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을 다시 펼친 이유
사람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에 관해서는 언제나 과장된 생각을 품기 마련이다. 미지의 영역은 필연적으로 두려움을 동반하고, 그 두려움은 대개 친절하기보다 잔혹한 상상력을 길잡이로 삼는다. 우리는 사실보다 크고 복잡한 의미의 외피를 현상 위에 덧씌운다. 타인의 의도와 숨은 동기, 악의와 계산을 헤아리려 애쓰며, 모르기 때문에 더 많은 허상을 만들어내고 그 허상으로 진실을 가린다. 알베르 카뮈의 소설 《이방인》에서 주인공 뫼르소는 이러한 거창한 설계를 비웃듯 마지막을 맞이한다.
“그토록 죽음이 가까운 시간 엄마는 거기서 해방감을 느꼈고, 모든 것을 다시 살아 볼 마음이 내켰을 것임이 틀림없다. 아무도, 아무도 엄마의 죽음을 슬퍼할 권리는 없는 것이다. (...) 마치 그 커다란 분노가 나의 고뇌를 씻어주고 희망을 가시게 해 주었다는 듯, 신호들과 별들이 가득한 그 밤을 앞에 두고,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가 그렇게도 나와 닮아서 마침내는 형제 같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는 것을 느꼈다.”
인간은 복잡하게 사고할수록 본질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믿고 싶어 한다. 그러나 카뮈는 뫼르소의 입을 빌려 조용히 반문한다. 어쩌면 우리는 복잡하게 생각함으로써, 정작 직시하기 두려운 진실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람들이 뫼르소의 행위에서 부도덕한 괴물의 서사를 직조해 내는 데 몰두할 때, 삶은 그 모든 해석을 비웃듯 설명보다 훨씬 단순한 얼굴로 거기 놓여 있었다.
사실 나는 뫼르소를 온전히 이해했다고 말할 수 없다. 그의 무심한 태도는 보편적 윤리의 궤도에서 벗어나 있고, 죽음을 앞두고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라고 말하는 대목은 깊은 인상을 남기면서도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그것은 초연한 깨달음이었을까, 아니면 비참한 자기 합리화였을까. 혹은 도덕적 심판조차 거부함으로써 자신만의 요새를 쌓아 올린 태도였을지도 모른다.
나의 내면은 뫼르소와는 정반대의 지점에 서 있다. 외부의 환경에는 비교적 무던한 편이지만, 나 자신에게만큼은 유독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사람이다. 알지 못하는 타인에 대해 과장된 상상을 덧붙이기보다는, 스스로를 향한 의심이 생각에 생각을 더하게 만든다. 결국 모든 것은 단순하게 흘러간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나는 좀처럼 그 단순함에 도달하지 못한다.
특히 일을 하며 새로운 시작을 앞둘 때 이런 고뇌는 깊어진다. 마음먹은 만큼 나아가는 일은 쉽지 않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마주하는 이해 불가능한 상황들, 도덕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순간들이 머릿속을 유령처럼 떠돈다. 타인의 무도함과 나의 불완전함이 맞부딪혀 소란이 일 때쯤, 나는 다시 뫼르소의 단순함을 떠올린다.
뫼르소처럼 세상의 모든 의미를 단칼에 부정하며 살아가기에는 우리의 삶이 품고 있는 온기가 너무 많다. 그러나 삶이 나를 짓누르는 복잡한 해석의 감옥처럼 느껴질 때, "모든 것은 그저, 단순한 것이다"라고 스스로에게 읊조려본다. 이 단순함은 비겁한 회피가 아니다. 사실보다 비대해진 두려움을 걷어내고, 내 앞에 놓인 태양과 바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이라는 진실을 오롯이 응시하겠다는 가장 정직한 선언이 아닐까 싶다. 스스로 만든 복잡한 미로 속에서 길을 잃을 때마다 뫼르소가 마주했던 그 서늘하고도 명징한 단순함을 기억하려 한다.
아름다운 가게 입구 한편 책꽂이 구석에서《이방인》을 발견했다. 반가운 마음에 집으로 데려온 그 책의 가격은 단돈 3천 원. 그러나 낡은 책장 사이로 쏟아진 뫼르소의 문장들은, 3천만 원어치의 무게로 지금의 나를 두드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