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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빗소리 Oct 21. 2019

고군분투의 기억

인상 깊었던 기억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더 짙은 잔향을 남긴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잊히지 않고, 여전히 생생하게 내 삶에 영향을 주는 기억들. 그중에 하나가 오늘 생각이 났다. 뉴질랜드 국외 연수를 다녀왔던 경험이다.


언제 또 올지 모르는 뉴질랜드를 흠뻑 느끼는 데에 집중하고 싶었지만, 그때 당시의 나는 그러지 못했다. 10일 차에 예정되어 있던 부채춤 공연 때문이었다. 숙소에서도 계속 좁은 객실 안에서 열심히 춤 연습을 했다. 동선이 도저히 나오지 않아 모두 잠든 밤에 엘리베이터 있는 통로로 나가 조용히 혼자 노래 없이 연습했던 적도 여러 번이다. 연수로 인해 바쁜 낮 동안의 일정을 보내고 나면 스마트폰도 하고 싶고, 누워서 쉬고 싶을 때도 많았지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부채춤 공연을 생각하면 걱정이 되어 벌떡 일어나서 다시 부채를 들었다.


속상했다. 함께 왔던 연수생들은 삼삼오오 모여 놀러 나가기도 하고, 쉬기도 하며 즐거이 보내던 밤 시간을 나는 그렇게 쉬이 즐기지 못했다. 사실 내가 공연을 맡게 된 이유도 자발적이지는 않았다. 나에게 부담된다는 것은 모두에게도 부담이 된다는 것. 모두 피하고 하기 싫어했던 한국 문화 알리기 공연이었는데, 그 당시 내가 준비하고 있던 일이 전통춤과 관련된 일이라 업무 담당자의 부탁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맡게 되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공연자 지정은 폭탄 돌리기 게임과 다름이 없었고, 그 폭탄은 내 몫이 되었다.


이왕 해야 할 일이라 피할 방법이 없었다. 그저 하루하루 휴식과 연습을 적절히 병행하며, 스스로의 마음을 달랬고, 공연을 차질 없이 준비했다. 속상함에 빠져 들기에는 내게 남겨진 시간이 많이 없었고, 지금 상황으로서는 공연을 망치는 것이 더 슬프고 무서운 일이었다.


시간은 금세 흐르고, 공연 당일이 되었다. 꽃신부터 머리 장식까지, 심지어 속눈썹까지 한국에서 바리바리 싸서 오느라 고생했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공연에서 아름다운 한국의 미를 보여주고 싶었다. 내 한복이 한국에서는 그리 특별한 한복이 아니었으나 뉴질랜드에서는 처음 보는 옷이었으므로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나에게 한국 공주가 입는 옷이냐 물어보는 사람도 있었다.


화장부터 머리까지 꼼꼼히 치장하고, 부채춤 독무를 위해 무대에 올라섰다. 나는 내성적이고, 부끄러움이 많은 사람이지만, 희안하게도 큰 무대에서는 담담해지는 면이 있다. 노래와 춤에만 집중하며 최선을 다해서 준비한 춤을 추었다. 춤을 추는 동안은 관객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세상에 노래와 나만 있는 느낌이었다.


노래가 끝나고, 함성과 박수가 터져 나왔다. 한국에서부터 1달 넘게 준비한 무대를 무사히 잘 마쳤다는 안도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후에 듣게 된 이야기가 몇 년 동안 한국 사람들이 와서 보여준 문화 공연 중에 가장 좋았다는 것이었다. 부족한 춤이었지만, 오랜 시간 동안 최선을 다해서 준비했기에 그 진심이 통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공연을 맡게 되고 준비하는 과정까지 모두 속상한 마음이 기저에 깔려 있을 정도로 힘들었던 시간이었지만, 결과적으로 한 편의 멋진 드라마를 찍은 것 같은 시간이었다. 어렵고 불편한 일이라도 최선을 다해서 그 일을 잘 해결해 가다 보면 결국 그 일은 내 삶의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요즘 부채춤 공연 생각을 참 많이 한다. 요즘의 내 생활이 그 공연과 참 많이 닮아있단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루하루의 내 삶은 어찌 그리 마음이 버거운지. 실제로는 그렇지 않지만, 가끔 숨이 막 가빠오는 것 같이 느껴질 때가 있다. 해결해야 할 수십 가지 일과 시시각각 엄마 손이 필요한 아이의 돌봄을 차례차례 해나가다 어느덧 고개를 들면 아직도 남은 많은 일에 마음이 갑갑해진다. 한 사람이 살면서 해야 할 모든 일을 내가 도맡아서 해준다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묵직하고, 부담스러운 일인 것 같다.


정신없이 일하다가 문득 보면 통통한 호두의 볼살과 동동거리는 발이 얼마나 귀여운지. 호두가 이렇게 예쁠 때이구나 새삼 생각이 든다. 이렇게 어여쁜 아이를 돌보는 일인데도 육아는 참 버겁고 어렵다. 피하고 싶을 때가 많다. 그러나 그런 피하고 싶은 시간들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나가며 최선을 다해야지만 이 순간들을 돌아볼 때 기뻐할 수 있을 것 같다. 적어도 후회스럽고 고통스러운 추억으로 남기고 싶지는 않다.


호두와 함께 추는 이 춤을 나는 잘 끝낼 수 있을까. 비록 능숙하진 못하더라도 좁은 숙소와 엘리베이터 앞을 오가며 최선을 다했던 그 마음처럼 매 순간 진심이 담겨 있길 바란다. 부족한 체력과 인성으로 매일의 육아에 실패를 거듭하는 엄마이지만, 호두에게는 그저 노력하는 그 모습만 기억에 남았으면 좋겠다.


오늘의 불편과 속상함이 언젠가는 노력의 귀여움으로 남길 바라며.... 희망을 안고 내일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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