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 중 내가 가장 해방감을 느끼는 금요일은 나만의 ‘writing day’이나 갑자기 생긴 남편의 부서 회식으로 인하여 아이를 혼자 돌봐야 했다. 금요일까지 회식을 해야 하는 우리나라의 회식 문화에 분개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호두는 계속 싱크대와 식탁을 오가며 그릇에 물을 옮기기를 반복했다. 마이쮸와 작은 장난감을 넣고 국이라며 홀짝 마시는 녀석을 놔둬야 할지 말려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 꽤나 많은 물을 마셨다. 그거 먼지 몇 점 먹는다고 녀석의 마음에 생채기를 낼 수는 없다 싶어 그저 지켜보았다. 조막만 한 손으로 물을 이리저리 흘리면서 돌아다니는 아이의 뒷 꽁지를 쫓아다니며 수건으로 열심히 물을 닦았다. 하다 하다 피곤해서 물을 흘리거나 말거나 그냥 식탁에 철퍼덕 앉아 버렸다. 자꾸 장난감 담긴 물을 마시라고 강요하는 녀석을 위해 ‘호록 호록’ 소리를 내며 연기했다.
예전에는 아이가 더러운 걸 먹거나 너무 어지럽히면 마음이 꽤 언짢아져서 아이의 마음까지 불편하게 하는 일이 다반사였는데,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뭐 굳이 서로의 마음에 생채기를 남기나 싶어 점점 허용적으로 변하고 있다. 아이도 엄마의 변화를 느끼는지 갈수록 더 과감해지는 중이다.
얻는 것도 있다. 과감해질수록 좀 더 자유로워 보이는 호두의 영혼을 보는 것. 그건 작지만 큰 기쁨이다. 물장난을 하다가 신명 나게 춤을 추다가 퍼즐을 맞추는 호두.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사는 호두의 평화로운 표정을 보는 것이 좋다. 이 집안에서 누구 한 명이라도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결국 난 더 놀려고 버티는 의지의 호두로 인해 12시가 넘어서야 비로소 글쓰기 시간을 갖게 되었지만, 그래도 아이가 종달새 같이 귀여운 이 시간들이 참 귀하고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피곤하면서도 행복한 엄마의 삶. 나는 매일 그 시간을 꽉 채워 살고 있는 것 같다. 생각해보면 참 감사하다.
학교에 일이 좀 있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으려 한다. 누군가에게 조금이라도 피해가 갈만한 이야기는 쓰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여하튼 학교에 일이 있었고, 나는 결단해야 했다. 불편해도 이 일을 관리자들과 짚고 넘어가야 할지, 나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는 일이니 그냥 넘어갈지. 두 가지의 결과를 생각해봤다. 짚고 넘어간다면……. 나의 불편한 이야기로 인해 관리자님과 사이가 나빠질 수 있다. 그냥 넘어간다면…….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테지만, 나는 방관자라며 스스로를 꽤 비난하고 살아갈 것 같다. 무엇보다 나는 크리스천이기에 정의롭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후자일 경우 나의 신념이 흔들려 버리는 일이니 괴로울 것 같았다.
수업 후 교실에 앉아 한참을 기도하며 골똘히 생각했다. 바꿀 수 있는 일은 바꿀 용기를 주시고, 바꿀 수 없는 일은 받아들일 지혜를 달라고. 한참을 기도하며 자꾸만 두근대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누군가에게 듣기 불편한 이야기를 해야 하는 그 상황 자체가 심장을 마구 두근거리게 했다. 속이 좋지 않았다. 그래도 말을 하는 게 좋겠단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심기 일전하고 교장, 교감선생님께 나의 생각을 가감 없이 말씀드렸다. 기분 나빠하실 것을 각오하고 말씀드린 것인데, 진지하게 들어주시는 모습에 좀 놀랐다. 물론 다 들으신 뒤 그거는 현실적으로 바꾸기 어려운 문제라며 난색을 표하시긴 했지만. 다시 생각해보시라고 계속 말씀드렸지만, 소용이 없었다. 사실 교장, 교감선생님의 난처한 입장도 이해는 갔다. 다만 나의 신념을 전달하고 싶었다.
얻은 것 하나 없는 상황이 꼭 패잔병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할 수 있는 일은 다했다. 친구는 나에게 말했다. 이 순간도 그저 배우는 과정이라고. 얻은 건 없어도 배우긴 했다.
다음 날,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내 일도 아닌 남의 일에 오지랖을 떨며 강하게 이야기하던 내가 인상적이었던 걸까. 교장, 교감선생님께서 나 모르게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일을 하셨고, 이틀이 지난 뒤 정말 절대 이루어지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일이 거짓말처럼 이루어졌다.
나는 이 일을 위해 오랫동안 기도했다. 언젠가 새벽은 이 일을 생각하며 눈물을 펑펑 흘리며 기도하기도 했다. 그런데 정말 몇 주 만에 관리자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하나님의 일하심이 놀라웠다.
하나님은 이 학교에서 내가 어떤 역할을 하길 바라고 나를 보내셨을까? 2월에 둘째 아이를 갑자기 유산하고, 갑작스레 복직을 하며 3월을 시작했던 나를 생각한다. 분명 계획에 없던 복직을 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복직 이후 모든 순간에 크리스천으로서 살아가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했고, 치열하게 분투했다. 연약하고 지혜 없는 나이지만, 함께 해주실 것을 믿으며 남은 한 해도 주어진 모든 것들에 최선을 다해보려 한다. 정의로워야 하는 순간에는 정의롭게, 받아들여야 하는 순간에는 받아들이며.
고민이 많다. 고민이 깊어질수록 이상하게도 입 밖으로 고민을 말하기 싫어진다. 새벽에 일어나 기도하면서 하나님과 독대 중이다. 13년 지기 친구와 오늘 집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데, 친구가 나에게 물었다. 요즘 고민이 많아 보이던데 무슨 고민이냐고. 내 안에 복잡하게 똬리를 튼 고민을 딱 하나로만 이야기할 수 없어 횡설수설하다 말했다. “모르겠어. 그냥 모든 게 엉망진창인 것 같아. 제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어.” 그러자 친구가 말했다. “엉망진창이란 게 네가 균형을 맞추려는 과정인 거지. 잘하고 있어.” 친구의 말을 들으니 걱정했던 일들이 꼭 별 거 아닌 게 느껴진다. 삶의 무게 중심을 잡으려 하기에 이리저리 모든 게 흔들려 버리는 걸까.
아이 낳고 일을 하니 정말 매일매일이 두더지 게임하는 느낌이다. 이 놈 잡으면 저 놈이 튀어나오고, 또 저놈 잡으면 이제 이놈이 튀어나오고. 이거 해결하면 저게 팍 터지고. 하루 종일 숨이 턱밑까지 차오르는 느낌을 받고 산다. 그러나 문득 생각해본다. 금요일 저녁에 친구와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나의 삶을 돌아보는 이 시간이 얼마나 감사한지를. 비록 해결된 거 하나 없고, 여전히 삶은 턱밑까지 차오르지만, 내게는 이 순간을 함께 나누며 서로를 다독일 친구가 있다.
친구 말대로 엉망진창인 이 순간이 어쩌면 균형을 잡으려 노력하고 있다는 신호일지도 모르겠다. 엉망진창인 시간을 조금은 넉넉하게 바라보는 마음이 필요한 건 아닐까. 완벽주의, 꼼꼼쟁이인 나에게는 꽤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시간일지도 모른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탈완벽주의, 탈꼼꼼쟁이로 살 수밖에 없는 시간을 선사해준 우리 호두에게 그저 감사해야 할지도. 지금은 더 넓은 나로 나아가는 시간. 무언가를 완벽히 쌓아서 행복해지기보다 무너진 그 자리 위에서 그저 행복한 나로 커가기 위해 나는 지금 성장통을 앓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