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독 냄새

봄 - 먼저 스며드는

by 기억을 맡는 사람

다섯 계단을 오르면 항아리들이 먼저 보였다. 둥근 어깨를 맞댄 채 낮은 숨을 고르고 있었다.


나는 그곳에 자주 올랐다. 담 너머 텃밭이 내려다보이고 그 끝으로 논두렁길이 이어졌다. 멀리 교회의 지붕이 흐릿하게 보였다. 장독대 위에서는 빛과 바람이 쉬지 않고 드나들었다.


먼 길 끝에서 작은 버스가 서서히 다가오면 엄마와 함께 집 앞으로 뛰어 내려갔다. 버스는 늘 부옇게 먼지를 끌고 왔다.


항아리 안에서 장은 익어갔다. 소금물 속 메주는 천천히 부풀었다가 가라앉았다. 소금물 위로 숯과 마른 홍고추가 떠 있고 그 아래 메주가 잠겨 있었다. 그 안에서 시간은 소리 없이 쌓이고 있었다. 나도 그 곁에서 까치발을 들고 멀리 더 멀리 내다보았다.


담장 너머로 연둣빛 새순이 땅을 밀어 올리고 있었다. 능선을 따라 구름이 흘러갔다. 항아리 밖으로 흘러나오는 장 냄새가 먼저 계절을 건너왔다.


햇살이 좋은 날이면 장독 뚜껑을 열어 두었다. 무거운 뚜껑을 들어 항아리 옆에 기대어 놓고 둥근 입구에 한지 한 장만 덮어 두었다. 바람이 드나들 때마다 시큼한 간장 냄새와 묵직한 메주 냄새가 천천히 번졌다. 장은 그렇게 햇살과 바람 속에서 익어 갔다.


봄비 내리던 날 나는 장독대에 올랐다. 툭툭툭. 빗물이 항아리 뚜껑을 두드렸다. 똑똑똑. 우산을 타고 흐르는 물방울이 뒤이어 떨어졌다. 흙을 머금은 비 냄새가 또렷하게 올라왔다. 그 아래에 쿰쿰하고 묵직한 장 냄새가 은은하게 맴돌았다. 품에 안겼을 때 맡던 그 냄새와 닮아 있었다.


어느 밤 나는 다시 그곳에 올라섰다. 늦은 아빠를 기다리며 집 앞을 서성이는 할머니를 두고 올라온 밤이었다. 새순이 돋아난 가지 사이로 밤하늘이 드문드문 열려 있었다. 흙빛 항아리들이 밤공기 속에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나는 먼 길 끝을 바라보았다. 풀벌레 소리가 점점 또렷해졌다.


길 끝에 고여 있던 어둠이 조금씩 갈라졌다. 나는 할머니에게로 뛰어 내려갔다.


다섯 계단 위 장독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시간은 조용히 익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