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살구 싶다

by 빛날애

정신과 전문의로 50년간 15만 명을 진료한 이근후 교수는 "살아보니 인생은 필연보다 우연에 좌우되었고, 세상은 생각보다 불합리하고 우스꽝스러운 곳이었다. 산다는 것은 슬픈 일이지만, 사소한 즐거움을 잃지 않는 한 인생은 무너지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_ 물총고기님 필사 중에서


사춘기 아이를 키우다 문득 멈춰 서서 나의 학창 시절을 돌아본다.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나의 그 시절은 ‘찌질하고, 순진했다.’ 고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부모님의 갑작스러운 일로 마음의 준비도 할 틈 없이 서울 집을 모두 정리하고, 인천으로 떠밀리듯 전학을 갔던 날, 어리둥절한 채로 던져진 낯선 교실에서 나는 마음의 빗장을 굳게 걸어 잠갔다.

한 번도 줄여본 적 없는 벙벙하고 긴 교복 치마와 짧은 단발머리. 소심하고 내성적이었던 나는 타인에게 손을 내미는 법을 몰랐다. 주로 혼자였다. 혼자라는 것이 그리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어쩌다 먼저 다가와 주는 착한 아이가 있으면 민망하지 않은 하루를 버텨냈다. 조용하고 심심한 월화수목금토. 집과 학교를 쳇바퀴처럼 오가는 뚜벅이의 삶이었다. 밤 10시, 거무스름한 어둠이 깔려야 교문을 나서는 평범한 나날들 속에서, 같이 하교할 친구가 없는 날이면 학교 앞 문구점에서 200원짜리 김치만두를 사서 한입에 넣었다. 삼삼오오 모여 걷는 아이들 틈에서 나는 일부러 어깨를 펴고 구부러지지 않으려 애썼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나는 괜찮다고, 혼자서도 충분히 괜찮다고 나 자신을 속여야만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내 아이가 교복을 입자, 내가 그토록 싫어했던 나의 그 모습을 꼭 닮아버렸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생의 반복이었다. 새 학기를 앞두고 제발 이번만은 순탄하기를 빌고 또 빌었건만, 아이의 새 반에는 초등학교 시절 아이를 괴롭혀 절연했던 친구가 배정되었다. 다시 불안에 떨기 시작한 아이를 보며 세상이 원망스러워졌다. 왜 세상은 우리를 가만히 두지 않는 걸까. 신이 있다면 이건 너무 가혹한 시험이 아닌가. 잠자리에서 아이와 한참을 이야기를 나눈다. 나의 학창 시절 이야기를 우스꽝스럽게 늘어놓는다. 결국 모든 것은 지나간다고, 엄마를 보라며 용기를 주다가, 안아주다가, 때로는 돌멩이 같은 말들로 아이의 마음이 단단해지길 바라본다. 다행히 아이는 "엄마가 내 친구였으면 좋겠어요"라는 말과 함께, 내일은 먼저 친구에게 다가가 보겠다며 결의에 찬 얼굴로 말했다. 드디어 편안한 얼굴이 되어 잠든 아이를 보며, 나는 그제야 안심하며 곁에 눕는다.


문득 얼마 전 호기심에 읽어 본 한로로 저자의 『자몽살구클럽』 속 문장을 떠올린다.

"사람은 참 간사하다. 죽고 싶을 때는 당장 눈 뒤집고 혀 깨물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밤 호수처럼 잔잔해질 때가 있다." 슬픈 마음을 품고서도 마트 매대 앞에서 오늘 저녁 메뉴를 무심하게 고민하는 순간. 언제 다시 버튼이 눌려 터질지 모르는 위태로운 평행선 위에서, 감정을 꾸역꾸역 누르며 겨우 숨을 고르는 순간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믿어보려 한다. "딱 구일만 버티면 살아갈 이유가 생길 거라 믿는다. 죽을 마음은 작아지고 살아낼 마음은 커질 거라 믿는다."

바보는 후회도 미련도 없기에 죽고 싶을 때 후회 없이 죽을 수도 있지만, 반대로 바보처럼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아무거나 믿어버릴 수도 있다고 작가는 말했다. 나는 지금 기꺼이 그 바보가 되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내일을 믿어본다. 입맛이 없어도 품에 가장 좋아하는 소금빵 하나 소중히 안고 집으로 걸어가는 이 발걸음이, 결국엔 아이와 나를 단단한 삶의 땅으로 인도해 줄 것이라 믿으며, 아이는 나보다 훨씬 단단한 사람이라고 믿으며, 아이의 어린 시절 사진과 잠든 모습을 번갈아가며 한참을 바라본다. 그렇게, 그렇게. 그렇게.

그리고 나는 진심으로, 이 세상의 위태로운 평행선 위에서 숨을 고르는 법을 잊은 모든 '살구 클럽' 친구들을 살리구 싶다. 그들을 위해 종종 어색한 글을 쓰고 싶다.

KakaoTalk_20260304_220048117.jpg
스크린샷 2026-03-05 213522.png
자몽살구클럽_한로로 / 오십부터는 단순하게 사는게 좋다_저자 이근후 교수
사람은 참 간사하다. 죽고 싶을 때는 당장 눈 뒤집고 혀 깨물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밤 호수처럼 잔잔해질 때가 있다. 나에게는 지금이 그 순간이다. 아무렇지 않게 편의점에서 저녁 메뉴를 고민하는 순간. 언제 또 버튼 눌려 '쉽게 죽는 법'을 검색하게 될지 모르는 순간. 주변 사람들도 같이 살얼음판 위를 지나는 듯한 지금이 순간. 구 일이 지나면 다 괜찮아질 것이다. 그럴 거라 믿는다. …… 딱 구일만 버티면 살아갈 이유가 생길 거라 믿는다. 죽을 마음은 작아지고 살아낼 마음은 커질 거라 믿는다. …… 바보는 후회도, 미련도 없다. 그러므로 바보는 죽고 싶을 때 후회 없이, 미련 없이 죽을 수 있다. 그래서 믿는 거다. 바보처럼,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상태에서 아무거나 믿어보는 거다.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믿어보는 거다. 입맛 없어도 품에다 컵라면 하나 안아 집 걸어가는 거다. _자몽살구클럽_저자 한로로


매거진의 이전글엄마의 사랑 공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