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준은 아이의 작은 손에 이끌려 낡은 고서점 안으로 들어섰다. 퀴퀴한 종이 냄새와 눅진한 공기가 코끝을 맴돌았다. 아이는 "할미!" 하고 외치며 안쪽으로 달려갔다. 돋보기안경을 낀 백발의 할머니가 낡은 의자에 앉아 책을 읽다가 손주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서언아, 어디 갔었니? 할미 걱정했잖아."
아이는 뒤에 서있던 민준을 가리키며 말했다.
"할미, 이 아저씨가 저 찾아줬어요!"
"응~ 이 아저씨가 여기 오게 길 찾아줬구나? 아이고 내 새끼."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민준에게 인자한 미소를 보냈다. "고맙네, 젊은이. 우리 귀한 손주를 찾아줘서 고마워." 민준은 "아닙니다..."라고 하고 더 말하려다 혀가 꼬이자 대신 멋쩍게 웃어 보였다. 그때 민준의 시선이 책장 한편에 꽂힌 낡은 책 한 권에 멈췄다. 낡은 책등에 금박으로 새겨진 제목은 '설득의 마법서'라고 적혀 있었다. 민준은 홀린 듯 손을 뻗었다.
'설득의 마법서?.. 말 잘하게 해주는 책인가?'
그 순간, 할머니의 목소리가 단호하게 들려왔다.
"그건 파는 게 아니야."
민준은 깜짝 놀라 손을 거두었다. 하지만 민준의 시선은 여전히 그 책에 가 있었다. 할머니는 민준의 눈빛을 읽은 듯했다. "손주를 찾아준 보답으로 빌려는 줄 수 있어. 하지만 꼭 지켜야 할 약속이 있어." 할머니는 손가락을 펴며 말했다.
"첫째, 꼭 집으로 돌아가서 펼쳐야 해. 둘째, 한 번 보기 시작한 곳에서만 봐야 하고. 마지막, 책을 절대 잃어버리면 안 돼. 잃어버린다면 반드시 다시 찾아서 꼭 책을 처음 봤던 곳으로 가지고 와야 해. 알았지?"
민준은 할머니가 자신을 놀리는 줄 알았지만 왠지 모르게 더 그 책에 끌렸다. "네.. 아... 알겠습니다. 할머니." 그는 꾸벅 인사를 하고 책을 건네받아 고서점을 나섰다.
민준의 손에 들린 책의 금박 글씨가 반짝 빛났다. 민준은 가다가 멈춰 서 책을 들여다봤다. '아니야. 약속은 중요한 거야. 집에 가서 펼쳐보자.' 가는 길에 책이 너무 궁금해서 펼쳐보고 싶었지만 마음을 추스르며 참고 또 참았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민준은 책상에 앉아 '설득의 마법서'를 펼쳤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책에는 어떤 내용도 적혀 있지 않았다. 그저 텅 빈 종이만 있었다. '뭐야, 진짜... 장난치신 거잖아.' 민준은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책을 침대 옆 협탁에 올려둔 채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휴대폰 벨소리에 잠에서 깬 민준은 몽롱한 정신으로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네~"
"민준아, 아침 먹었니? 잘 지내는 거지?"
민준이 회사에서 잘렸다는 소식을 듣고 걱정된 민준의 어머니가 전화한 것이었다.
"네, 어머니. 걱정 마세요."
민준은 자신도 모르게 망설임 없이 단단한 어조로 말하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고 머릿속으로는 어머니가 안심할 만한 말들이 저절로 떠올랐다.
"어머니, 저는 괜찮아요. 제가 구상해 둔 제품부터 다시 잘 만들어 나가고 있어요. 모든 게 잘될 거예요. 어머니의 걱정 또한 저를 향한 사랑인 거 알아요. 제가 곧 어머니께 자랑스러운 아들이 될 거니까 잠시만 믿고 기다려 주실 수 있죠? 제가 꼭 성공해서 어머니 맛있는 거도 많이 사드리고 함께하는 시간도 더 가질게요. 사랑하고 감사해요."
민준은 휴대폰을 귀에 댄 채 스스로의 말에 놀랐다. 그의 목소리는 진심을 담아 따뜻하게 흘러나왔고 어머니는 전화기 너머로 감격한 듯 울먹였다.
"내 아들 민준이... 그래... 엄마는 믿지. 사랑해."
전화를 끊은 민준은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말하고 싶은 대로, 생각하는 대로 정확하고 유창한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의 입은 더 이상 장식물이 아니었다. 텅 빈 마법서가 그의 혀에 묶였던 족쇄를 풀고 놀라운 힘을 불어넣은 것이 분명했다. '마법서! 마법서야! 틀림없어!' 민준은 두리번거리다 협탁 위에 던져져 있던 책을 소중히 잡아 들었다. 그의 눈빛은 희망으로 가득 찼다. 그는 이제 더 이상 '말 못 하는 바보'가 아니었다. 그의 새로운 삶이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