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6. 마법서의 침묵

by 빛솔

민준의 하드캐리로 진행된 협업제품은 그야말로 초대박이 났다. 녹차 샤샤샤 샴푸 대란, 샴푸 품절 사태가 검색어를 장악했고 웃돈까지 얹어 리셀되고 있었다. 대기업에서 출시한 생활 건강 제품 중에는 처음 있는 일이었고 '로맨틱 라이프'의 젊은 이사로서 그의 이름은 업계에 파란을 일으켰다. 말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그의 능력은 경이로웠다. 그리고 그의 기획과 멘트는 언제나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하지만 민준의 성공을 의심하는 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MS의 우혁진이었다. 혁진은 민준의 과거를 알고 있었기에 그의 갑작스러운 변화를 이상하게 여겼다.

그러던 어느 날 혁진은 민준에게 협업프로젝트 성과에 대한 서류를 전달하러 갔다. "이사님은 잠시 회의로 자리를 비우셔서 20분 정도 기다리셔야 되는데 따로 일정을 잡아드릴까요?" 비서의 말에 혁진은 말했다. "괜찮다면 안에서 이사님을 기다려도 될까요? 오늘 꼭 보여드려야 하는 중요 서류여서요." "네, 잠시만요." 비서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어 확인하더니 집무실로 안내했다. 혁진은 자리를 비운 민준의 집무실을 둘러보다가 책상 위의 다이어리에 시선이 머물렀다.
조심히 펼쳐보는 혁진. 그 안에 적힌 메모들 발견하고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고서점, 설득의 마법서, 혀를 깨무는 연습...' 혁진은 메모의 내용들이 다 믿어지진 않았지만 민준의 능력에 숨겨진 비밀이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박민준. 역시 뭔가 있을 줄 알았다니까. 네가 달라진 게 이거 때문이었어?' 혁진이 민준의 다이어리를 휴대폰 카메라로 기록하려는 순간 비서가 들어왔다. "이사님께서 오늘 회의가 늦어져서 오시기가 어렵고 따로 일정 잡으시면 좋겠다고 하십니다."
"네 그러면 이 서류는 전달 부탁드리고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혁진은 로맨틱 라이프 사옥을 나오며 서둘러 한 기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박민준 이사. 바짝 붙어보면 좋은 게 나올 겁니다. 조만간 한번 뵙죠."

한편, 민준은 '떠오르는 젊은 경영인'으로 각종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유명 토크쇼 <인터뷰>에 출연한 민준은 자신의 성공 비결을 묻는 질문에 잘 정리된 핵심과 함께 능수능란하게 답했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시청자들을 사로잡았고 실시간 검색어 순위는 '박민준'이라는 이름으로 도배되었다.

강력한 말의 힘에 취한 민준은 점차 위험한 유혹에 빠졌다. 그는 마법서의 힘이 어디까지 통하는지 시험해보고 싶었다. 민준은 자신에게 열광하는 사람들이 신기하기도 했고 곧 회사 인사발령 때 영향력 확보하기 위해 SNS와 언론을 통해 은밀한 여론몰이를 시작했다. 그의 말은 회사의 혁신과 현 부회장의 자질 부족 문제를 파고들었고, 민준을 지지하는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사내에서도 부회장은 자격론에 시달리게 되었고 결국 민준은 회사 내 부회장 자리를 순조롭게 강탈하게 되었다.
민준이 처음부터 그러려 했던 건 아니었다. 그저 '말'의 힘이 가진 경이로움에 매료되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민준은 점차 자신이 아닌 마법서의 힘에 이끌려가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의 말은 진심이 아닌 권력을 향한 욕망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민준은 부회장으로서 해외사업부 확장에 총대를 메었다. 거대 기업 'MS'와의 협업을 성공시킨 후 그의 야심은 더욱 커진 상태였고 그는 말의 힘으로 세계 시장을 손에 넣으려 했다. 그는 출장을 앞두고 책상 위 마법서를 다시 한번 어루만졌다. 그의 유일한 무기이자 불안한 마음을 채워주는 안식처였다. 돈이야 전과 비교할 수 없이 많아졌지만 더 좋은 거처지로 옮기지 않는 이유도 이 마법서 때문이었다.

미국으로 해외 출장에 나선 민준.
그러나 해외 출장 중 예기치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 호텔 로비에 울려 퍼진 한 아이의 울음소리에 민준은 잠시 걸음을 멈췄다. 아이의 손에는 찢어진 동화책이 들려 있었다. 아이는 동화책을 붙들고 서럽게 울고 있었다. 민준은 아이에게 슬쩍 눈길을 줬을 뿐 걸음을 재촉했다. 민준은 변했다.
이후 도착한 해외 협력사와의 미팅 자리에서
그의 입에서 엉뚱한 말들이 나왔다. "우리가 함께하는 게 의미가 있을까요?" 민준은 당황하며 다시 말을 고쳐보려 했지만 이제 그의 입은 굳어버렸다. 마법서의 힘이 사라진 듯 그의 말은 더 이상 힘이 없었다. "우리가 함께 하는 게.. 얼마나 큰.. 의미가 되겠냐는 말이 헛나왔습니다. 죄송합니다. 장비서!" 민준은 비서를 불렀다. 장비서는 민준이 급히 써 내려간 메모를 전해 받고 말했다. "오늘은 부회장님 컨디션이 많이 안 좋으셔서 이 정도로 하시고 내일 일정 중 다시 협의하는 게 어떠신지요?" 미팅은 급히 미뤄졌고 민준의 이상함을 걱정스럽게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뒤로한 채 민준은 황급히 호텔 방으로 돌아갔다.
'어떻게 된 거지? 설득의 마법서라면 분명 집에 잘 펼쳐놓고 왔는데... 도대체 뭐가 잘못된 거야!'


그 시간 민준이 방에 펼쳐져 있던 설득의 마법서는 왜인지 아무런 빛도 발하지 않았다. 텅 빈 페이지는 차갑게 침묵하고 있었다.
민준은 불안감에 휩싸였다. 자신을 지탱해 주던 유일한 힘이 사라진 것이다. 다음날, 다시 재개된 해외 협력사와의 미팅 자리에 나선 민준은 제대로 된 말 한마디 하지 못했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저... 그게..."를 반복했고 상대방의 얼굴에는 실망과 비웃음이 교차했다. '저 사람이 진짜 로맨틱 라이프 부회장 박민준 맞아?' 미팅은 어쩔 수 없이 서면으로 다시 협의하기로 양해를 구하며 마무리되었다. 민준의 위기는 이제 시작되었다. 그는 모든 것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였다.

화, 토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