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너의 고백을 듣고, 이 노래가 생각났어."
친구가 내게 김도현의 '그 광야로'라는 찬송 영상을 보내주었다. 나는 감사일기를 통해 친구에게 이런 고백을 한 적이 있다. 아무리 고독함을 즐기는 나여도 이런 상황 속의 '강제 고독'은 참 힘이 들다고. 외로워서 답답한 마음이 들 때 나는 드넓은 광야의 이미지를 자주 상상했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친구가 라디오에서 '그 광야로' 찬송을 들으며 나를 떠올렸다고 했다.
자의와 타의로 나는 고독 속에 있다. 아직 어린 아기가 바이러스로부터 보호될 수 있도록 아무와도 만나지 않는다. 집에서 아이와 있는 생활들이 길어질수록 물속에서 숨 쉬듯 갑갑해지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종종 남편의 퇴근이 늦는 날이면 잠들 때까지도 아이 외에는 그 누구와도 대화하지 못하곤 한다. 모두와의 단절. 그 두려움과 외로움이 나를 덮칠 때면 마음이 괴로워진다.
이찬수 목사님은 이런 상황을 두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지금 이 시간은 선물 같은 시간일지도 모릅니다. 온전히 혼자일 수 있는 이 시간 속에서 간절히 하나님을 찾고 만나십시오. 하나님과 더 친밀히 교제하고, 깊이 묵상하십시오. 그 시간들이 이 시기에, 앞으로의 시간에 분명히 도움이 될 것입니다."
고독이 선물이라니. 정말 하나님다우신 생각이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40일 동안 광야에서 홀로 고독의 시간을 보내셨다. 바울과 세례 요한, 엘리야 등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성경 인물 또한 화려한 세상을 버리고 고독의 시간들을 통해 주님을 만났다. 그러나 이게 말이 쉽지 고독 속에 오래 머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모든 즐거운 것들을 버리고 내 스스로 고독 속에 들어가는 일도 힘들지만, 온라인이 매우 발달한 사회에서 온라인 속에서도 온전히 고독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나와 연결된 모든 집단이 나를 혼자 있게 내버려 두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코로나 바이러스로 몸과 마음이 어려운 지금, 오프라인과 온라인의 사회가 모두 잠잠하게 되었다. 결국 고독의 진짜 얼굴을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타고나길 집순이이고, 사람들과 있을 때보다 혼자 있을 때 에너지가 더 차오르는 나이기에 잘 견딜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게 나의 오산이었다는 것을 시간이 흐르며 깨닫는다. 친한 사람은커녕 길 가다 지나가는 모르는 이의 얼굴 조차 볼 수 없는 상황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내가 무척 오만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 만나는 가게의 직원분, 문화센터의 선생님들과 아기 엄마들, 길가다가 지나치는 사람들. 친하지 않아도 매일 마주쳤던 사람들이 나의 외로움을 소복이 채워주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 눈빛들과 마주칠 때마다 나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고, 내가 사회 속에 들어가 있구나 하는 확신을 얻어왔다. 그렇게 나도 모르는 사이 누군가에게 마음의 빚을 지며 살아온 것이다. 그 모든 것들로부터 단절되며 나는 처음으로 진짜 외롭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고 있다. 그리고 그 외로움의 한가운데로 찾아오신 주님 또한 만나고 있다.
아이가 내 몸을 주장하고 있는 시간인지라 나의 수족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 어렵다. 내가 조금이라도 성경책을 읽을라치면 책을 집어던져 버리는 아이, 놀아달라고 안아달라며 바짓가랑이를 계속 붙잡고 늘어지는 아이와 함께 있는데,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이 어려운 와중에 한 가지 발견한 사실이 있다. 적어도 내 귀만은 자유롭다는 것이다. 아이 또한 내가 무엇을 듣든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아이와 함께 있으며 나는 찬양을 듣고, 오디오 성경을 듣기도 하며 지냈다. 목사님들의 설교를 듣기도 했다. 아이가 잠들 때는 기도했다. 그렇게 틈틈이 주님을 만나려 노력했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주님과의 만남을 간절히 사모하는 내 마음을 주님께서 읽어주시고, 여러 경로를 통해 내게 잠잠히 말씀하시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기웅 목사님은 설교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민족의 첫사랑의 때는 광야의 시기였다고 전하셨다. 아무것도 없는 막막한 땅에서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 외에는 의지할 것이 없었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는 그 걸음만을 따르며 갔다. 오직 하나님께서 주시는 만나와 메추라기로만 배를 채웠다. 그렇게 이스라엘 민족의 모든 몸, 마음, 영을 하나님께서 주장하셨던 시간이 광야의 시간이었다. 물론 우리가 기억할 때는 그 시기의 이스라엘 민족은 정말 불평불만 투성이인 문제가 많은 상태였지만, 하나님은 전혀 그렇게 기억하지 않으셨다. 그렇게 이스라엘 민족과 꼭 붙어 지내셨던 시간,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에게 오직 하나님밖에 의지할 것이 없던 시간, 그 시간을 하나님은 너무나 기쁘게 기억하고 계셨다.
나는 지금 외적으로는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깊은 외로움을 맛보고, 모두와의 단절을 경험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내적으로는 오래된 집안의 문제가 아무리 기도해도 해결되지 않아 막막함과 낙심을 경험하고 있다. 정말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나는 광야에 와있는 것이다. 나의 괴로움과 불평불만과 달리 하나님은 이 시간을 기뻐하고 계심을 느낀다. 사막 같은 이 상황 속에서 의지할 것이 하나도 없는데,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하신다. 기도해도 나아지지 않아서 기도의 의욕을 잃고 있으나 그래도 기도밖에 할 것이 없어서 기도하는 내 모습을 전심으로 기뻐하신다.
문득 깨닫는다. 지금 내가 해야 할 기도는 이 시간을 빨리 벗어나게 해 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이 시간 동안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시고 싶은 이야기들을 찬찬히 듣는 내가 되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해야 한다고. 주님께서 이 어려운 시기 동안 나에게 주시고 싶은 품성이 내 속에서 길러지도록 기도해야 한다고.
광야는 목적지가 아니다. 믿음의 목적지로 나아가기 위한 중간 장소일 뿐이다. 이곳에 주저앉아 울기보다 광야를 믿음의 걸음으로 묵묵히 통과하는 내가 되길 바란다. 40일의 광야 시험을 마치고 공생애를 시작하며 날아오르셨던 예수님처럼 나 또한 광야 시험을 모두 마친 날, 주님께서 주신 나의 소명을 가지고 날아오를 수 있길 소망한다. 마지막으로 내게 깊은 위로를 전해 주었던 '그 광야로'의 찬양 가사를 함께 나누며 이 글을 마친다.
광야로 우리를 부르시는 아버지
나를 낮추시고 돌이키시는 내 아버지
고단한 삶 억눌린 짐 모두 버리고
주의 임재로 부족함 없는 그 광야로
광야로 우릴 초대하시는 아버지
친히 채우시고 먹이시는 내 아버지
호위하시고 보호하시며
눈동자 같이 날 지키시는 그 광야로
화려한 세상을 나와 거친 광야로 오라
허망한 자아로 가득한 그곳에서 어서 나와
아버지 말씀 있는 곳
아버지 얼굴 있는 곳
온전히 주의 자녀 삼으시는 광야로
드넓은 광야로 나아오라 내 사랑하는 주님 손 잡고
자기 부인하고 십자가 지고 예수님 걸으셨던 광야로
드넓은 광야로 날아오르라 주께서 주신 날개를 달고
날 양육하는 곳
날 세우시는 곳
나의 안식처 그 광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