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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빗소리 Jul 09. 2019

반전의 명수

요즘 호두의 이앓이가 다시 시작되었다. 부쩍 짜증과 떼쓰기, 징징이가 늘어서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친구가 한 번 이를 잘 살펴보라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송곳니가 언제 나올까 카운트다운을 혼자 하고 있었다. 호두는 성격이 참 온화한 아이였는데, 이가 아파 컨디션이 안 좋아져서인지 작은 일에도 화를 내고, 뜻대로 안 되면 엉엉 울어버렸다. 내가 주방에서 조금만 일을 할라치면 통곡을 하고, 누워 버리는 모습을 보며 등에서 식은땀이 줄줄 났다. 가장 절정은 삼시 세끼 내가 밥을 먹을 때마다 펼쳐졌다. 밥 먹지 말라고 엉엉 울며 떼쓰는 호두를 보며, 계속 밥을 먹는데, 자꾸만 체를 했다. 신경이 예민해서 우는 소리 듣는 것을 별로 안 좋아하는데, 우는 소리를 배경음악으로 들으며, 밥을 먹으니 자연적으로 위가 긴장이 되었나 보다.


엊그제 남편에게 불평불만 카톡을 보내지 않기로 다짐하였으나 금방 작심삼일이 되었다. 그래도 말투는 좀 누그러지게 보냈다.


"육아는 왜 이리 어려울까? 오늘 제대로 된 밥을 한 끼도 못 먹었어."


남편은 어떡하냐며 걱정하는 답장을 보냈다. 어떻게 해줄 수 없다는 걸 알지만, 누구한테라도 이야기하지 않으면 꼭 폭발할 것만 같이 갑갑했다.


누구나 육아의 힘든 포인트가 다르겠지만, 나는 육아하며 가장 힘들 때가 이렇게 가슴이 조여올 때다. 밥 먹고, 화장실 가고, 힘들면 잠시 쉬는 나의 생리적 욕구들 조차 하지 못하게 하고, 우는 아이를 볼 때마다 심장이 막 두근거리고, 가슴이 조여 온다. 아이의 마음을 가만 들여다보면 너무나 좋아하는 엄마와 24시간 콕 붙어서 즐겁게 놀고 싶은데, 엄마가 중간중간해야 할 일이 생기니 싫은 것이 이해가 가기도 한다. 엄마 입장에서는 내 몸을 내 맘대로 못 쓰는 이 오체불만족의 상태가 얼마나 갑갑한지.


물론 호두가 항상 이러는 건 아니다. 그 이름도 듣기 힘든 급성장기, 이 앓이 시기마다 진상 호두가 등장하는 것 같다. 평화로운 시기에는 비교적 잘 노는 편이나 그래도 아직 어리고 무분별한 시기라 위험한 상황에 놓일 때가 있어 자꾸만 들여다보느라 해야 할 일이 매끄럽게 잘 되지 않는다. 해야 할 일을 자꾸만 끊어서 해야 하는 상황 자체가 상당한 스트레스이다.


호두에게 옮은 코감기와 급성장기로 인한 마음의 피로가 겹쳐 요 근래 나는 몹시 지쳐있다. 호두도 크느라 힘들 것 같긴 하다. 어제도 서로 힘든 하루를 보내고 재우는데, 호두가 갑자기 외계어로 한참을 떠들었다. 에에에우아이어에? 우에어부부부부! 아으아으아이! 5분 넘게 혼자 떠드는데 왜 이렇게 웃기던지. 순간 혼자 한참 떠드는 호두가 너무 신기하고 귀여워서 아 행복하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그렇게 힘들어해 놓고는 5분의 웃음으로 하루를 그래도 행복했던 날로 포장하는 내가 신기했다.


나를 바라보며 좋을 때라 말했던 어른들도 그렇게 하나씩 곱게 포장한 기억을 떠올리며 그렇게 이야기하셨던 걸까? 그분들도 돌아가면 다시금 극한까지 치닫는 몸과 마음에 힘겨워하시지 않을까? 추억은 참 힘이 세다. 현실의 힘듦과 행복의 비율 따위는 무시해버리고, 행복 한 스푼으로 모든 것을 곱게 포장할 수 있으니 말이다.


육아의 묘미가 그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먹물 한 방울에 물이 까매지는 것처럼 나에게 필요한 건 아이와의 행복한 순간 한 방울일지도 모르겠다. 가치 있는 모든 일은 원래 힘겨운 것이니 힘든 건 당연하다 쳐도 그 힘든 것을 계속해나가려면 계기가 있어야 할 텐데, 그 한 방울로 바뀌어 버리는 오늘의 기억이 내일의 힘이 되지 않을까.


오늘 아침은 마트와 약국을 들러야 했는데, 짐이 많아 호두를 한 손으로 잡고, 한 손에는 짐을 들었다. 그러나 길 가다 마주치는 모든 것을 만져야 하는 호기심 쟁이를 한 손으로 컨트롤하기는 힘든 일이었다. 의자 하나, 입간판 하나, 화분 하나. 하나씩 만져보며 가는 그 길이 천리 같이 느껴졌다. 덥고, 지쳐서 슬슬 짜증이 솟는데, 호두가 위를 보며 갑자기 손을 잡았다 폈다 하며 오라는 표시를 한다. 좋은 것을 볼 때마다 그러는 호두인지라 순간 위를 보는데, 휴대전화 판매점에서 설치한 만국기가 휘날리고 있었다. 까르르 웃으며 오라 오라 하고, 폴짝폴짝 뛰는 호두를 보며 나도 함께 웃었다. 두 눈 가득 깃발을 담은 호두와 호두 머리 위의 깃발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아마도 오랫동안 잊지 못할 한 장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의 기분과 상관없이 지금 이 자리에서 나의 행복을 발견하는 어린 호두가 오래도록 기억날 것 같다.


그렇게 오늘 나의 하루는 다시금 행복 한 스푼으로 곱게 포장을 완료했다. 먼 훗날 나는 호두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엄마 식사할 때 진상 부리던 호두는 잊고, 만국기를 보며 폴짝폴짝 뛰던 모습을 생각할 것만 같다. 그런 다정함의 온기가 호두와 나 사이 많았으면 좋겠다. 그 온기가 쌓이고 쌓여 언젠가 십 대가 된 호두와 냉랭해질 때 이따금씩 꺼내어 마음을 덥힐 수 있도록 말이다.


내일도 딸과 힘겨운 싸움이 예상되는 하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대하지 않고 만나는 반전의 순간을 기다려본다. 크든 작든 호두는 늘 반전의 명수였으니.


떼 부리던 못난이 나의 호두야, 엄마를 너무 사랑해서 엄마를 너무 힘들게 하던 그 어린 사랑을 오래도록 기억할게. 내일도 멋진 반전 부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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