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을 쓰는 사람

메리크리스마스

by 빛날애
나는 우울해졌기 때문에 쓰는 사람이 아니라,
우울을 쓰기로 선택한 사람이다.


“아무것도 하기 싫다. 나는 왜 이렇게 나약할까. 내가 너무 싫다.”

길가에 핀 한 포기 들꽃처럼 살겠다고 다짐했었다. 지금은 그 마음도 어느새 다른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산책길에 스쳐 지나던 들꽃들, 성탄절을 맞아 반짝이던 트리와 조명들마저 예전처럼 마음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하루는 여전히 제자리를 맴도는 것처럼 흘러가는데, 설명할 수 없는 공허와 무기력이 마음 깊은 곳에서 나를 흔들고 어지럽히며 오래 붙잡아 둔다. ‘우울증은 마음의 감기다’, ‘배부른 소리 한다’, ‘너보다 힘든 사람은 많다’는 말들은 틀리지 않았지만, 그 말들은 우울증이라는 병명 위로 때때로 생채기를 남긴다. 우울 그 자체보다도 ‘나는 왜 이렇게 나약한 사람일까’라는 질문이 나를 더 깊은 무력으로 끌어당겼고, 천천히 쌓아 올리며 버텨온 희망은 그렇게 말없이 무너졌다.


아무것도 읽히지 않던 날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누운 채 화면만 넘기던 시간들 속에서 나는 점점 나 자신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었다. 그때 내가 한 가장 단단한 선택은, 스스로를 다그치지 않고 도움의 문턱을 넘은 일이었다. 우울은 나약함이 아니라, 더는 혼자 감당하지 말라는 마음의 신호라는 것을 그제야 알게 되었다. 몸이 지치면 열이 오르듯, 마음도 한계에 다다르면 그렇게 신호를 보낸다. 글쓰기는 그 신호 앞에서 내가 택한 가장 느린 응답이었다.


당장 눈앞의 삶을 건너느라 출간된 책은 잠시 뒤편에 두고, 나는 불안과 우울의 숲을 헤매며 어두운 마음을 대나무숲처럼 바람 없이 써 내려갔다. 그렇게 몇 달을 헐떡이며 세상과는 한 발쯤 어긋난 채 숨을 낮추고 살았다. 그러다 어제, 예고 없이 도착한 한 통의 메시지가 말 한마디 없이 내 등 뒤의 매듭 하나를 조심스레 풀어주었다.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고, 이만큼의 걸음도 길이라고, 멈춘 게 아니라 잠시 숨을 고른 것뿐이라고.

그 손길 앞에서 나는 앞으로 나아가지도 뒤로 물러서지도 않은 채 잠시 서 있었고, 이내 가만히 책상 쪽으로 몸을 돌렸다. 숲이 끝났다는 확신은 없었지만, 잎이 나는 방향은 아직 이쪽이라는 걸 알 것 같아서. 우울은 여전히 곁에 두고, 빛이 들지 않는 자리에서 나는 노트북을 연다. 열리지 않은 문이 아니라, 닫히지 않은 문 하나가 아직 남아 있다는 생각을, 잠시 붙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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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AI의 시대다. 인공지능이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마음을 위로하는 말까지 건네는 시대에 우리는 도착해 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우리에게 분명히 남아 있는 자리가 있다고 나는 믿는다. 내가 느끼는 감정을 내가 직접 들여다보는 일, 그 누구에게도 대신 맡길 수 없는 자리다. AI의 무조건적인 고무와 긍정은 때로 우리를 편안하게 하지만, 그만큼 진실을 서둘러 덮어버리기도 한다. 글을 쓴다는 것은 사람들의 시선과 평가에서 벗어나, 나는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를 스스로에게 묻는 시간이다. 대답을 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쉽게 넘어가지 않기 위해서다.

미국 텍사스대의 제임스 페니 베이커 교수는 변하고 싶어 스스로를 찾아 헤매다 운명처럼 만난 것이 치유 글쓰기였다고 말한다. 글을 쓰며 자신을 깨부수고, 울고, 토해내는 시간들을 지나왔다고. 그는 감정을 분류하고 트라우마적 사건을 인정하는 순간, 마음에는 매우 긍정적인 변화가 일어난다고 덧붙인다. 정기적인 글쓰기는 감정을 억누르지 않고 제자리를 찾아가게 돕고, 그 과정에서 사람은 조금씩 다시 숨을 쉰다.

그 말은 이론이라기보다, 내가 이미 몸으로 통과해 온 시간들과 닮아 있었다. 글을 쓰는 동안 우리는 더 강해지기보다 더 솔직해지고, 고쳐지기보다 더 정직해진다. 해결책을 얻지 못해도 괜찮다. 적어도 그 시간만큼은, 내가 나를 외면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남는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쓴다. 우울을 몰아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울과 함께 앉아 있기 위해서. 그 자리에 머물렀다는 사실 하나가, 다시 다음 문장을 향해 몸을 기울이게 하니까.


이 글을 읽는 당신의 성탄절에도 꼭 반짝이는 기쁨이 아니어도 괜찮으니 잠시 숨을 고를 수 있는 자리가 있기를 바랍니다. 우울이 곁에 있어도, 닫히지 않은 문 하나쯤은 오늘도 우리 안에 남아 있다는 걸 서로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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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적 글쓰기 저자_제임스 W. 페니베이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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