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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신앙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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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빗소리 Nov 13. 2021

우리 이제 그만해요

"너는 이타주의와 이타주의 구조자의 경계에 있어. 이타주의는 매우 성숙한 기제이지만, 이타주의적 구조자는 나를 갉아먹으면서까지 남을 돕는 사람이라 건강하지 못한 거야. 항상 그걸 주의해야 해."


친한 혜성 언니는 정신과 의사이다. 항상 타인의 입장에서 먼저 생각하는 내 성격을 존중해주고 칭찬하지만, 언니는 늘 그러한 일들이 나를 갉아먹을까 봐 걱정한다. 언니가 나를 사랑하기에 그런 경고를 자주 주는 것이라는 것을 안다.


나는 애니어그램 2번 유형이다. 유형의 이름은 조력자. 즉 남을 돕는 것이 즐거움인 사람이다. 그런데 세상 모든 즐거움이 그렇듯 지나침은 아니함만 못하다. 때론 남을 도와주다가 내가 소진될 때가 있으니 말이다.


오늘 나는 오랫동안 운영해왔던 감사일기 카톡방을 여러 개 정리했다. 가장 오래된 방은 3년 넘게 운영해올 정도로 사랑과 애정을 많이 담았던 곳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업무가 많아지다 보니 내가 이끌어 온 감사일기 모임들이 점점 버거워지기 시작했고, 모임이 오래되어 잠수 타는 친구들이 많은 카톡방은 아무런 에너지의 교류 없이 나 혼자만의 독백이 될 때가 있었다. 그것이 꽤 힘들어서 몇 번 정리하려 했지만, 나의 감사일기를 보는 것이 도움이 많이 된다는 친구들의 말에 몇 번이나 망설였다. 그러나 이제는 정말 한계치에 다다랐단 생각이 들어 오늘은 친구들에게 미안함과 감사를 담아 마지막 인사를 했다.


나는 남을 돕는 것이 진심으로 기쁘다. 그러나 이제 아이를 낳으니 내 자신의 정신 건강을 제대로 지켜내지 못하면 내 아이까지 피해를 볼 수 있다는 아픈 사실을 여실히 깨닫는다. 정신적 컨디션이 매우 안 좋은 날에는 아이에게 매우 까칠해지는 나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안심이 되는 것은 올해 들어 내게 '거절할 용기'가 생겼다는 것이다. 내 자신을 버겁게 하는 것들은 용기를 내어 거절을 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오늘의 행동도 그 연장선상이리라.


헤어짐은 가슴 아프다. 겨울은 헤어짐의 계절이다. 우리는 만났다가도 헤어질 것이고, 결국 죽음으로도 헤어진다. 나는 헤어질 것을 알면서도 내가 사랑하는 모든 이와 시한부 인연을 맺고 있는 것이다. 그 사실을 바보 같이 잊고 살았다. 카톡방을 정리하고 나서야 진짜 헤어진다는 게 무엇인지를 체감한다. 아... 우리는 정말 언젠가는 헤어지는구나.


가슴 아파하는 나에게 친구가 말했다. "네가 그렇게 열심히 해왔는데도 움직이지 않는 모임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더 강한 방법으로 다시 일하실 거야. 마음 무겁게 생각하지 마." 친구의 말이 꼭 하나님께서 해주시는 말 같이 느껴졌다. "정말 애썼어. 그동안 너무 고마워. 이제는 내가 해볼게." 따뜻한 하나님의 마음이 느껴져서 나도 무거웠던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진다.


혜성 언니의 말대로 나는 이타주의자와 이타주의적 구조자의 경계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의 긍휼함은 가끔 너무 차고 넘쳐서 내 자신을 소진시키는지 모르게 만들 때가 있으니까. 하지만 나에게는 나의 넘치는 긍휼함을 멈추게 해 줄 많은 지혜로운 조언자들이 있다. 그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르겠다. 하나님은 인간을 독처하게 만드시지 않았다. 아담에게는 하와가 있었고, 예수님에게는 12제자가 있었다. 하나님은 우리를 공동체 속에서 함께 살게 하신다. 인간은 혼자 있으면 너무나 불완전하니까.


긍휼함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다. 나는 나의 긍휼함이 자랑스럽다. 나는 정말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울어버리는 여린 감성을 가진 사람이고, 남이 괴로운 걸 보느니 내가 괴로운 게 나은 바보 같은 사람이다. 나는 이런 내가 좋고 자랑스럽다. 그렇지만 언제든 스스로를 위험에 빠지게 만든다는 것이 두렵긴 하다. 앞서 말했듯 내게는 공동체가 있고, 얼마든지 "정신 차려!"라고 죽비를 내리쳐줄 친구들이 있다. 하나님은 위험한 때에 그들을 반드시 움직이실 것이다.


"우리 이제 그만해요."


남자 친구에게나 했을 법한 말을 오늘 여러 사람에게 해버렸다.  성격과 매우  어울리는 말이다. 헛헛하다.  마음이 생생할  글로 남겨 본다.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스스로 잘했다 생각할까? 나는 그렇게 이타주의적 구조자에서 이타주의자로 한걸음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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