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 먼저 스며드는
처마 아래 달린 고드름이 하나둘 녹아 내렸다. 언 땅은 햇살과 바람에 풀리고 있었다.
햇살이 땅을 간질이던 날 나는 뒤뜰에 쪼그리고 앉았다.
모종삽 끝으로 땅을 찍어 보니 겉은 단단했지만 안쪽은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툭 하고 갈라진 틈 사이로 젖은 나무껍질 냄새가 올라왔다. 겨우내 닫혀 있던 흙이 낮게 숨을 내쉬는 듯했다.
언 땅을 밀어 올린 줄기들이 군데군데 얼굴을 내밀었다. 민들레 몇 송이가 땅 가까이 붙어 노랗게 번져 나갔다. 갈라진 틈새로 개미가 드나들었다. 흙은 조용히 흔들렸다.
운동화 가장자리에 진흙이 묻어났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흙이 달라붙었다. 모종삽과 비닐봉지를 챙겨 텃밭으로 나갔다.
먼 데서 불어온 바람에 나무 냄새가 실려왔다. 나무껍질을 스치고 온 고로쇠 같은 향이었다. 얼었다 풀린 논둑의 그루터기 냄새도 엷게 섞였다. 흙 가까이 몸을 낮추는 순간 다른 냄새들은 가라앉았다. 묵직한 흙내만 남았다.
밭 가장자리에는 잔돌을 쌓아 둔 돌무더기가 있었다. 돌 틈 사이로 비집고 나온 들꽃과 잡초가 줄기를 뻗어 올렸다. 가까이 몸을 낮추자 그 틈에서 눅진한 냄새가 배어 나왔다.
응달진 땅을 모종삽으로 툭툭 찍어 올리자 검은 흙이 둥글게 고였다. 가느다란 실뿌리가 그 속에 얽혀 있었다.
며칠 전 할머니와 엄마가 캐 온 쑥과 냉이가 떠올랐다. 가는 뿌리 끝에 동그랗게 뭉친 흙이 단단히 달라붙어 있었다.
냉이를 닮은 풀에 고개를 숙였다. 알싸한 냄새가 났다. 삽 끝으로 흙을 젖히고 줄기를 잡아당겼다. 뚝 소리와 함께 줄기만 끊어졌다. 더 깊이 파보았지만 뿌리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흙은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차가운 흙이 손톱 밑으로 파고들었다.
흙을 묻힌 채 올라온 어린 쑥잎을 뜯어 비닐에 담았다. 초록 잎과 줄기가 뒤섞였다. 코를 가까이 대자 풋내와 진액 냄새가 올라왔다. 그 안에는 깊은 흙 냄새가 없었다.
멀리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봉지를 뒤집자 잎과 줄기가 땅에 쏟아졌다. 흙 속에는 뿌리가 남아 있었다. 잘린 잎과 줄기를 그 위에 얹고 흙을 덮었다. 손바닥 아래에서 냄새가 낮게 맴돌다 가라앉았다.
뒤뜰 수돗가에서 손을 씻었다. 초록물은 금세 빠졌지만 손끝에는 냄새가 남았다. 그 손을 살며시 주머니에 넣었다.
처마 아래 달렸던 얼음은 사라졌다. 물방울이 스며든 자리마다 여린 잎줄기가 바람에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