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 몸에 머무는
한낮의 열기는 어둠이 찾아든 뒤에도 슬레이트 지붕 아래 뭉근하게 남아 있었다. 낮 동안 데워진 몸을 따라 더운 숨이 목 안에 맺혔다.
부채를 든 할아버지를 따라 집 앞으로 나왔다. 우리는 가게 앞 나무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손에 쥔 부채가 움직일 때마다 면티셔츠가 가볍게 펄럭였다. 티셔츠에 밴 땀 냄새가 더운 공기 속으로 스며들었다. 우리 앞에는 밤의 풀숲과 희미한 가로등이 비추는 길이 길게 놓여 있었다. 우리는 어둠이 스민 곳을 바라보며 말없이 앉아 있었다.
햇볕이 끊임없이 달구던 땅과 벽돌과 나무숲의 열기는 아직 가시지 않았다. 빛이 휘발된 자리에 마른 햇살의 냄새가 남아 있었다. 도로변을 따라 우거진 풀숲에서는 벌레 소리가 점점 짙어졌다. 그림자 아래 고인 열기가 풀잎 끝에 조용히 매달려 있었다. 흰 나방들은 불빛 아래를 홀린 듯 맴돌았다.
가로등 불빛 너머 산은 어둠을 안은 채 말없이 둘러서 있었다. 나는 건너편 어둠을 한참 바라보았다. 동화책에서 봤던 무언가가 어둠 속에서 불쑥 나타날 것만 같았다.
체온에 데워진 나무의자에서 일어나 풀숲으로 다가갔다. 앵두나무 아래 봉숭아와 잡초가 뒤섞여 진한 풀내음을 뿜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곤충과 식물은 낮보다 더 분주했다. 나는 그 앞에 우두커니 섰다. 그림자들이 한데 겹쳐 음영을 더하자 풀숲의 소리와 냄새는 한층 더 짙어졌다.
부채를 접은 할아버지가 의자에서 일어섰다. 간간이 불던 바람도 멎었다. 그 뒤를 따라 나도 집 안으로 들어갔다.
할머니는 툇마루에 나를 앉히고 낮에 따 둔 봉숭아 꽃잎을 짓찧었다. 싱긋한 향이 우리 주위를 가득 맴돌았다. 붉은 꽃잎 조각이 고인 그 위에 백반을 조금 섞었다. 잘 섞인 꽃잎을 조금 떼어 동그란 손톱 위에 올렸다. 손끝에 퍼지는 시원함과 함께 싱그러운 냄새가 몸에 서서히 배어들었다. 열 손가락 하나하나에 꽃잎을 얹고 투명한 비닐로 감싼 뒤 흰 실로 살짝 동여맸다. 고개를 숙인 할머니는 말없이 내 손가락을 매만졌다. 그 손길과 냄새 속에서 눈꺼풀이 천천히 감겼다.
긴 여름밤 봉숭아 꽃 향기가 내 곁을 오래 맴돌았다. 동그란 손톱 위로 진분홍빛이 스며들었다. 그 밤의 냄새가 어디까지 따라올지 모른 채 나는 잠이 들었다.
그날 밤 꿈속에서 나는 길게 펼쳐진 여름 숲을 마음껏 헤맸다. 짙은 어둠 속에서도 손끝의 분홍빛만은 또렷했다. 나는 그 빛을 꼭 쥔 채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