 가장 맑은 눈을 가져서 안경이 필요 없어요.”
의사 선생님의 말씀에 엄마에게 호되게 혼났다. 그 이후로 ‘안경’이라는 단어는 내 입에서 나오기 어려웠다. 그래서였을까. 나에게만 탁하고 흐릿해 보였던 세상은 원래 그러한 줄 알았다.
“엄마, 내 자리에서 칠판 글씨가 잘 안 보여. 근데 내 짝꿍은 잘 보인대.”
이 말을 들은 엄마는 그걸 왜 이제 말하냐며 짜증 섞인 말투로 내일 당장 안과 가야 하니 하교 후 학교 앞에서 만나자 했다. 내 나이 열일곱. 눈이 흐릿해진 것은 내 잘못이 아닌 것을 분명하게 알 나이였다. 그런데도 한참 망설이다 겨우 말했는데 또 꾸중을 들었다.
다음 날 하교 후 안과에 갔다.
“아주 답답했겠네. 답답해서 어떻게 살았대.”
여러 번의 시력 검사 후 의사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그렇게 답답하지는 않았어요.’ 속으로 대답했다. 모든 사람이 이렇게 보인다고 생각했기에 답답할 이유가 없었다. 나의 속마음을 들켰을까. 엄마는 가자미눈으로 나를 흘겨보았다. 뜨끔했다.
그토록 쓰고 싶었지만, 필요 없던 안경이 필요하게 되었다. 세상이 달라 보였다. 건물에 걸린 간판이 또렷하게 보이고 버스 번호가 정확하게 보이는 환희를 느끼는 순간이었다. 어떻게 저 글씨가 보이는 거냐고 물어봤던 내가 부끄러웠다. 친구들의 의아한 표정과 참지 못한 웃음의 의미를 이제야 알아챘다. 안경을 쓰고 친구들을 마주할 생각을 하니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베개에 얼굴을 묻고 두 발을 위아래로 걷어차며 미친 듯이 웃었다.
그랬다. 나는 보이면 보이는 대로 보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대로 별생각 없이 살아가는 답답한 사람이었다. 내가 처한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냥 그런가 보다.’ 하며 아무런 감정 없이 살아가는 것에 익숙했다. 열일곱에도 그랬고 마흔에도 그랬다. 이제는 달라져도 되지 않을까. 나에게만 유독 뿌옇기만 했던 세상이 왜 그랬는지 이제 나도 알고 싶고, 알아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