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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빗소리 Sep 20. 2019

엄마라는 직업에도 장인이 있다면

아기를 돌보다 보면 마치 물이 턱 밑 같이 차오르는 듯 갑갑해지는 순간이 있다. 한숨 쉬고 싶지 않은데, 숨이 막 조여 오는 느낌이라 나도 모르게 한숨을 쉬게 된다. 해야 할 집안일과 놀아 달라고 우는 아기 사이에서 하염없이 방황하며 그렇게 하루가 흘러간다. 엄마가 밥을 차려야 호두가 밥을 먹을 수 있다고, 청소기를 돌려야 호두가 아야 하지 않다고 설명해줘도 말을 모르는 호두는 더 큰 소리로 운다.


나도 호두 마음처럼 하루 종일 호두와 놀아주고 싶은데, 집안일이 쌓이고 쌓여 밤까지 초과근무(?)를 해야 하는 상황이 버겁다. 아기를 재우고 나면 온몸에 힘이 쭉 빠져서 기력이 없어진다. 아마도 내 생체리듬이 아기의 깨고 잠듦에 맞추어져 있나 보다. 아기 재운 뒤 멍하니 소파에 앉아 있다가 귀찮은 몸을 다독다독하며 남은 집안일을 하다 보면 하루가 금세 끝이 난다. 초과근무를 피하기 위해 호두와 놀아주며 틈틈이 집안일을 하는 건데 호두는 이마저도 마음에 들지 않나 보다.


호두는 내게 비할 수 없는 행복을 주는 존재인데, 왜 나는 호두와 있는 시간이 버겁게 느껴질 때가 많을까. 호두가 지금 보다 더 어릴 때는 이런 내가 나쁘게 느껴졌었다. 아기에게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게 미안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호두와 17개월을 함께 해오니 이제는 이런 내 감정에 대해서 점점 받아들이고 있다. 내가 아니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의 의식주를 책임지는 일은 꽤 큰 부담감이 함께 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기란 존재는 그런 것 같다. 내가 아니면 아무것도 할 수 없기에 더 애틋하고 애착이 가며 보호해주고 싶고, 내가 아니면 아무것도 할 수 없기에 더 부담스럽고 버겁다.


밥 먹이고, 설거지하고, 기저귀 갈아주고, 빨래하고, 놀아주고, 청소하고, 목욕시키고, 또 밥 먹이고..... 그렇게 홍길동처럼 이리 번쩍 저리 번쩍 하다가 어느덧 다다른 하루의 끝. 호두의 하루가 건강하고 알차게 잘 끝났다는 안도와 함께 스스로에게 애썼다고 다독여본다. 어느덧 길어진 호두의 팔과 다리만큼 초보 엄마의 육아 근육도 점점 자라나고 있다.


엄마라는 직업에도 장인이라는 게 있다면 나는 언젠가 장인이 되고 싶다. 그러나 나는 육아에 재능이 전혀 없다. 잘해오지 못했고, 앞으로도 잘할지 모르겠다. 다만 내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호두가 태어난 뒤 지금까지 모든 순간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왔다는 것이다. 앞으로도 호두를 키우며 나는 늘 최선을 다할 것이다. 처음 만나는 당황스러운 상황에 여전히 놀라며 괴로워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그 일에 익숙해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할 것이다.


애쓰는 나에게 가족 중 한 명이 상처를 준 적이 있다.


"그렇게 한다 해서 호두가 기억이나 해줄 것 같아? 소용없어."


그 말은 꽤 아픈 가시가 되어 한동안 나를 힘들게 했다. 어른에게 말대답할 수는 없어 넘어갔지만, 그 상황을 떠올릴 때마다 상상 속에서 반복하여 대답하곤 한다.


"기억 안 해줘도 상관없어요. 최선을 다했던 내 모습을 나는 기억하니까요. 아기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내 자신의 삶에 충실하기 위해 그러는 거예요."


호두는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나도 아기 때의 엄마가 나를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호두를 대했던 나의 태도를 내 자신은 오래도록 기억할 것이다. 나는 내게 주어진 상황 속에서 열심히 살았을 뿐이고, 열심히 살았던 순간들은 비록 힘들었을지라도 꽤 보람 있게 스스로에게 남을 것이라 생각한다.


엄마이기 전에 나는 '나'다. 지금 이 순간들은 엄마로서의 순간이지만, '나'란 사람의 순간이기도 하다. 엄마라는 역할에 본래의 내가 가려지길 원치 않는다. 엄마여도 엄마가 아니어도 나는 지금 눈 앞에 닥친 순간에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내일도 나는 하루의 무게에 갑갑한 숨을 몰아쉬는 순간을 맞이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하루의 끝에는 잘해왔다고 스스로를 다독다독 해주고 싶다. 사실 나는 그리 잘하지 못하는 하루가 더 많다. 잘하지는 못하지만, 내 수준에서는 가장 잘해온 것이라 생각한다. 못난 모습 그대로 엄마가 되었고, 못난 모습 안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기에 더 스스로를 다독여주고 싶은 것이다.


있는 모습 그대로의 엄마, 있는 모습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엄마. 나는 그런 엄마가 되고 싶고, 적어도 나라는 사람의 한계 안에서는 장인 엄마가 되고 싶다.


오늘도 고생한 나, 그리고 엄마와 지내느라 애써준 호두 모두를 위해 도닥여보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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