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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빗소리 Oct 08. 2021

치열하게, 태연자약하게


치열하게, 태연자약하게






순간에는 치열하되,


결과에는 집착하지 않고,


태연자약하게 사는 삶.




여하연, <하루는 열심히, 인생은 되는대로>







어느 날, 이 문장을 보았습니다. 잘 해내고 싶은 일이 있었습니다. 일을 본격적으로 해볼까 싶으면 아이를 데리러 가야 하고, 육퇴 후 이제 좀 해보자 하면 잠이 왔습니다. 여기에도 저기에도 집중할 수 없는 시간들. 아이가 없던 때처럼 밀도 짙은 시간은 이제 제게 좀처럼 생기지 않습니다. 그저 조각천처럼 자투리 시간들만 있을 뿐입니다.



아이를 잘 키우고 싶고, 일도 좀 제대로 하고 싶고. 모든 일을 다 잘하진 못해도 적어도 제가 잘하고 싶은 일 한 두가지는 좀 잘 해내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저는 성취욕도 강한 사람이고, 일을 잘 끝냈을 때의 보람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무엇보다 나이가 들었을 때 실력있는 선배가 되고 싶다는 꿈이 있습니다. 당장은 많은 일을 하기 어려워도 조금씩 일을 배워나가며, 지금보다 더 나이가 들었을 때 일을 무서워하지 않고 "아, 그 일은 이렇게 하면 괜찮더라구."라며 말할 수 있는, 친절하고 유능한 선배가 되고 싶습니다.



언젠가 친구의 학교 이야기를 들었는데, 거의 퇴직이 가까운 나이의 선배가 있는데, 관리자도 아니고 평교사로 퇴직할 예정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큰 학교에서 그 어려운 방과후 부장 업무를 가져가더라며, 그 이유가 후배들이 힘들까봐라고 했습니다. 이야기를 듣고 한 대 맞은 것처럼 멍했습니다. 선배의 큼지막한 그늘이 있기에 그 학교의 후배들이 숨통이 트이겠구나 싶었습니다. 와, 나도 그런 선배로 늙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선배의 이야기가 근사하게 느껴졌습니다. 오래 전에 들은 이야기인데도 아직도 그 이야기가 힘들 때마다 기억이 나곤 합니다.



그러나 제게 육아는 세상에서 가장 잘 해내고 싶은 일입니다. 제게 '잘해낸다'는 의미는 아이가 어릴 때 되도록 많은 시간을 함께 해주고, 많은 추억을 함께 쌓아가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려면 호두에게 들여야 하는 시간의 양이 참 많아지네요. 일할 때도 시간이 필요하고, 육아에도 시간이 필요하고..............두마리 토끼 잡을 시간은 안되고.............그런 생각하다보면 가끔 마음이 암담해지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아가 최우선이라는 생각은 변함이 없지만요.



그런 생각이 꼬리를 물던 밤, 이 문장을 보고 눈물이 울컥했습니다. 지금은 자투리 시간을 겨우 긁어모아 일하지만, 그 자투리의 순간만큼은 치열하게 살아보자고. 결과야 좋지 않을 수 있겠지만.......잘해내고 싶다는 제 마음 자체가 소중한 것이니까요. 무언가를 잘해내고 싶다는 마음 자체가 예쁜 것이니까.... 그저 그 마음을 스스로 지켜보는 것도 괜찮은 일이겠다 싶어요.




남이 보기에 이렇다할 결과가 없어도 스스로 느낄 수 있는 아주 미약한 변화에 기쁠 수 있는 삶. 일하는 엄마가 된 지금은 저의 기쁨의 척도 또한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스스로가 자랑스러울만큼만 일하기, 아이가 행복해할만큼 같이 놀아주기. 호두의 어린 시절에는 그렇게 일하며 혼란의 시간을 견뎌보려 합니다. 이 순간을 치열하고 태연자약하게 살았던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감정들을 느껴보고 싶습니다.





어느 지친 밤에



처음 해보는 학년을 맡으니 수업 준비가 쉽지 않습니다. 수업 준비할 시간도 턱없이 부족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쉬는 시간, 점심 시간, 방과후 시간을 쪼개고 쪼개어 수업 준비를 합니다. 솔직히 좋은 수업을 하기에는 늘 부족한 시간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해 수업을 준비하여 행했을 때 느끼는 쾌감이 분명히 있습니다.



최근 수학 시간에 열심히 설명하다가 아이의 눈 속에서 반짝하는 빛을 보았습니다. 그때 갑자기 교사로서 정말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꺼져있던 아이의 눈에 갑자기 불빛이 딱 켜지는 순간. 아이가 무언가를 발견한 순간. 그 순간을 지켜보는게 진짜 행복이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드는 순간이었습니다. 아, 내가 이래서 수업을 사랑하지.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솔직히 이런 글을 쓰기 합당하지 않은, 정말 부족한 수업만 하고 있는 교사입니다. 그러나 수업에 대한 마음은 진심입니다. 늘 잘해내고 싶습니다. 수업에 실패할 때도 있고, 성공할 때도 있지만, 가끔 가다 발견하는 수업 속 기쁨은 생각보다 잔향이 짙습니다. 다시금 열심히 수업을 준비하게 만드는 동력이 됩니다.



수업을 허투루 하고 싶지 않습니다. 수업은 교사로서의 제 자존심입니다. 수업 안에서 성장하는 아이를 볼 때, 또 그 성장을 자양분 삼아 성장하는 저를 바라볼 때 짜릿한 마음이 듭니다.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고 있는 저에게 이 밤 스스로 격려를 보냅니다. "너는 정말 잘하고 있어!"




요즘 우리 아이들



(아이들의 이름은 모두 가명입니다.)



지호. 저는 요새 지호가 정말 예쁘고 기특해요. 지호가 얼마 전 넘어져서 팔이 부러졌습니다. 깁스를 하고 지내고 있는데, 어찌나 씩씩하게 잘 지내는지. 누군가에게 도움을 먼저 청하기보다 항상 내가 할 수 있는 일인지 조용히 혼자 시험해보고 있는 지호. 지나가다 지호를 발견하고 깜짝 놀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에요. 그런 지호이기에 지호가 도움을 청하면 언제든 "갈게!!!!!"라며 빛의 속도로 달려 갑니다. 지호 도와주는 건 아무리 도와줘도 피곤하지 않아요. 스스로 하려는 그 마음이 너무 예뻐서. 저도 지호 같이 씩씩한 사람, 그래서 사랑스러운 사람이 되보자 다짐하게 됩니다.



소이. 소이가 오늘 하영이 신발을 숨겼어요. 순간 신발을 잃어버린 하영이의 표정이 어찌나 당황스러워보이던지. 소이가 몰래 숨긴 걸 알게 되었을 때 하영이의 얼굴이 생각나서 저도 화가 벌컥 나버렸어요. 그래도 감정을 가다듬고 왜 그랬는지 물어봤는데, '재밌어서' 그랬다 하네요. 두 번째 분노가 치미는 순간이었지만, 정직하게 이야기했기에 또 감정을 가다듬습니다. 가서 하영이에게 진심으로 사과하라고 했습니다. 소이는 힘든 성장 환경 속에 살아가고 있어요. 그런 소이의 환경을 생각하면 이런 것 하나 배우기 어려운 환경이라는게 이해가 가지만..........또 아이라서 그런게 재미있을 수도 있다 싶기도 하지만...........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살아가는 예절을 배우는게 소중하다 생각하기에 힘주어 이야기했습니다. 너의 장난이 누군가에게는 폭력이 될 수 있다고. 소이에게 하나씩 '당연한 것들'을 가르쳐주는게 가끔 화가 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당연한 것들'을 배울 수 없는 그 아이의 환경을 생각하면 지금 저의 분노가 정당하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소이에게 '당연한 것들'을 좀 더 차분히 가르쳐주는 교사가 되자 생각합니다. 소이 같이 가장 약한 이를 존중해주는 것이 '참 존중'이라는 걸 믿습니다.




예은. 요즘 부쩍 예은이가 쉬는 시간마다 와서 소소한 자기 일상을 말해주고 갑니다. 내성적이어서 저에게 잘 오지도 않던 예은이가 말해주는 일상이 그저 고맙습니다. 고마워서 좀 과장 섞인 감탄사를 해주어야 할 것 같은 의무감에 휩싸이기도 합니다. 아이들이 말해주는 일상을 허투루 여기지 말자는 생각이 듭니다. 누군가에게 다가가 이야기를 한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큰 용기인지 알기에.



시훈. 자폐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는 시훈이가 체험학습 장소에서 짚라인을 타보더니 꺅꺅 외쳐대며 좋아합니다. 시훈이가 그렇게 좋아하는 표정을 오랜만에 봐서 아이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시훈이만 한 번 더 태워줬습니다. 역차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적어도 시훈이가 제 바운더리 안에 있을 때는 즐거운 일이 많았으면 좋겠다 생각했습니다. 깔깔 거리는 시훈이 영상을 찍어서 어머니께 보내드렸더니 아침에 울고 갔던 시훈이가 그렇게 잘 놀았냐며 행복해하십니다. 몇 주 전 시훈 어머니가 도움반 개별화 협의회에서 시훈이의 장애를 받아 들이는 과정에서 자신은 괜찮은데 아빠가 무척 힘들어 한다며 그래서 갈등이 자주 있다는 이야기를 덤덤히 하셨습니다. 너무 덤덤하신데 왜 제가 울컥하는지... 저와 함께 하는 한 해 만큼은 시훈이도 시훈이 어머니도 좀 더 행복한 일이 많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시훈이의 일상을 어머니와 자주 나눕니다. 얼마 전 종영된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에 제가 무척 좋아하는 대사가 있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 드라마에서 한 의사선생님이 환자에게 우리가 할 말은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들었을 때의 감동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시훈이에게 제가 시도하고 있는 이런 저런 교육적인 도전이 모두 성공할 수는 없겠지만, 저는 시훈이에게 최선을 다하는 교사가 되고 싶습니다. 짚라인을 잡고 활짝 웃고 있는 시훈이를 바라봅니다. 다시 힘을 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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