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 말 한마디로 천냥 빚지는 남자

by 빛솔

입사 후, 민준은 자신의 기발한 아이디어와 제품 덕분에 '녹차혁명 샤샤샤 샴푸'의 기획팀에 배정되었다. 그러나 말의 능력 없이 오직 순수 핸드메이드 제품 하나로 입사한 그의 현실은 냉혹했다.

첫 기획 회의 날. 민준은 야심 차게 준비한 자료를 들고 발표대에 섰다.
"자, 그럼 박민준 사원, 이번 샴푸 기획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아시죠? 지루한 건 안 팔립니다."
상사의 말에 민준은 긴장했고 온몸이 뻣뻣해졌다. 그는 미리 외워온 대본을 떠올리려 애썼지만 가슴은 벌렁거리고 머릿속은 새하얗기만 했다. 결국 민준의 입에서 나온 말은 겨우 "저... 그게..." 뿐이었다. 동료들의 시큰둥한 표정, 상사의 답답해하는 한숨 소리가 회의실을 채웠다. "아... 첫 회의부터 갈길이 머네. 듣던 거보다 더 심한데. 민준씨. 제품 나오기 전에 우리 사리부터 나오겠어. 그러지 말고 잘 좀 해봐요" 그때, 경쟁심이 강한 동기 우혁진이 끼어들었다.
"제가 대신 설명해도 될까요, 부장님? 박민준 사원은 긴장을 많이 한 것 같아서요."
혁진은 민준의 기획안을 능숙하게 읊으며 마치 자신의 기획인 양 포장했다. 민준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회의가 끝난 후 민준은 복도에서 혁진에게 달려가 따졌다.
"혁진 씨! 왜.. 제 제품 기..기획을 가..가로채는 겁니까?"
민준의 떨리는 목소리에 혁진은 비웃으며 말했다. "박민준 씨, 제품 기획이 아무리 좋아도 말로 설명하지 못하면 그건 그냥 종잇조각이에요. 그리고 내 제품이 아니라 회사 제품입니다. 회사 제품은 혼자 만드는 게 아니죠. 저처럼 말로 설득할 줄 알아야 진행이 된다고요."
민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맞는 말이었다.


이후 그의 아이디어와 제품은 빛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그를 통해 시작됐던 기획은 회사 동료들의 입을 통해 이리저리 둔갑되었고 급기야 '녹차 샤샤샤 샴푸'는 '아싸 폭망 샴푸'라는 굴욕적인 별명까지 얻게 되었다.
아웃사이더 민준의 폭망한 샴푸라는 뜻이었다. 결국 기획은 '인싸 거품 샴푸'라는 별 임팩트 없는 이름으로 변경될 거라는 소문이 돌았다.
화장실 거울에 민준의 얼굴이 비췄고
거의 반 울먹거리는 상태로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며 민준이 웅얼거렸다.
"너는... 진짜... 못났다."

마음을 추스르고 출근한 다음 날 아침, 민준은 부장님의 심부름으로 타게 된 초고속 엘리베이터 안에서 MS 회장과 마주쳤다.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
'홈페이지에서 뵀던 그분이 왜 여기에...' 민준은 눈이 질끈 감아졌다. 회장은 인사는커녕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는 민준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했다.
"자네가 '녹차 샤샤샤 샴푸' 아이디어를 낸 박민준 사원인가? 기발하더군."
민준은 회장님이 자신의 이름과 녹차 샴푸를 알고 있다는 사실에 너무 놀랐다. 어느새 커진 눈으로 회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면접 때 얘기를 흥미롭게 들었네. 사원증 이름이 민준이기에 물어봤는데 그 신입이 맞는가 보군."
민준은 자신을 알아봐 준 회장에게 감동해 단 한마디라도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었지만 그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 회장이 그런 민준의 어깨를 손으로 감싸 토닥이며 다시 말했다.
"뭘 그리 긴장하나.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괜찮으니 천천히 말해봐."
민준은 그 말에 용기를 냈다.

"저... 감사합니다. 회장님..." 여기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긴장한 나머지 엉뚱한 말이 튀어나왔다. "회장님, 저는... 회장님을... 여미새 같으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정적이 흘렀다. 회장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리고 회장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민준은 그저 처음 본 자신을 편안하게 감싸준 회장님이 어미새 같이 포근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인데 어쩌다 보니 여자에 미친 XX의 준말인 여미새가 나와 버린 것이다.
역시 민준은 말 한마디로 천냥빚을 지는 남자였다.

"어미새를.. 잘못.. 죄.. 죄송합니다."
"띵~" 그 순간 엘리베이터는 18층에 도착했고 문이 열렸다.
회장은 이미 고개를 처박고 있는 민준에게 "자네의 당돌함...이라고 표현해 두겠네. 말실수는 줄이고 앞으로도 열심히 하게." 하고는 대수롭지 않게 웃으며 내렸다.
순간 지옥의 엘리베이터를 만들어 버렸던 민준은 회장님의 마지막 멘트에 안도했다. 그러나 다음 날, 회사 게시판에는 '박민준 사원, 회장님에게 여미새 같다 발언'이라는 제목의 글이 올라왔고 민준은 단숨에 '회장에게 찍힌 사원'으로 낙인찍혔다.

그의 언변 부족은 단순한 웃음거리를 넘어 이제 민준의 발목을 잡는 족쇄가 되었다. 회사 내부에서는 그의 기획안이 '말 못 하는 바보의 허풍'이라는 소문까지 돌기 시작했다. 민준의 입사 동기였던 혁진은 민준의 기획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기에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를 퇴사시키고 기획은 꿀꺽할 심산이었다. 그는 민준을 향한 음해와 이간질을 멈추지 않았고 민준은 점점 고립되었다.

어느 날, 혁준은 민준의 노트북에 잠입해 중요한 기획안 데이터를 복사 후 삭제했다. 민준은 절박한 심정으로 상사에게 찾아갔지만 말로 설명할 수 없었다. 그의 떨리는 목소리와 횡설수설하는 말은 오히려 그를 '무능력하고 거짓말하는 사원'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동료들을 다 도둑놈에 거짓말쟁이로 만들 셈이야? 술 먹고 스스로 잘못 삭제한 거 아니냐고!" 혁진이 말했다. "아..아아 으어.. 어어.." 답답함이 극에 달한 민준은 가슴을 쳤다. 그러나 상사는 어버버거리는 민준을 더 이상 감쌀 수 없었다.
"박 사원, 자네의 제품과 아이디어는 참 좋았어. 하지만 회사는 말로 소통하는 곳이네. 자네는 우리와 함께 갈 수 없을 것 같아."
민준은 권고사직 통보를 받았다. 한때 그에게 꿈을 안겨주었던 회사는 이제 가장 아픈 상처가 되었다. 그는 말없이 사직서를 제출하고 텅 빈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차가운 바람이 그를 감쌌다. 민준은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그는 이제 더 이상 '말 못 하는 바보'로는 살고 싶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화, 토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