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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빗소리 Jul 20. 2019

이 음식의 첫 주인은 당신입니다

얼마 전 평소 즐겨보는 요리 프로그램을 보다가 '고명'의 의미를 알고 감동한 적이 있다.


이 음식의 첫 주인은 당신입니다.


고명이 그런 의미로 음식 위에 올려지는 줄 처음 알게 되었다. 요리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고명이란 건 사실 조금은 귀찮은 존재이다. 고명까지 올려 음식을 완성할 때의 마음을 생각해보면 아마도 나는 이 뜻을 오래전부터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 음식의 주인인 당신에게 정성을 다해 음식을 내어 주고 싶은 마음. 그 마음이 고명의 뜻과 일치했다.


남편은 따뜻한 음식의 느낌을 분명히 아는 사람이다. 요리에 조예가 깊으시고, 매사 모든 것에 열과 성을 다하시는 어머님의 아들로 태어나 매일 진수성찬을 받으며 산 사람답다. 그 사람이 나를 가장 힘들게 만들었다는 건 대반전이지만 말이다. 결혼한 뒤 남편의 그런 면을 발견하고 황당했다. 냉장고에 한 번 들어갔던 음식은 웬만하면 먹지 않고, 갓 만든 음식만 먹었다. 그렇게 어머님은 갓 만든 음식으로 아들을 키워오신 것이다. 그래도 양심은 있어서 남편은 내게 가짓수는 상관없다, 부디 하나 정도는 갓 만들어주면 안 되냐 부탁해왔다. 국이든 반찬이든 갓 만든 한 가지 음식만 있으면 밥을 먹었다. 그렇게 내 요리는 시작되었다.


사람은 왜 이다지도 간사할까. 지난 9년 동안 남편의 그런 면은 나를 가끔씩 분노케 했지만, 아이가 태어나니 나 또한 시어머님의 마음이 되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내 새끼를 위해 따뜻한 음식을 매끼 차려주고 싶었다. 물론 나는 시어머님만큼의 노력과 체력이 안 되는 사람인지라 미리 만들어 냉장고에 저장해서 두고두고 준다는 단점이 있지만, 아이가 음식을 먹기 전에 꼭 찜기로 덮여서 따뜻한 채로 주고는 했다.


살면서 내게 잘 차려진 밥상만큼 큰 감동을 주는 것은 없었기에 아기의 밥상에는 늘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아기가 밥을 먹기 시작한 후부터 여러 요리책을 보며, 되도록 다양한 재료, 다양한 방법을 사용하여 아이에게 맛의 세상을 일깨워주려 노력했다. 고맙게도 아이는 내 요리를 흥미로워했고, 입으로 열심히 또 다른 세상을 알아갔다.


아이의 밥상을 차리는 일은 내게 가장 즐거운 일이면서도 가장 부담스러운 일이다. 매일 챙기는 끼니지만 왜 그리 부담스러운지. 잘하고 싶은 욕심이 부담의 원인일 것이다. 한 켠의 위안은 요리는 참 정직해서 경험만큼 쌓이고, 쌓인 것만큼 자신감도 생긴다는 점이다.


좋은 밥상을 차릴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재료이다. 유기농으로 재배된 작물, 특히 신선한 재료를 좋아하는데, 지인을 통해 근처 시골에서 유기농으로 모든 농작물을 재배하고 있는 농부의 꾸러미 서비스를 알게 되었다. 일주일에 1회 랜덤으로 제철 채소가 배달되는 서비스인데, 발송하기 하루 전까지는 꾸러미 내용을 알 수 없어 더 흥미롭다. 매번 선물을 받는 느낌으로 꾸러미를 받는다. 내가 장을 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생전 처음 요리해보는 재료를 만나는 순간도 꽤 있다. 친절한 농부님께서 각 재료마다 재배되는 과정, 중요한 팁, 요리 요령까지 소식지로 전해주시기에 그것을 참고하여 요리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시골의 꾸러미를 받으며 나는 갓 따낸 채소가 주는 신선함이 무엇인지 처음으로 배웠다. 내가 마트에서 만나게 되는 채소들은 언제 수확했는지, 어디에 보관되어 왔는지 출처를 알 수 없는데, 이 꾸러미의 채소들은 정성으로 키우고, 하루 전날 수확을 마친 것들이다. 집안에 농사 지으시는 분이 안 계시기에 내게는 갓 따낸 채소를 처음 만나는 순간이었다. 옥수수가 그렇게 시간에 의해 맛이 좌우되는 식물인지, 갓 따낸 완두콩이 그렇게 달콤할 수도 있는지를 배웠다.


가장 감동스러웠던 순간은 아카시아꽃 철에 보내주신 아카시아꽃이었다. 1년에 1회만 보내주시는 레어템이라는데, 운 좋게도 나는 꾸러미를 시작할 때 받았다. 아카시아꽃을 넣어 밥을 지어봤는데, 얼마나 향기롭던지. 남편과 킁킁 거리며 맛있게 먹은 기억이 있다. 완두콩 철에는 아기와 달콤한 완두콩 밥을 지어먹고, 감자 철에는 햇감자를 간식으로 호호 불며 쪄먹었다. 사랑하는 아기에게 가장 좋은 재료로 음식을 만들어줄 수 있다는 것은 소중한 경험이었다.


나는 내 아이가 정성 어린 밥상의 느낌을 잘 가지고 있는 아이로 자라나길 소망한다. 고민하고 노력하여 마침내 지어졌던 그 밥상 속에 아이를 향한 진심이 가득 어려 있음을 아이 또한 무의식 중에 느끼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 진심이 모여 아이가 살아가야 할 앞날에 진득한 힘이 되어주길 바란다.


이 음식의 첫 주인은 당신입니다. 그리고 이 음식은 나의 사랑입니다.


시골 꾸러미로 만든 밥상. 호박잎 된장찌개, 노각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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