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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빗소리 Aug 03. 2021

깨끗한 존경


어젯밤 이슬아의 '깨끗한 존경'이라는 책을 읽은 여운이 아직까지도 짙게 남아 있어 글을 쓰고 싶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깨끗한 존경'이라는 책은 인터뷰집이에요. 이슬아가 존경하는 사람들과 인터뷰한 책입니다. 세월호 유가족과 함께 연대에 대해 말하려 애쓰는 라디오 PD이자 작가 정혜윤, 아무튼 비건을 쓴 작가이자 동물과 자연을 보호하며 함께 살아가는 지구를 고민하는 김한민, 부산 영도의 손목 서가의 주인 유진목, 제가 인상 깊게 읽었던 책 '실격 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을 쓴 작가이자 장애인이 보다 나은 세상에 살 수 있도록 힘  쓰는 인권 변호사 김원영. 이 4명과의 인터뷰가 담겨 있습니다. 




그중 제 마음을 깊게 휘젓고 간 인터뷰는 유진목 작가와 김원영 변호사의 인터뷰였어요. 하나씩 주제별로 인터뷰의 내용을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1. 가난


세상에는 가난해서 생겨나는 일들이 있는데 나는 그런 일들을 비교적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 수업을 마치고 친구들이 롯데리아에 갈 때면 나도 같이 가고 싶을 때가 있었지만 그럴 만큼의 돈이 없었다. 한 번은 친구들과 어울리고 싶은 마음에 아무 것도 시키지 않고 그저 앉아 있었던 적이 있는데 그 뒤로 절대로 그런 일은 하지 않았다. 그 일로 나에게 돈이란 '없으면 어떤 일을 경험할 수 없는 것'이라는 개념이 어렴풋이 생겨난 것 같다. 지금의 내가 돈과 경험을 맞바꾸는 것에 전혀 주저함이 없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맞을 것이다.


친구들이 롯데리아 햄버거를 하나씩 손에 들고 먹을 동안 그 자리를 그저 지키며 가만히 있었을 10대의 유진목씨를 떠올리니 마음이 미어져 글을 읽다 멈추고 한참을 먹먹히 있었습니다. 친구들이 싫어하고 불편해하는 걸 알면서도 그 자리를 지키던 유진목씨의 얼굴은 어땠을까? 


저도 유진목씨와 비슷하게 극심한 가난을 10대에 겪은 적이 있어요. 아버지의 사업이 실패하며 가정 경제가 무너졌는데, 정말 친구들과 떡볶이 하나 시켜 먹을 돈이 없더라구요. 저는 유진목씨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행하는 용기를 내진 못했지만요. 책을 정말 좋아하지만, 책 한 권 사기가 참 어려웠습니다. 그때 이후 책은 저에게 사치품으로 인식이 되었어요. 그 당시 저의 꿈은 '좋아하는 책을 원 없이 살 수 있을 정도의 사람이 되고 싶다.'였고, 어찌보면 저는 꿈을 이룬 사람이네요. 




하루는 집에 갔는데 가전마다 모두 빨간 딱지가 붙어 있었습니다. 드라마에서만 보던 빨간 딱지를 실물로 본 경험을 했어요. 안그래도 좁은 집이었는데, 더 좁은 집으로 이사가게 되며 부모님은 어쩔 수 없이 더 빚을 내어 모두 새 가전으로 사셨어요. 그때 제 고등학교 친구들이 놀러 왔는데, 너네 집 냉장고 너무 멋있다, 너 이제 평상 있는 집에 사는구나 정말 좋겠다 이야기해요. 이제 클만큼 커서 지금 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뻔히 아는데도 네가 부럽다고 철 없이 이야기해주는 친구들이 있어서 얼마나 감사하던지.




작년에 사귄 친구와 그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친구가 이야기 해요. 집이 너무 가난해서 중학교 때 바지가 1벌이었는데, 4계절을 버텼다고. 어쩌다 한 번 빨아야 되는 날이면 말리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모른다고. 서로의 가난했던 과거를 돌아보며 지금 우리가 가진 것이 얼마나 많은지를 새삼 되돌아보았습니다.




가난은 불행한 것이지 불편한 것이 아닙니다. 어찌보면 빚을 내어 집을 사고, 빚을 내어 차를 사고, 빚쟁이가 된 지금의 제가 그때보다 더 가난한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그때는 수중에 돈 한 푼 없어도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향유하며 지냈거든요. 그 시절 제가 배웠던 그것들이 지금도 제 삶을 즐기는 좋은 밑천이 되었어요. 돈 없이도 누릴 수 있는 것들로 저는 지금도 즐겁거든요.




아직 물건을 아끼지 못하고 엄펑덤펑 쓰는 우리 아이를 바라보며 지금 제가 아이에게 가르쳐야 하는 것이 넉넉함인지 검소함인지를 자꾸 생각해보게 됩니다. 부하든 가난하든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만의 즐거움을 찾을 수 있는 아이로 키우고 싶어요. 그게 제가 우리 아이에게 줄 수 있는 선물인 것 같아요. 가난했던 옛날이 있기에 저는 오히려 넉넉한 마음으로 삽니다. 살다보면 제가 또 어려워질 수도 있지요. 더 어려웠던 경험이 면역이 되어 어쩌면 내가 또 그 시간을 버텨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아마도 늙어가면 더 어려워질테니까요. 지금부터라도 검소할 수 있는 부분은 검소해지도록 조금씩 노력해보며 살아가고 싶어요. 






2. 흔들리지 않는 마음



청소년들은 관계에서 생존본능에 가깝게 움직이는 것 같아요. 주류가 되려고 혹은 주류에 속한 애들이랑 틀어지지 않으려고 노력했던게 생각나요. 다시는 청소년기로 돌아가고 싶지 않네요. 
사실 어린 시절에는 장애인을 놀리거나 적어도 친한 걸 부담스러워하는 게 본능에 가까운 것 같아요. 그래도 그 중에 한두 명은 꼭 있어요. 낭만적으로 얘기하려는 게 아니고 정말 한두 명과는 관계가 맺어져요. 그 애들을 통해 더 큰 관계망에 진입하게 되기도 하고요.


저 또한 학창 시절에 주류 세력에서 나가 떨어질까봐 두려워하는 아이였습니다. 모두가 왕따시키는 아이를 바라보면서도 그 아이에게 따뜻한 말 건네기가 어려웠어요. 저도 똑같이 그렇게 왕따를 당할까봐요. 커보니 그런 저를 떠올리는게 고통스러워요. 그때 내가 용감하게 그 아이에게 말을 걸어주었으면 어땠을까? 그런 생각을 종종합니다.


장애인이자 인권 변호사인 김원영 작가는 그런 용감한 아이들을 종종 만나고는 했대요. 그런 아이들을 통해 더 큰 관계에 들어가게 되기도 하면서요. 김원영 작가의 책에는 이런 에피소드가 나와요. 중학생 때 아이들이랑 놀고 있는데, 야 냇가 가서 놀자라고 하며 다리가 불편한 김원영씨만 두고 나갔대요. 그때 한 명이 쭈뼛거리면서 안나가더래요. 너는 왜 안나가냐고 김원영씨가 물어보니 '살 타고 싶지 않아서~'라고 대답했답니다. 중학교 남자애가 살 타고 싶지 않다니. 친구의 궁색한 변명에 김원영씨는 그 순간을 웃기다 생각하면서도 무척 고마웠대요.


작년에 한 선교사님의 설교를 듣게 되었는데, 그 선교사님은 뇌성마비를 앓고 계셨는데, 어릴 때 그렇게 짝꿍이 자주 바뀌었대요. 아이들이 자신과 짝꿍하는 것을 너무 싫어해서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6학년이 되던 때에 새로운 짝꿍을 만났는데, 한 달이 지나도 두 달이 지나도 짝꿍이 바뀌지 않더래요. 이상하다 생각하는데, 걔가 매일 바쁘더래요. 자기꺼, 선교사님꺼 두 개의 노트를 쓰느라요. 선교사님이 머리가 좋은 편이라서 반에서 매일 1등을 했는데, 그걸 알면서도 선교사님을 위해 노트를 적어주더래요. 어느 날 걔가 교회에 가보지 않을래 라고 말했는데, 자기는 걔를 위해서라면 지옥도 갈 수 있었대요. 그 한 아이의 헌신이 결국 한 아이에게 꿈을 주었고, 지금은 많은 이를 돕는 선교사로 자라셨더라구요.


어떻게 하면 그런 아이로 자라날 수 있을까. 주류 세력에서 떨어져 나갈까 두려워하지 않으면서도 약자를 위해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아이. 책을 읽으면서 부쩍 생각이 많아지더라구요. 그리고 이 고민을 아이를 키우면서 계속 해나가야겠다는 생각도 들구요. 일단 저부터라도 지금부터라도 불편한 상황 가운데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약자의 목소리를 내려 노력하는 사람이 먼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부담스러운 생각도 듭니다. 


김원영 작가님의 '실격 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은 꼭 추천드리고 싶어요. 장애인의 인권 개선에 대한 이야기라 읽으며 스스로가 부끄럽고 불편하실 수는 있지만.... 세상에는 불편하더라도 반드시 내가 들어야 하는 목소리들이 있더라구요. 아파도 읽고나면 한 뼘 더 성장하실 수 있을 거라 생각이 들어요. 



3. 해본 후 덧없다는 것을 깨달을 권리


바로 그 "모든 것을 다 해본 후에 삶이 덧없음을 깨닫는" 일이야 말로 우리 사회 모든 구성원에서 고르게 배분되어야 할 귀중한 삶의 기회가 아닌가?


우리는 보통 다 해본 뒤 이제 그걸 시작하는 사람한테 말하잖아요. 그거 별거 없어. 그렇게 해보니 결국 그게 그거더라. 특히 육아가 그런 것 같아요. 그런데 막상 그런 말을 듣는 상대방의 마음이 참 안 좋잖아요. 저도 그랬거든요. 그러면서 저도 더 어린 아이를 키우는 친구들에게 그렇게 말하는 위선적인 면이 있었어요. 


이 문장을 읽으며 다시금 반성하네요. 나는 '모든 것을 다 해본 후에 삶이 덧없다는 것을 느끼는' 그것도 권리라는 생각을 못 했을까? 누구나 그럴 권리가 충분히 있는데요. 앞으로는 누가 옆에서 무엇을 하든 그 자체를 존중해주려 노력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후회할 수 있는 것도 '권리'이기에. 그것이 정말 불의한 일이 아니라 다양한 선택지의 일이라면요.  




글을 다 쓰고 나니 겁이 나네요. 저도 잘 지키고 있지 못하는 것들을 글로 썼으니까요. 이 글을 쓰며 한 번 더 마음을 다잡습니다. 잘해내지 못했기에 이제부터라도 잘해내보자고. 실패하면 또 다시 해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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