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준의 짓눌린 어깨는 펴졌고 걸음걸이는 힘찼다. '설득의 마법서'가 불어넣은 힘 덕분일까 온몸에 자신감이 차올랐다. 그는 우선 MS와 쌍벽을 이루고 있는 생활용품 회사 '로맨틱 라이프'에 이력서를 넣었다. MS에서 쌓은 경험이 있었지만 말 못 하는 바보라서 잘렸다는 루머에 시달리고 싶지 않아 이력서에 경력으로 넣지 않았다. 면접관은 그의 텅 빈 경력란을 보고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박민준 씨, 이력서에 경력이 없군요. 열심히 논 건가요? 로맨틱 라이프는 그렇게 아무나 지원하는 만만한 회사가 아닙니다. 서류 전형을 통과한 게 신기하군요. 포부 좋게 우리 회사에 지원한 이유가 뭡니까?"
민준은 면접 때마다 심장을 짓누르던 긴장감 대신 끓어오르는 열정을 느꼈다. 그는 면접관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저의 경력에 로맨틱 라이프 외에는 넣지 않을 예정입니다. 앞으로도요. 제 이력서는 오직 이 순간을 위해 비워둔 것이지 절대 그냥 허송세월 보낸 것이 아닙니다." 민준은 전에는 찾아볼 수 없던 당당함으로 거침없이 말했다. "그동안 로맨틱 라이프에서 조향을 가미한 생활용품 연구에 상당한 투자를 해 오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이미 3년 전부터 그와 같은 제품 개발에 몰두했었고 작년에 완성시킨 작품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아직 빛을 보지 못한 수많은 진심들이 있습니다. 제 진심이 담긴 작품을 로맨틱 라이프의 이름으로 세상에 선보이고 싶습니다. 이력서 뒷장에 개발 제품의 성분과 시장조사 내용, 자세한 세부사항들을 첨부해 두었으니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의 말은 논리 정연했고 억눌렸던 감성이 폭발하는 듯하기도 했지만 호소력 있게 모두에게 깊이 와닿았다. 충분히 정리된 자료들까지 접한 면접관들의 눈은 크게 흔들렸다.
흥미롭게 듣던 면접관이 민준에게 물었다.
"민준 씨. 신입이 스스로 제품을 개발해 들고 온 것도 제품을 작품이라고 말할 정도로 노력한 것도 나름 훌륭하지만 제품이라는 건 말로만 만들어지는 게 아닙니다. 우리 회사가 여기까지 온건 단순히 제품을 제조한 게 아니라 고객들의 니즈를 반영하며 세일즈 못지않게 연구개발에 집중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만든 게 수십 년간 노력해 만들어낸 자사 기존 제품보다 훌륭하다는 건가요?" 민준은 질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준비된 듯이 말했다.
"저는 로맨틱 라이프 선배님들이 흘린 땀과 진심을 출시하신 제품들을 통해 충분히 느꼈습니다. 존경하고 동경했기에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누구보다 함께하고 싶습니다.
말로만이 아니라 진심이라는 것을 실력과 결과로 증명해 보일 수 있도록 정직원의 기회를 부탁드립니다!"
이후로도 압박면접은 이어졌지만 민준은 압도적인 언변으로 면접관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로맨틱 라이프'의 당당한 신입 사원이 되었다.
출근 첫날, 민준은 깜짝 놀라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그의 눈에 들어온 익숙한 뒷모습. 곱게 땋은 머리에 단정한 옷차림, 그리고 컴퓨터 모니터 옆에 붙어 있는 빼곡한 포스트잇들. 그녀는 윤서하였다.
서하는 민준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민준 씨...?"
민준은 그녀를 보자마자 말문이 막혔다. 설득의 마법서의 효력이 사라진 듯 그의 입은 다시 굳어버렸다.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민준을 보며 서하는 미소를 지었다.
"민준 씨, 우리 오랜만에 만났는데 어색하게 굴지 말아요. 반가워요. 그리고 혹시... 우리 쪽지 기억나요?"
서하의 말에 민준은 얼굴이 붉어졌다. 민준은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했다. 하지만 서하의 눈빛은 민준을 놀리는 것이 아니라 따뜻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민준은 서하와 함께 일하게 되면서 점차 더 가까워졌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서하에게만큼은 유수 같은 그럴듯한 말이 안 나갔다. '왜 서하 씨에게는 마법서의 능력이 나가지 않는 거지?'
이상하게도 서하에게만큼은 진심으로 써 내려간 쪽지만이 함께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되어버렸다.
이후 민준은 '로맨틱 라이프'에서 승승장구했다. 그의 뛰어난 언변과 기발한 아이디어는 회사에 활기를 불어넣었고 민준의 기획안과 프레젠테이션은 매번 상사의 감탄을 자아냈다. 그러던 어느 날 회사에 위기가 찾아왔다. 펀딩을 받기로 했던 최대 투자자가 갑작스럽게 계약을 파기한 것이다. 투자자는 로맨틱 라이프의 불안정한 시장성과 낮은 수익률을 문제 삼았다.
"그간 파트너였던 로맨틱 라이프는 현재는 경쟁력을 많이 잃어버린 모습입니다. 저희의 투자 기준에 부합하는 회사를 뽑을 겁니다. 후보 회사는 총 3곳입니다. 각 회사의 최종 PT를 듣고 어느 곳에 투자할 것인지 이달 말에 결정하겠습니다. 투자기간은 5년, 성과에 따라 투자금을 늘려가고 초기 금액은 2000억입니다. 한 번 결정되면 번복은 없습니다."
업친데 덮친 격으로 회사는 자금위기로 존폐의 기로에 놓여 있었다. 투자사와 함께하는 최후의 PT 날. 결국 민준이 직접 발표자로 나섰다. 상대는 매우 차가운 눈빛의 투자 전문가였다. 먼저 발표한 사람들의 PT를 듣고 투자자는 말했다.
"당신들은 현재 있지도 않은 앞날의 비전과 감성에만 호소하고 있습니다. 시장 논리는 냉정합니다. 이익이 없는 감성은 사치일 뿐입니다."
투자자의 차가운 말에 모두가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민준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맞습니다. 앞의 두 회사에서 말한 감성은 사치입니다. 하지만 그 사치가 이 판매와 수익을 지탱하기도 합니다. 저희는 부유층이 아닌 일반 시민들도 마음 편히 사치할 수 있는 가성비 있는 고급스러운 생활용품을 지향합니다." 민준은 동의의 쿠션언어를 필두로 앞에 발표한 두 회사의 발표자는 무안하지 않게 품으면서도 투자자의 주의를 끌어올 수 있는 훌륭한 Yes, But 화법으로 시작했다.
"결국 돈은 사람이 가지고 있습니다. 설명드린 제품을 통해 사람들의 니즈를 채워주고, 그들의 삶에 다시금 활력을 불어넣습니다. 제품을 구매하고 사용하는 순간뿐만 아니라 그 이후까지 생각하는 마음. 그게 책임지는 마음이고 진심이 아닐까요. 보통 이익을 좇지만 저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싶습니다. 그리고 저는 확신합니다. '진심'은 반드시 지속가능한 '수익'을 낳습니다."
민준의 말은 투자자의 굳게 닫혔던 마음을 흔들었다. 그의 논리는 어떤 반박도 무력화시켰고 그의 진심은 투자자에게도 깊은 울림을 주었다. 결국 투자자는 로맨틱 라이프와의 투자 계약을 승낙했고 민준은 그렇게 '로맨틱 라이프'의 구원 투수가 되었다.
민준은 '로맨틱 라이프'를 성공적으로 이끈 공으로 승진했고 이후로도 엄청나게 활약했다. 그의 이름은 업계에 빠르게 퍼져나갔고 이후 회사에서는 민준이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신임 이사로 발탁했다. 파격적 인사에 민준의 영향력과 파급력은 더욱 커져갔다.
그러던 어느 날, 민준을 해고했던 MS에서 로맨틱 라이프로 연락이 왔다. MS는 현재 '인싸 거품 샴푸'를 비롯한 신제품 개발 및 판매 부진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각종 콜라보 마케팅에 착안해 로맨틱 라이프에 생활용품 브랜드 콜라보 제품 협업을 제안했다.
운명이란 이런 것일까 로맨틱 라이프는 MS가 버린 민준에게 그 협업 프로젝트를 맡겼다.
민준은 담담한 표정으로 MS의 회의실에 들어섰다. 그곳에는 자신을 해고했던 상사와 과거 자신의 아이디어를 가로챘던 우혁진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민준을 보고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 유명한 로맨틱 라이프의 박 이사가 우리 회사에서 짤린 그 박민준씨였어?!"
혁진은 민준의 눈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민준은 차갑고도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미 분석은 끝나있었다.
"우혁진 씨, 그리고 부장님. 여러분들은 '인싸 거품 샴푸'에 보여지는 껍데기만 씌우셨습니다. 그 안에 본질은 없었습니다. 인플루언서와 보여주기식 거품으로는 시장을 선도하지 못합니다. 이 제품의 본질은 '자연'과 '건강'입니다. 저는 이 제품에 '진심'이라는 옷을 입히겠습니다."
민준은 자신이 과거에 겪었던 시련과 좌절을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나온 새로운 제품의 컨셉과 콜라보 제품에 대한 전략도 막힘없이 브리핑했다. 그의 말은 MS의 모든 관계자들을 압도했고 과거의 오만함과 독선은 놀라움과 부끄러움으로 변했다. 누가보아도 민준외에 다른 대안은 존재하지 않아 보였다.
"박 이사님, 저희 '인싸 거품 샴푸'가... 사실 어려움이 많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재고처리부터 마케팅과 후속모델 준비까지 말씀하신 방법이라면 이번 콜라보 협업을 통해 모두 해결될 거 같습니다." 민준의 승리였다. 설득의 마법서가 승리한 걸지도 모르지만 당장 민준에게는 그런 것이 중요하지 않았다. 다음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든 것이 또렷했다.
"협업 조건은 한 가지입니다. 모든 과정의 총괄은 저입니다. 아시다시피 기획에 따른 수익배분 방식을 따르고 '인싸'라는 단어는 더 이상 사용하지 않겠습니다. 하나씩 출시해 나가겠지만 첫 번째 콜라보 샴푸는 새로운 이름을 붙이겠습니다. 첫 콜라보 제품명은 '녹차 샤샤샤 샴푸'입니다."
민준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MS를 훤히 들여다본 그는 협업을 거절함으로 MS에 타격을 줄 수 있었지만 복수 대신 구원을 택했다. 자신을 나락으로 떨어뜨렸던 회사에 다시 한번 기회를 준 것이다. 이로써 말의 능력은 그에게 복수의 도구가 아닌 평화의 도구가 되었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