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준은 걸음을 멈추고 회사 건물 앞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한때 그의 열정과 꿈을 이뤄줄 거라 기대했던 공간이 내쫓긴 지금에 와서는 차가운 얼음성으로 보였다. 그때 주머니 속에서 휴대폰이 진동했다. 화면에 뜬 이름은 '내사랑 현지'. 민준은 망설이다 전화를 받았다.
"민준아, 너... 회사 잘렸어?"
민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현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속에는 이미 거리가 느껴졌다.
"혁진씨한테 얘기 들었어. 회장님께 실수했다면서. 혁진 씨도 커버해보려 했는데 민준이 너 능력부족 잇슈가 커서 어쩔 수 없이 회사에서 내보낸다고 안타깝다고 하더라... 우리 앞으로 어떻게 해. 나 안정적인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잖아. 말을 아무리 못 해도 그렇지, 도대체 왜..."
민준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듣고 싶은 말은 아니었다. 그래서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그 즉시 아니라고 사실은 그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 그게..."
민준이 더 말을 잇지 못하자 현지는 한숨을 쉬었다. "민준아, 우리 당분간 시간을 갖자. 너도 좀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 당분간은 연락하지 말자."
전화는 끊겼고 민준은 아무것도 해보지 못했다. 변명 한마디, 아니 단 한마디의 말이라도 제대로 하고 싶었지만 말한다고 상황을 되돌릴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민준은 더 이상 회사에 다니지 못하는 것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듣기 싫은 말을 듣는 것보다. 자신 안에서 솟아오르는 것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스스로가 너무 힘들었다. 그리고 분명 진심을 다해 살았는데 그런 자신을 이해받지 못하는 현실이 사무치게 시렸다.
민준은 다른 그 어떤 것도 원망하지 않았다. 오로지 한 가지가 문제였고, 그게 인생을 망치고 있는 원망 거리였다. 그 문제는 바로 '말'이었다. 그는 시중에 나온 모든 스피치 명서를 탐독하고, 스피치 유튜브 채널과 컨텐츠 링크를 수집하며 자신에게 맞는 학원을 찾아다녔다.
그런던 중 국내 최고 달변가들을 배출한 학원 W스피치를 알게 되었다. 엄청난 대기시간을 이겨낸 민준은 마침내 수강권을 손에 넣게 되었고, 거금을 들여 특별 수강권을 결제했다.
드디어 첫 수업! 학원 강사의 "말은 기술입니다. 연습하면 누구나 잘할 수 있습니다!"라는 말이 가장 희망적이었다.
그러나 희망도 잠시 누구나 할 수 있다는 스피치는 민준에게는 먼 나라 이야기였다.
발음 교정반에서는 "스위스에서 온 스미스씨 이야기"를 외치다가 혀를 너무 세게 깨물어서 병원에 실려갔고, 자신감 향상반에서는 거울을 보며 "나는 할 수 있다!"를 외치다 거울 속의 찌질한 자신을 보고 심하게 좌절했다. 심지어 외치기반에서는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를 외쳐야 하는데 긴장한 나머지 "나에게는... 꿀이... 있습니다!"라고 외쳐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다. "양봉하다 왔냐.""생긴 건 멀쩡한데 안타깝다. 안타까워." "벌 받아야겠는데요""그래도 어느 정도 말은 할 줄 알아야지. 클래스 수준이 너무 떨어진 거 아닙니까?". 말!말!말! 그게 그렇게 민준을 괴롭혔다.
어느 날 저녁, 강의가 끝나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학원 문을 나서는 민준에게 누군가 쪽지를 건넸다. 민준이 멍하니 바라보자 상대방은 싱긋 웃으며 자신의 강의실로 쏙 들어갔다. 쪽지에는 또박또박 쓴 글씨로 "오늘 발표하실 때, 떨리는 목소리 속에서도 진심이 느껴졌어요. - 윤서하"라고 적혀 있었다. 민준의 가슴은 쿵 하고 울렸다. 다음 날 민준은 용기를 내어 답 쪽지를 남겼다. "감사합니다. 쪽지 덕분에 힘을 얻었어요." 그렇게 둘의 대화는 쪽지를 통해 이어졌다.
'민준 씨, 말은 좀 서툴러도 괜찮아요. 중요한 건 말하는 사람의 진심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말하는 법을 잘 몰라서요...'
'민준 씨는 잘하고 있어요. 당신의 메모는 그 누구의 말보다 솔직하고 따뜻하네요.'
쪽지로 나눈 대화는 점차 깊어졌다. 민준은 글을 통해 자신의 속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았고, 서하도 꾸밈없는 민준의 마음에 공감해 주었다. 불안정했던 민준의 마음에 서서히 온기가 차올랐고 열심히 해볼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그러나 어느 순간 쪽지를 건넸던 서하는 보이지 않았다. 이후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자신의 모습에서 민준은 더 이상 희망을 느낄 수 없었다.
사실 그곳에서 배운 화려한 스피치 기술들은 민준에게 더 큰 좌절감만 안겨주었다. 수십 명 앞에서 발표할 때마다 민준은 자신이 얼마나 초라한지 깨달았고 그의 자신감은 바닥까지 떨어졌다.
결국, 모든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민준은 홀로 공원 벤치에 앉아 멍하니 있었다. 그의 옆에 앉은 비둘기조차 그를 무시하는 것 같았다. 그는 혀를 깨물고 죽고 싶을 만큼 답답했다.
"아악!!!" 답답함을 못 이긴 민준의 외마디 외침이 공원하늘에 울려 퍼졌다.
민준은 단 한 번도 스피치수업에 빠진 적이 없었고 누구보다 늦게 집으로 돌아갔었다. 자신이 해볼 수 있는 건 다해본 상태에서도 더 이상 앞이 보이지 않으니 마음은 더 무너졌다.
그때, 한 아이가 민준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올려다보았다. 푹 처박고 있던 민준도 고개를 들었고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아저씨, 혹시... 저희 할미 보셨나요?"
민준은 "아... 혹시 길을 잃었니? 어머니... 아니 할머니... 찾니?" 민준은 또 말을 더듬었다. 아이는 민준의 말에 의아해하면서도 그의 순한 눈빛에 안심했는지 갑자기 손을 내밀었다. 민준은 아이의 작은 손을 잡고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한참 동네를 헤매다가 아이가 손가락으로 처음 보는 한 골목을 가리켰다.
"저기요! 할미가 저기에 보물이 있다고 했어요!"
아이가 가리킨 골목으로 들어가니 낡은 간판이 달린 작은 고서점이 있었다.
민준은 분명 처음 와본 골목이었음에도 익숙한 풍경에 놀랐다. 묘하게 기시감이 드는 서점이었다. 민준은 홀린 듯 아이의 손을 잡고 서점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