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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빗소리 Aug 20. 2021

나의 구멍


(아이들 이름은 모두 가명입니다.)



1. 개학, 그 동상이몽에 관하여



어제는 개학날이었습니다. 이미 1학기에 복직의 홍역을 열렬히 치루었는데도 불구하고 2학기의 무게감은 어찌나 저를 짓누르는지..... 개학 전날은 도무지 잠이 잘 오지 않더군요. 유달리 지도가 힘들었던 아이들과는 얼마나 또 씨름을 해야 할까. 업무는 얼마나 쏟아질까. 방학의 즐거움만큼이나 개학의 부담감이 엄습했습니다.




무거운 마음을 애써 숨기며 아이들에게 밝은 얼굴로 웃으며 인사했는데, 녀석들 1달 못 본 사이 다시 어색해졌는지 쭈뼛쭈뼛거립니다. 각자 방학동안 있었던 일을 그림으로 그리는 동안 아이들 한 명 한 명과 방학 동안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선생님, 저는 방학이 너무 싫었어요. 친구들도 못 만나고 집에서 누나랑 맨날 있고... 개학해서 정말 정말 좋아요!!" 라는 지호의 말에 명치를 얻어 맞은 듯 멍해졌습니다. 나와 달리 지호는 이 날이 손꼽아 기다린 날이었던 것입니다. 편부 가정인 지호는 아버지가 택배 일을 하시느라 매일 밤이 늦어야 들어오십니다. 지호가 누나랑 얼마나 심심했을지 상상하니 마음이 아려옵니다.



"방학 동안 가장 행복했던 일은 무엇이니"


"없어요. 엄마, 아빠는 아무 이유 없이 매일 나에게 소리 지르고, 연재는 매일 나와 싸우고..... "


가정 불화로 늘 힘 없이 다니는 연우의 말에 질문한 제가 머슥해집니다.


"연우야, 이제 선생님 맨날 만나잖아. 속상한 일 매일 매일 들어줄게. 기운 내."


이런 말 한다고 감동 받을 연우는 아니지만, 그래도 연우 눈빛 색깔이 몇 분 전보다 좀 나아진 것 같습니다.



아이들과 매일 하교 시간에 두줄씩 간단하게 글똥누기를 쓰고 있는데, 연우가 쓴 오늘 글똥을 보고 마음이 찡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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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학급은 아이들에게 어떤 공간일까? 자주 고민하지만, 적어도 연우에게는 학교가 화를 풀기에 충분한 공간이 되는구나 싶어 행복해집니다. 연우 엄마, 아빠의 일을 제가 어찌 할 수야 없겠지만, 유달리 까칠한 연우를 감싸주고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연우가 위로를 받고 있을 거라 희망을 걸어봅니다. 사실 연우가 많이 까칠한 날은 저도 힘이 들어 화가 날 때도 있습니다. 자꾸 실패한다해도 매일 연우를 받아주는 내 그릇이 아주 조금씩은 크기를 키우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좌절하지 않으려 합니다. 정말 연우 덕분에 1학기 동안 인내심이 조금 늘어나 저희 아이에게도 좋은 영향을 주고 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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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설레였는지 2번이나 설렌다는 단어를 쓴 사랑스런 하영이의 글똥을 보면서 업무가 싫어 학교 나오기 귀찮았던 스스로를 부끄러워하기도 했습니다. 선생님에게 선물을 주고 싶은데, 무슨 선물을 줄까 고민하다 못 가져왔다는 우리반 사랑둥이2 윤아의 글똥을 보면서 빵터지기도 했습니다.



아이들과 또 하루 들썩들썩 지내다보니 개학 첫 날 별로 어렵지 않은데, 내가 또 왜 그리 잔뜩 겁을 집어 먹었을까 싶습니다. 10여년을 반복해도 왜 저는 항상 개학이 어려울까요? 얼떨결에 시작한 2학기. 설레임을 안고 시작하는 어린 영혼들을 위해 열심히 한 학기동안 열정을 다해야겠다 또 생각해봅니다. 2학년 2학기라는 아이들의 삶의 소중한 조각이 제 앞에 놓여있네요. 어른이 되어서도 그 조각이 반짝반짝이면 좋겠어요. 모두 잊어버려도 그 반짝거림만은 남지 않을까. 헛된 기대도 해보면서요.




2. 그거면 됐어



개학 전날 밤 예진이 엄마의 문자가 옵니다. 1학기 동안 몇 번의 상담으로 저를 지치게 했던 예진이 엄마. 9살 아이답지 않게 안좋은 쪽으로 자꾸 머리를 굴리는 예진이를 저는 쉬이 품을 수 없어 1학기 내내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교우관계에서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교묘하게 친구의 마음을 괴롭히는 예진이를 사랑하는게 쉽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런 예진이로 인해 엄마끼리의 갈등이 시작되었고, 여전히 진행중에 있습니다.



때론 예진이를 어떻게 변화시켜야 할까 하는 생각에 깊이 빠져 허우적 거릴 때도 있었습니다. 예진이를 나쁘게 험담하며 저의 생활지도 능력을 의심하는 동료교사의 무례함에 큰 상처를 받은 적도 있습니다. 아무리 설명하고 해결책을 제시해줘도 같은 말만 반복하는 예진이 엄마와의 상담에 지치기도 했습니다.



1학기 내내 예진이와 저는 함께 걸어가며 길을 잃기도 하고, 다시 일어나서 걷기도 하며 이런 저런 시간을 보냈습니다. 예진이가 저의 생활 지도에 개과천선을 하리란 생각을 하진 않습니다.



'인간은 엄숙하도록 존귀하다.'



제 교실 모니터에 붙여 놓은 문장입니다. '아무도 사랑하고 싶지 않던 밤'이라는 책에 나오는 글귀인데, 처음 이 문장을 읽고 너무 벅차서 여러 번 되뇌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나의 말 하나, 행동 하나에 바뀌기에는 예진이는 엄숙하도록 존귀한 존재입니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쌓여 예진이의 말과 행동이 굳어졌는지는 모릅니다. 그저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사랑하기 쉽지 않은 예진이를 사랑해주는 것, 아닌 것은 아니라고 100번이라도 다시 알려줄 인내가 아닐까.



이런 글을 쓸 때마다 오해 받을까 늘 고민이 되지만, 저는 그렇게 인내심이 많지도 사랑이 많지도 않아요. 화내고 실수하고 후회하며 지냅니다. 제가 부족하기에 예진이가 쉬이 변화되지 않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적어도 희망은 잃지 않기에 두렵지 않아요. 내일은 좀 더 사랑하고 좀 더 참아주자 다짐하며 또 실패하고.... 그렇게 아이 곁의 오뚜기가 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제 마음에 어느 정도 해탈(?)이 이루어져서일까. 아니면 예진이를 그냥 사랑해주기로 결심한게 티가 나서일까. 개학 첫날부터 시작된 예진 엄마의 전화가 그리 힘들지 않았습니다. 본인도 엄마들과의 갈등에 얼마나 힘이 들면 이렇게 누구라도 이야기를 들어주길 바라는 것일까. 회초리까지 들면서 아이를 변화시켜보려 하지만 쉬이 바뀌지 않는 이 상황이 얼마나 힘이 드실까. 그런 제 마음이 전해졌는지 예진이 엄마도 좋은 마음으로 전화를 끊었습니다. 전화는 또 오겠지요. 그래도 말동무 해드리자는 마음으로 바뀌니 예진이 엄마도 저도 마음의 부담은 좀 없어진 것 같습니다.



예진이는 변할까요? 모르겠어요. 변하든 변하지 않든 이 아이를 그냥 사랑해줘보자 다짐해봅니다. 안 변해도 최선을 다한 제가 부끄럽지 않을 것 같아요.



"예진아, 선생님은 예진이가 방학동안 보고 싶었어."


예진이의 반응을 기대 안하고 한 이야기에 예진이가 대답했습니다.


"저도요..............."


그런 스타일이 아닌데, 의외의 예진이 대답에 오히려 깜짝 놀랐습니다.



점심시간에 한 번 더 듣고 싶어 물어봅니다.


"너 그 말 진짜지? 나 기분 좋았는데!!"


"진짠데요...."



그래, 그거면 됐다 싶습니다.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하고, 오늘 예진이가 저에게 조금이라도 마음을 내어준 것에 감사해하며 힘내봅니다. 예진이와 저의 1월은 어떤 모습일까요? 그때 우리의 대화가 오늘 같았으면 참 좋겠습니다.





3. 나의 구멍



우리 학교 발명왕 교장선생님께서 우리 반의 고장난 선풍기를 고쳐주시겠다 하셨습니다. 정말 고치실 수 있을까 싶지만, 워낙 물건 만지는 걸 좋아하시는 교장선생님을 위해 선풍기를 가져다 드렸습니다. 아버지 연배의 교장선생님은 눈이 너무 침침해서 잘 보이지도 않는데, 작은 선풍기 부품과 열심히 싸우셨습니다. 그냥 선풍기만 갖다 놓고 나갈까 하다가 교장선생님 모습이 꼭 아버지 모습 같아서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교장선생님 눈이 잘 안보이는 부분은 밝은 제 눈으로 도와드리며 그렇게 서로 협동하여 선풍기를 고쳐 나갔습니다.



오..... 진짜 좀 신박하긴 합니다. 교장선생님은 교장선생님으로 있기에 너무 아까운 존재 아닐까. 아니지 그냥 수리만 하시기에는 교장선생님만큼의 월급을 받지 못하실라나? 엉뚱한 생각을 하며 교장선생님의 보조를 맞춰드립니다. 둘이서 한참을 낑낑대다가 겨우 선풍기를 고쳤습니다. 돌아가는 선풍기 날개를 보며 교장선생님이 헤벌쭉 웃으셨습니다. 교장선생님이 행복해지는 순간입니다.



즐거워진 교장선생님의 모습을 뒤로 하고 교실로 선풍기를 걸러 갔습니다. 괜히 주무관님을 귀찮게 해드리는 건 아닐까 싶어 작은 키로 혼자 낑낑 대며 걸려 하다가 그만 손에 힘이 빠져 선풍기가 떨어졌습니다.



"와장창"



밑에 있던 시계도 같이 떨어졌습니다. 시계 유리가 깨진줄 알았더니 선풍기 날개가 깨진 것입니다. 맙소사.................교장선생님이 사투를 벌인 선풍기가........................................ㅠㅠ 안보이는 눈으로 낑낑대시던 모습이 생각나서 진심으로 속상했습니다. 멍한 상태로 컴퓨터로 달려가 선풍기 모델을 치고 부품을 살 수 있나 봤더니 안되겠어서 결국 행정실로 달려갔습니다.



"실장님, 저 사고쳤어요오~~~ ㅜㅜ"



좀전에 선풍기 고치던 장면을 보고 가셨던 실장님밖에 도와줄 사람이 없을 것 같아 달려간 것입니다.



"에잇, 이럴 바에 새로 사는게 낫지. 선생님, 걱정마요!"


"안돼요.ㅠㅠㅠㅠ 교장선생님께서 너무 고생하셨는데 이 얘기를 어떻게 해요....ㅠㅠㅠㅠ"



안쓰러웠는지 실장님이 전동 드릴을 들고 길을 나섭니다. 실장님과 푹푹 찌는 옥상에서 고장난 선풍기를 해체해서 날개를 얻어 다시 교실로 돌아가 또 둘이서 한참 낑낑대며 날개를 교체했습니다. 하루동안 너무 여러 사람을 힘들게 한 것 같아 저의 바보스러움이 너무 원망스럽습니다.



"교장선생님께는 비밀로 할게요~"



다행히 잘 돌아가는 선풍기를 바라보며 실장님이 씩 웃으십니다. 별거 아닌 말에 괜히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비밀도 아닌 이야기지만, 교장선생님의 행복을 깨고 싶지 않다는 마음은 서로 같구나 싶습니다.



일로 친해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때론 대화보다 일로 사람들과 친해지기도 합니다. 저는 오늘이 그랬던 것 같습니다. 교장선생님과 낑낑대며 작은 용수철을 늘이려 노력했던 시간, 실장님과 해결될지도 모르는 문제들과 싸운 시간............그분들에게 1학기의 시간보다 더 많이 정이 갔던, 이상한 하루입니다.



비록 제 잘못을 생각하면 이불 뒤집어 쓰고 싶어지는 밤이지만, 제 마음에 교장선생님과 실장님에 대한 공간이 생긴 것 같아 신기하기도 한 밤입니다. 함께 일하는 동안 그분들께 저만의 방법으로 은혜를 갚아야겠다 생각해보며 부끄러움을 다독여봅니다.



혼자서만 잘난 듯 살아가고 싶지만, 깜냥이 안되네요. 깜냥이 안되는 그 부분에 사람의 손길이 닿기 시작하고, 그렇게 이런 저런 인연이 쌓여가는 걸 생각하면 부족한 제 자신이 다행이라 생각도 듭니다. 마음에 구멍이 숭숭 나서 이 사람 저 사람이 들어올 수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구멍 많은 사람이라 충분히 가능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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