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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담희 Nov 02. 2019

인간관계 때려치우고 싶을 때

타인의 마음을 얻는 것보다 더 힘든 일, 내 마음을 내어주는 것

겨울이 시작됐고 마음도 덩달아 차가워지는 요즘, 난로같이 따뜻한 품에서 생각을 좀 녹이고 싶다.


인간관계에서 타인의 마음을 얻는 게 중요하다. 맞는 말이긴 한데 나는 왜 다른 이들의 마음을 얻는데 애쓰고 싶지 않을까. 별로 얻고 싶지 않은 걸까?





겨울에는 난방비가 많이 나와서 십원도 더 아껴야 하는 한낱 자취생일지라도, 포기 못하는 몇 가지가 있다. 귤은 어떻게든 먹어줘야 한다.


귤 한 박스 사놓고 이불 뒤집어쓴 채 하나둘 까먹는 걸 좋아한다. 한 번 먹기 시작하면 손바닥이 노랗게 물들 정도로 먹는다. 귤껍질을 까면서 손톱에 하얀 껍질이 끼는 것이 싫어서 귤 먹기 위해서 손톱을 깎아버린다. 그 정도 정성은 필요하니깐.


어릴 때부터 보고 배운 것이 있어서 귤껍질을 까기 전 습관적으로 한 번 고르게 주무른다. 껍질을 잘 까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신맛을 내는 유기산이 주무르는 과정에서 귤 전체에 고르게 퍼져서 신맛이 약해지기 때문이다.  


마음도 귤처럼 자꾸 주물러주면 달아질까. 인상 찌푸리게 되는 신맛이 아니라 손이 노랗게 물들 정도로 손길이 자꾸 가는 달달한 귤 같은 마음이 되는 걸까.


충분히 익기 전에 따면 그 어떤 것도 제맛을 못 낸다. 몸도 마음도 예외가 없다.

아직 준비 안된 마음 자꾸 주물러봤자다.








귤 까먹고 껍질을 바로 처리하지 못할 때가 있다. 혼자 살다 보면 잔소리하는 사람이 없어서 별의별 일을 다 미루게 된다. 말랑했던 껍질이 말라비틀어질 때까지 미루다가 한가득 쌓이면 그제야 쓰레기통에 버리곤 한다.  


가끔, 아주 가끔 사람을 만나다 보면 나 자신이 바짝 말라비틀어진 귤껍질이 될 때가 있다. 달달한 알맹이만 쏙 빼고 방치해 버린 귤껍질 말이다.  


마음을 각종 방식으로 주물러 주니 제아무리 딱딱하고 신 마음 일지라도 달달해진다. 그럼 익지 않았어도 왠지 그 사람한테는 준비가 된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달달한 기분으로 남에게 마음을 주면 덩달아 나도 기분이 좋을 줄 알았는데 왜 전혀 달지 않은 씁쓸함을 느낄까. 역시 익지 않아서 일까.


씁쓸함을 포함한 모든 감정은 마음과 분리해서 식탁 위나 쓰레기통에 버리지 못한다. 감정이라는 게 사람과 닿았을 때 감정이지 그렇지 않으면 신경 덩어리일 뿐이다. 신경을 쓰는 쪽으로 생각이 몰리기 때문에 감정을 인식하는 순간 감정을 두 배로 느끼기도 한다.



타인의 마음을 얻는 것도 힘들지만, 남에게 자신의 마음을 내어주는 것도 힘들다.


생각보다 우리는 마음과 친하지 않다.

타인의 마음을 얻는 것도,

자신의 마음을 남에게 내비치는 것도

모든 게 다 서툴다.

 

서로에게 실망하고 힘들어하면서 비로소 마음 없이는 우리가 바라는 관계를 이룰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우리는 다가오는 사람에게로부터 진심을 바랄 뿐이다. 내게 진심으로 대해줄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좋고, 이왕이면 내게 마음을 주고 신경 써주는 사람이 옆에 있기를 원한다. 마음을 얻지 못하면 신경 쓰이고 자신한테 잘못을 찾기도 한다. 그리고 의외로 우리는 남에게 진심을 잘 주지 않는다. 적당히 대해도 같이 밥 먹을 수 있으며,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귤을 먹기 위해서 귤껍질을 까듯, 가끔 단지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 사람을 찾는 것 같다. 그런 사람에게 마음을 내어준 후에는 씁쓸함이 밀려온다. 아무리 달게 내 마음을 녹여도 전혀 달지 않고 대려 쓰다. 내가 준 마음이 그에게는 언젠가 말라비틀어질 귤껍질이 돼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문을 함부로 두드려도 안 되지만, 함부로 따 주어서도 안 된다는 말이 생각난다.





누군가와 가까워진다는 건 서로 진심으로 대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진심이 담긴 마음을 받았을 때 제대로 끝까지 다루지 못하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된다.


내 마음을, 내 진심을 내놓으면 그제야 뭔가를 해냈다고 여기는 사람도 겪기도 했다. 사람 마음 얻은 걸 마치 트로피처럼 여긴다. 그런 사람에게 전달된 마음은 백퍼 구석 어딘가에서 말라비틀어진 귤껍질도 못한 상태로 방치된 채 있을 거다.  


진실 속 내용보다 자신한테 진실을 터놓는 행동 자체로 만족하기 때문에 그 후 뒷수습까지 못해줄 때가 많다.


자꾸 마음 주무르지 말고 함부로 문을 두드리지 말고

우리는 마음이 익기 전까지 기다려주는 법을 배워야 할 것 같다. 그 누구라도 그러하다.


다른 이들의 마음을 얻는데 애쓰고 싶지 않은 이유이며

내가 다른 이들에게 마음을 주기 힘들어하는 원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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