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빗소리 Jul 27. 2019

하필 그런 걸 닮냐

묘하게 느껴지던 그 말

아이가 커갈수록 시댁행이 더 잦아지고 있다. 시부모님은 나와 닮은 분들이다. 누군가를 재촉하는 일을 꺼려하신다. 내가 먼저 전화하기까지는 전화하지 않으신다. 본인들의 전화가 나에게 부담스러울까 걱정하신다. 아이가 보고 싶은 마음을 꼭 참으셨다가 내가 전화를 걸면 그 마음을 한껏 모아 '그래, 오고 싶으면 오려무나' 답하시고는 한다. 그것은 며느리에 대한 예의의 표현이다. 보고 싶어도 그 마음을 즉각 표현하지 않는 마음. 적절한 시기에 반드시 올 것이라는 믿음. 그 예의와 믿음을 나는 존경한다.


존경하는 시부모님이기에 그분들이 주시는 아픔이 더 크게 느껴지곤 한다. 그 아픔은 주로 집안 문화의 차이에서 온다. 우리 집안은 아무리 그게 사실이라 해도 남에게 상처가 될만한 말은 하지 않는 게 낫다는 문화이고, 시댁은 솔직하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좋다는 문화이다. 서로 다른 집안 문화를 가진 두 남녀가 만났으니 우리의 말은 서로에게 얼마나 많은 오해를 낳았을까. 나의 침묵은 그의 오해를 불러일으켰고, 그의 솔직함은 깊은 상처가 되곤 했다. 주변 사람에게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며 끙끙 속으로만 앓는 나를 그는 이해하지 못했고, 나에 대한 의견을 가감 없이 말하여 상처를 주는 그를 나는 용서하지 못했다. 그와 비슷하게 말하는 시부모님의 말 또한 가끔 내게 비수로 꽂혔다.


이유를 알 수 없으나 호두의 아토피는 어제 정점을 찍었다. 태어나서 이렇게 아토피가 심해진 적은 처음이었다. 온몸 구석구석 상처가 나서 스테로이드 연고를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발라야 할지도 난감했다. 아이가 가려워서 피가 날 때까지 긁으려 할 때마다 나는 그 손을 막았고, 아이는 울었다. 아이가 나 몰래 긁는 모습, 내가 막는 행위가 짜증 나 우는 모습을 아침 나절부터 반복하니 정오쯤 되자 편두통이 시작되었다. 아이는 고통의 정점으로 향했고, 나는 우울의 정점을 찍었다. 우는 아이를 따라 너무 답답해서 마구 소리 지르고 화내고 싶은 지경이었다. 그래도 나보다 더 고통스러울 아이를 생각하여 참을 인을 수없이 그리다 보니 하루가 지나갔다.


내가 왜 그랬을까. 아이의 몸 상태를 고려하지 않고 주말 시댁행을 결정했다. 어머님과 전화로 약속하다 보니 그제야 아이 몸이 생각이 났다. 분명 한 마디 하실 텐데. 이미 아이가 온다고 청소하시고 준비하실 어머님을 생각하니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차피 오랫동안 들어야 할 소리인데, 부딪혀보자는 마음으로 시댁을 향했다.


"아이 몸이 왜 이러냐."

아이의 몸 구석구석 난 상처를 보신 아버님께서 언짢아하시며 말씀하셨다. 아이가 얼마나 고통스럽겠냐고 속상해하셨다. 키우시던 개가 진드기가 생기는 모습을 보시며, 사람이었다면 얼마나 가려워서 미칠 것 같았겠냐고, 너무 불쌍해서 맨손으로 진드기를 잡아주셨다며 이야기를 꺼내셨다. 말 못 하는 아이가 얼마나 힘들지 심란하신 눈빛이었다.


"하필 엄마한테 그런 걸 닮어."

마음이 쪼달리면 변명이 궁색해진다. 안 좋은 것 먹이는 것 없이 밥도 여러 좋은 재료로 잘해주고, 보습과 연고도 잘 발라주고 있는데, 왜 그러는지 잘 모르겠다. 최선의 노력을 하고 있다. 병원도 예약했다. 구구절절 변명이 길어졌다. 스스로 점점 길어지는 말의 꼬리를 느끼며, 마음이 서글펐다. 나는 왜 말을 끊지 못하고 계속하고 있는 것일까.


시아버님처럼 솔직하게 말은 못 하시고, 아이의 상처 하나하나를 진드감치 쳐다보시는 시어머님의 모습이 더 불편해졌다.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까. 더 눈치가 보였다. 또다시 나의 말은 길어진다. 노력은 하고 있지만, 자꾸만 이러네요. 구구절절 말은 길어지지만, 어머님의 침묵도 길어진다. 마음이 더 초조해진다. 차라리 아버님처럼 말씀해주시면 좋겠는데.


이런 엄마의 마음은 모른 채 아이는 마냥 행복하다. 아이는 시부모님을 참 좋아한다. 엄마와 다른 방식으로 놀아주는 사람들, 왜인지 엄마처럼 나를 사랑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 아이는 이미 몸으로 알고 있다. 자신이 그분들에게 대단한 존재라는 것을. 집에서 심심함에 몸부림치던 오후와 달리 아이의 저녁은 환한 웃음으로 가득 찼다.


졸린 아이를 차에 태워 집으로 오는데, 비가 내렸다. 착잡한 마음으로 비 내리는 거리를 한참 바라보았다. 희뿌연 불빛처럼 내 마음도 부옇게 부풀어 오른다. 남편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까. 싸우고 싶진 않고, 그냥 속상한 마음을 전달하고 싶다. 이렇게 저렇게 고민하다 말을 꺼내본다.


"엄마 닮아서 그렇다는 말을 들을 때면 아이에게 미안해져."

 

말의 행간에 닮긴 평화의 의지를 눈치챘는지 남편도 담담히 말한다.


"좋은 것도 닮고, 별로인 것도 닮는 거지. 좋은 것도 많이 닮았잖아.”


무심한 듯 말하는 그의 말이 다정한 말보다 더 와 닿았다.


시부모님은 아이가 엄마를 닮아 책을 많이 읽는다 하셨다. 엄마를 닮아 예쁘고, 엄마를 닮아 똑똑하다 하셨다. 그 말을 들을 때 자랑스러워했던 자신이 부끄럽다. 엄마를 닮아 아토피이고, 엄마를 닮아 예민하다는 말로 금방 뒤집힐 말들에 나는 뭐가 그리 좋았을까. 그저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군 하며 덤덤히 넘어갔어야 했다. 좋았던 마음에서 추락하니 더 아프다. 아무렇지 않았다면, 지금도 아무렇지 않았을 텐데.


그 한 마디가 계속 걸렸던 걸까. 육퇴 후 글을 쓰고 있는 내게 남편이 자꾸만 말을 건다. 짜파게티 먹을래? 아이 침대에 놓아둔 물병, 지가 자다 일어나서 먹으라고 둔 건가? 소화기가 약해 밤늦게 잘 먹지 않고, 아이 물병을 그동안 침대에 놓아둔 적이 없는데도 굳이 말을 건다. 아까 속상했지?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 직진의 위로를 하지 못하는 그는 에둘러 다른 언어로 계속 위로를 말한다.


미안하지만, 그의 위로와 상관없이 나는 슬프다. 어쩌면 시부모님의 말과 상관없이 슬픈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저 지금은 아이가 가려움에 고통스러워한다는 그 사실이 내 슬픔을 충만히 채우고 있어 더 이상 다른 슬픔을 채울 수가 없다. 감수성이 예민해서 금방 동화되는 편이라 슬픈 책을 잘 읽지 않는데, 요새 읽는 책은 다 슬픈 책이다. 신형철의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은유의 '다가오는 말들'. 두 책은 한결 같이 우리 주변에 있는 슬픔에 대해 이야기한다. 재밌는 것은 기쁠 때 읽는 슬픈 책은 괴롭지만, 슬플 때 읽는 슬픈 책은 은근한 동반자가 되어주는 느낌이다. 같이 슬퍼해주는 책이 있어서 좀 덜 외롭다. 나의 슬픔에 잠식되지 않고, 다른 슬픔으로 슬픔의 영역을 확장한다. 그러한 경험이 나를 좀 더 넓게 만드는 느낌이다.


아이를 낳기 전에는 분노가 되었던 시부모님의 말씀이 지금은 묘하게 느껴진다. 그 말이 아프면서도 아이의 고통에 진심으로 동조하고 가슴 아파하시는 모습에서 또 다른 나를 발견한다. 남편을 사이에 두며 서로를 바라보았던 우리는 이제 같은 자리에 앉아 아이를 바라본다. 그 작은 아이가 그렇게 큰 어른들의 위치를 바꾼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나는 요새 아이의 아토피로 인해 많이 슬프다. 그리고 글을 통해 그 슬픔을 최대한 멀찍이서 바라본다. 나는 무엇 때문에 슬픈지, 어떨 때 가장 슬픈지, 그 슬픔 뒤에 어떤 생각이 드는지. 찬찬히 바라본다. 그렇게 나라는 사람에 대해, 나라는 사람이 느끼는 슬픔에 대해 공부한다.


내일도 아이의 피부를 바라보며 무척 괴로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다시 밤은 찾아올 것이고, 그렇게 하루 동안 모인 슬픔을 또 찬찬히 바라보는 시간을 갖게 될 것이다. 비록 괴로울지라도 내 모든 삶의 순간은 소중하다. 그 괴로움의 기록 속에 나는 내 자신과 사랑하는 호두와 세상의 슬픔에 대해 더 이해하게 될 것을 믿는다.







매거진의 이전글 고통을 응시하는 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