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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빗소리 Mar 22. 2019

인생 그렇게 깔끔하게 사는 거 아니예요

드라마 '나의 아저씨'를 좋아하시는 분 계신가요?



'나의 아저씨'는 제 인생 드라마예요. 처음 몇 화가 분위기가 어두워서 드라마를 접으시는 분이 많이 계시던데, 점점 회를 거듭할수록 세상에 이런 따뜻한 사람과 동네가 있구나 하며 그 따뜻함에 자꾸만 눈물이 흐르는 자신을 발견하실 수 있는 웰메이드 드라마랍니다. 최근 '눈이 부시게'라는 드라마도 왠지 그런 드라마인 것 같은데, 스포 방지를 위해 인터넷에 열심히 올라오는 글을 요리 조리 피하며 정주행을 노리고 있습니다.



'나의 아저씨'에서 제가 가장 좋아했던 명대사가 있어요. 남에게 신세 지기 싫어하는 여주인공(아이유)이 큰 은혜를 입고, 꼭 갚겠다 사람들에게 이야기할 때 어떤 분이 이렇게 답해요.



"거, 인생 그렇게 깔끔하게 사는 거 아니예요."



이 대사를 들으며 망치로 머리를 두드려 맞은듯 잠시 멍해졌었어요. 아이유 모습이 꼭 제 모습과 비슷했거든요.



남에게 신세 지며 살지 말고, 너의 일은 스스로 해라, 살면서 누구에게라도 은혜를 입거든 배로 갚아라, 돈을 빌리거든 그날 혹은 그 다음 날 안에 최대한 빨리 갚으라고 하셨던 부모님의 영향으로 저는 남에게 되도록 신세 지지 않으며 살려 했어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최대한 내 스스로 하고, 작은 부탁이라도 해야 할 경우 최대한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을 가득 담아 이야기하고, 꼭 은혜를 갚으며 살려 노력했어요. 그렇게 사는게 쉽지는 않더라구요. 남들에게 부탁하기를 어려워하지 않고, 나 또한 남들의 부탁을 잘 들어주는 시원시원한 사람으로 살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했구요. 남들에게 미안해서 모든 걸 내 손으로 해결하려 할 때 스스로 너무 어렵게 사는 거 아닌가 싶을 때가 참 많았거든요.



아기를 낳으니 남에게 신세 안지며 산다는 것이 얼마나 불가능한 일인가 깨달았어요. 혼자일 때는 모든 것이 가능했다면, 아기와 동행하는 상황에서는 어려운 일이 참 많더라구요. 불가피하게 남에게 도움을 구해야 하고, 신세를 져야 했고, 미안함과 감사함이 어우러져 쩔쩔매야할 때도 많았습니다. 누군가의 호의를 부담 없이 받는 것도 마음 훈련이 필요한 일이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오늘은 정말 아기가 태어난 뒤 가장 많은 은혜를 받은 하루랍니다. 너무나 감사하며, 따뜻한 일이었고, 달라진 생활에 조금은 마음이 싱숭생숭하기도 했어요. 제 복잡한 마음을 뭐라 표현해야할지 모르겠네요.



오후에 아이와 도서관을 가는데, 집 앞에 쌓여있는 상자를 버리고 싶더라구요. 원래 남편이 버리는데, 나가는 김에 깔끔하게 치우고 가자 하며 굳이 끌고 갔네요. 한 손으로는 유모차를 끌고 한 손으로는 상자더미를 들며 가는데, 그런 제 모습이 힘들어 보였나봐요. 지나가시던 남자분 한 분이 오셔서 대신 버려주시겠다며 오시더라구요. 놀란 저는 제가 꼭 버리고 싶다며(?) 그분과 실랑이를 하다가 결국 그분께서 버려주시는 뒷모습에다가 열심히 인사를 했네요. 멋쩍으셔서 얼른 도망가시는 그 모습이 아직도 뭉클하게 마음 속에 남아있어요.



도서관 문이 참 크고 무거운데, 도서관 갈 때마다 어느 분이든 꼭 문을 대신 열어주시고 양보해주세요. 어쩔 때는 4분이 양보를 위해 서있으실 때도 있어요. 만면의 웃음을 띠면서 서있으셔서 더 감사하고 죄송했던 기억이 있네요. 오늘도 어떤 분께서 문을 열고 얼른 가라며 기다려주시더라구요.



지나가며 유모차 속 아기에게 미소를 선물해주시는 분들, 도서관에서 만나는 아이들을 위해 꼭 사탕을 챙겨 오신다는 어느 할아버지(그 사탕은 제 뱃 속에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할아버지).



오늘은 우연히 도서관에서 지인을 만났어요. 반가워서 이런 저런 이야기하느라 정신 없었는데, 나중에 보니 아기 오줌이 새서 바지까지 흥건하더라구요. 아기가 오후에 유난히 물을 많이 먹었었고, 제때 확인하는 것도 깜빡했지 뭐예요. 얼마나 아기에게 미안하고, 당황스럽던지..........놀라서 유모차 끌며 돌아가려는 제게 지인이 남편이 오고 있다며, 차로 데려다 줄테니 기다리라고 하더라구요. 아기 감기 걸리면 큰일 난다고....



그렇게 지인의 남편분께 신세를 지며 겨우 집에 돌아왔어요. 그 와중에 또 유모차 접는 방법을 몰라서 남편분이 추운 날씨에 밖에서 고생하시고...............ㅠㅠ 죄송한 마음에 제가 점점 쪼그라드는 느낌이더라구요.



집에 오자마자 황급히 아기 목욕 시키고, 밥 먹이고, 재우고나니 오늘 하루를 돌아볼 짬이 생깁니다. 정말 은혜 가득한 하루였네요. 이걸 그저 신세로 받아 들인 제 자신에 대한 반성도 함께 들었구요.



인생 그렇게 깔끔하게 살 수 있을줄 알았는데......... 인생은 깔끔하게 살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고, 저는 그렇게 갚을 수도 없는 수취인불명 은혜 가운데 있습니다. 저 또한 갚을 수 없는 누군가에게 대가 없이 베풀라는 의미이겠죠. 그렇게 인생은 돌고 도는 것. 그래서 아름다운 것.



아기를 낳고 기르며 저는 더 약해졌고, 더 많이 도움이 필요해졌습니다. 다른 사람의 호의를 그저 감사한 마음으로 가볍고도 무겁게 받아들일줄 아는 능력이 필요해졌구요.



어쩌면 그동안의 제가 너무 교만하게 살아온 건지도 모르겠어요. 저 혼자서 스스로 다 잘해낼줄 알았다는 거 자체가 얼마나 교만한 일인지요.



아기를 낳고 조금 더 부족해진 제 모습이 나쁘지 않습니다. 아니, 나쁘지 않은게 아니라 좀 마음에 듭니다. 오늘 저를 도와주었던 많은 인연들에게 기도로 복을 빌어주어야겠습니다. 그리고 저 또한 값 없는 은혜를 많이 베푸는 사람이 되어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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