ㅣ한 번도 식은 적 없는 것들
해가 산 뒤로 사라졌다.
어둠이 골목 끝에 앉아 저녁이 되었다.
오늘도 엄마는 오지 않았다. 나를 데리러.
“에이... 오늘도 엄마 안 왔네.”
“그려~ 엄마는 열밤만 더 자고 온디야.”
“우리 엄마한테 전화해 주세요.”
자기 얼굴만 한 빨간 전화기를 두 팔로 끌어안는다. 할머니는 숫자가 적힌 동그란 구멍을 하나씩 돌리며
시간을 되감듯 엄마에게 전화를 건다.
“여보세요?”
“엄마! 엄마!”
“어어, 빛날 아. 왜 왜”
“엄마 언제 와요?”
아이의 목소리 끝이 금세 흔들린다. 눈동자엔 물빛이 그렁그렁 맺히고, 울음은 아직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채
목울대에서 가만히 떨고 있다.
“두밤만 자고 갈게. 빛날 아, 울지 말고... 외할머니 말씀 잘 듣고 있어.”
“네에. 엄마 빨리 와요.”
“그럼, 사랑해.”
그러나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나도 엄마는 오지 않았다. 그렇게 아이는 천천히 시골 풍경의 일부가 되어갔다.
닭이 우는 소리로 하루가 열리고, 아이는 발보다 큰 슬리퍼를 끌며 마당으로 나선다. 문간을 지나면 노란 논이 숨결처럼 펼쳐지고, 뿌연 안개가 곡식 위에 내려앉아 어린 마음엔 구름이 내려온 날처럼 느껴졌다.
그 시절, 엄마 아빠는 네 살이 된 어린 딸을 시골 외할머니댁에 맡긴 채 서울행 버스를 탔다. 아빠는 눈물로 셔츠 깃을 적셨다고 한다. 살아보기 위해, 버티기 위해 어른이 되어버린 두 사람이 어린 나를 잠시 놓아야만 했던 시간. 다섯 달쯤 지났을까. 아빠는 도저히 안 되겠다며 나를 데리고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가난은 여전했지만,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살아볼 힘이 있었던 시절.
새벽이면 엄마 아빠는 우유 배달을 나갔다. 내가 깰까 봐, 손끝으로 숨을 붙잡듯 조심히 움직였다. 그러다 눈을 떴을 때 어둑한 방 안에 엄마 아빠가 보이지 않으면 겁이 덜컥 나 울음을 터뜨리며 한옥 마당을 건너 친할머니 방으로 달려갔다. 어쩔 수 없이 나를 데리고 나가던 날엔 엄마는 젖은 새벽 공기 속에서 나를 등에 업고 계단을 오르내렸다. 그러다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다. 엄마의 등은 금세 홀딱 젖어버렸지만 나는 그 젖은 등판에 얼굴을 묻고 세상의 전부를 거기에 기대고 있었다. 그 온기는 오랜 세월이 지나도 마음 한쪽에서 한 번도 식지 않은 채 늘 그렇게, 따뜻했다.
얼마 전, 아빠의 기일 날 조용히 기도했다.
'아빠, 사랑해. 우리 엄마 아프지 않게 지켜주세요.
은정이 가족도, 우리 남편도, 아빠 손주들도 무탈하도록...
아빠, 너무 보고 싶어요.
아빠 품에서 펑펑 울고 싶어요.'
그 말은 울음이 되지 못한 채 나도 모르게 가슴 깊숙이 내려앉았다.
엄마는 지금도 나의 어린 시절을 자랑삼아 늘어놓기 바쁘다.
“너는 얼마나 똘똘했는지 몰라. 동네를 돌며 어찌나 예의 바르게 인사를 했는지. 한글도 가르쳐준 적이 없는데 네 살에 혼자 깨쳤단다.”
그 말 끝에는 늘 같은 문장이 따라온다.
“근데 인형만 들고나가면 꼭 뺏기고 울면서 들어오더라. 매번 속상해서 죽는 줄 알았다니깐.”
익숙한 엄마의 옛이야기지만 들을 때마다 새로워지고, 미세한 먼지처럼 가라앉아 있던 기억들은 빛 한 줄기만 스쳐도 다시 살아난다. 그 순간, 나는 슬며시 엄마의 등에 기대 본다. 세월이 많이 흐른 뒤에도 그 등은 변함없이 따뜻했다. 지치고 흔들리던 시간들에도 나를 붙들어 주던 바로 그 온기였다. 이어 엄마는 말한다.
“너는 사춘기도 없이 참 착하게만 컸어.”
하지만 나는 안다. 그건 ‘엄마의 기억 속 나’ 일뿐이라는 걸. 틀림없이 짜증도 냈을 것이고, 툴툴대던 날도 있었겠지. 그럼에도 엄마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착한 딸 빛날 이 만 남아 있다. 문득 생각한다. 나도 그럴까. 언젠가 우리 아이들이 성인이 되고, 또 누군가의 부모가 되어 도란도란 지난 시절을 이야기하는 날이 온다면. 지금은 힘들고 복잡한 순간들마저 다 흐릿해지고, 결국엔 따뜻했던 장면들만 기억에 남게 될까. 그렇게 상상만으로도 내 입가에도 잔잔한 미소가 번진다.
요즘 엄마는 문화센터를 다니며 늦은 배움의 기쁨을 알아가고 있다. AI를 배우고, 그림을 그리고, 시를 쓴다. 스스로 만든 작품이 전시에 걸렸다며 소녀처럼 들뜬 목소리로 자랑한다. 그 웃음은 오래 보지 못했던 햇살처럼 말없이 와서 한동안 떠나지 않는다.
사랑하는 우리 엄마
귀여운 우리 엄마. 고생 많이 한 우리 엄마,
내 어린 시절 충분히 사랑 못 줘서 미안하다 말하지 말아요.
엄마의 어깨가 얼마나 무거웠는지 나는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아요.
엄마는 최선을 다했고, 그 시절을 누구보다 씩씩하게 견뎌냈어요.
나는 그런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자랑스러워요.
아프지 말고, 지금처럼 작은 기쁨들을 하나씩 배워가며 오래오래 웃어요.
엄마, 예쁘게 키워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리고 사랑해요.
엄마의 예쁜 큰 딸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